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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영훈

 

여성들은 그 때 어디에 있었나요?”

(출애굽기 15:19-21)


2018610

6.10 민주화운동 기념주일 예배

정영훈 자매(한국여성연구소 소장)

 

 

[바로의 군마가 그의 병거와 기병과 함께 갈라진 바다로 들어갔을 때에, 주님께서 바닷물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덮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 출애굽기 15:19-21 -

 

 

오늘은 610, 876월 항쟁 기념일입니다. 610일은 2007년 이래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도약의 계기가 된 그 정신을 기억해 오고 있습니다. 당초 이 말씀증거는 올해 초 개봉되었던 영화 1987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저는 어떤 자리에서 여성신문의 젊은 기자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데 여성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어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거리와 광장 모든 곳에 여성도 함께 있었건만,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현대사를 책으로 읽었던 그는 여성들의 이름을 거의 읽지 못했을 테고, 그 질문은 힐난이 아니라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영화의 주인공도 여성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선창하던 목소리도 여성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여성의 모습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저와 그 기자는 상상의 인물, 이러저런 모습이 뭉뚱그려 창작된 인물이 아니라, 이부영, 김정남, 함세웅, 황적준, 오연상...같은 실명을 원했던 것이지요. 실명을 부르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주변적이거나 사소한 존재로 뭉뚱그려지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더 늦기 전에, 실명으로, 자기 역사를 기록해나가야 한다고, 그것이 보다 온전한 역사가 되는 길이라고만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31년 전 오늘은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전두환에 이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날이었습니다. 그가 좋아한다는 노래 베사메무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말이죠. 같은 시각 덕수궁 옆 성공회 성당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즉 국본의 선언문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국본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고문추방국민평화대행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약속한 시간 6시가 되자 어디서부터인지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전, 이한열을 쓰러뜨렸던 최루탄이 어김없이 터지기 시작했지요.

 

5공 내내 사람들을 괴롭혔던 최루탄은 모두 4가지였습니다. 일명 지랄탄이라 불렸던 다연발탄, 투척용인 사과탄, 페퍼포그, 총류탄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늘에서 펑펑 터지거나 바닥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가스를 뿌려댔고, 마치 기관총처럼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터졌지요. 이한열 뿐 아니라 부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최루탄의 무차별 난사로 인한 인명 피해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사실 이때까지도 최루탄이 어디서 누구에 의해 생산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산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하고 있었지요. 교회여성연합과 여성단체연합 여성들이 들고 나온 피켓에 쓰인 문구, ‘우리 자식 죽이는 삼양화학 한영자, 85년 개인소득세 4’ ‘삼양화학은 살인최루탄 생산을 중단하라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들은 소비자운동을 하던 실력으로 최루탄을 생산하는 기업을 추적하여 밝혀냈던 것입니다. 회사를 찾아가 최루탄 생산 중지 시위를 하고, 국민들에게는 이 회사의 다른 제품들을 불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최루탄에 맞거나 피하거나 분노하거나 할 줄 밖에 몰랐던 사람들에게 최루탄 생산자를 찾아내는 일은 정말로 의외의 발상이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 결국 이 회사는 나중에 최루탄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여성운동가이자 국본 대표단이었던 이우정은 국본에 최루탄추방대회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독재타도라는 구호에는 아직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는 국민들도 최루탄을 쏘지마라는 구호에는 용기를 내서 동참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지요. 특히 최루탄을 쏘는 전경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그 최루탄에 맞아 죽고 다치는 것도 누군가의 자식이니 더 이상 자식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호소가 대중적 파급력이 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촌 세브란스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이한열과 밤에는 한열이를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를 둘러싸고 낮에는 거리에 나와 눈물범벅으로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평범한 부모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 언론에는 여성들이 전경들의 총구에 꽃을 꽂는 장면이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이 시위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상징이 되었고, 실제로 6.10국민대행진의 참가자는 24만 명이었는데, 6.18 최루탄추방국민대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15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국본은 기세를 몰아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했고, 계엄령이 준비되고 있다는 어수선한 소문도 돌았지만 결국, 우리가 다 아는 그 6.29 선언, 즉 직선제 개헌을 실시하겠다는 노태우의 선언으로, 6월 한 달 뜨거웠던 거리의 민주주의는 숨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을 직접 뽑도록 개헌을 하자는 것이 87년 정국의 국민적 목표였습니다. 사실 직선제 개헌이 국민적 표어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52월 총선에서부터였습니다. 이 총선에서 5공 정부는 김영삼, 김대중을 구태 정치인으로 묶어놓고 신문 방송을 통해 온갖 방법으로 선거에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창당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신생 야당에게 제1당의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야당은 아직 지구당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상태였으니, 사실 총선은 야당의 조직력이나 선거운동, 혹은 뛰어난 후보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독재 정권을 참아낼 수 없다는 국민의 분노 덕분에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야당에 표를 주었다기보다는 전두환정권이 아닌 곳에 표를 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5공의 균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은 바로 그 총선에서 염산이 들어있는 병을 들고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물러나라쯤 되는 구호를 외쳤을 겁니다. 여대생이 염산으로 여당의 후보를 공격하려했다고 신문에 실렸더군요. ‘끔찍한 운동권의 행태로 비난받았습니다. 나중에, 석방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하필 왜 염산이었어? 위험하잖아.’

사실 물이었어. 근데 위협은 해야 되니까 염산을 몇 방울 넣긴 했지. 안 넣고 염산이라고 거짓말 할 수는 없잖아?’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잡으려고 다가오는 경찰에게 위협을 할 건데, 위협도 정직하게 해야 하니까, , 그런 식이라서요. 그때부터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냄새는 나디?’

... 잘 맡으면 나긴 나. 경찰도 알았어. 압수하자마자 그게 물이라는 걸. 그래도 신문에는 염산병 들고 데모한 걸로 나던데?’

 

그 후 친구는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아무리 물이었다고 이야기를 해도 염산을 들고 나섰다는 게 항상 친구를 따라다녔고, 취직은 물론이고 노동현장이나 다른 운동조직에도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또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끔찍한 발상을 한 딸과 동생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감금되다시피 하는 일이 잦았고, 그 가운데서 점점 지쳐갔지요. 무엇보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운동권 남학생들에게는 촘촘하게 있었던,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연대의 네트워크가 제 친구에겐 없었던 거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연대의 네트워크는 제 친구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다 같은 선배요 동료였지만 사회에 나오는 순간 여성과 남성의 처지가 매우 다르다는 걸 서로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결혼은 더 큰 압박이 되었습니다. 데모를 주동한 운동권 학생이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데모를 주동한 운동권 학생이 남편이 되고 사위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과는 종류가 다른 일이라는 걸 몰랐지요. 그런 선택을 한 선배도 없었고, 있다 해도 그 경험은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곡절을 거쳐 작은 도시에서 자영업자로 살고 있는 친구는, 자신이 5공이라는 거대한 벽을 맨주먹으로 쳐서 균열을 냈던 시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상기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거기에서 멈추고 만 자신의 삶을, 포기자 혹은 실패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습니다.

 

해인아, 너와 네 친구, 4명의 여학생이 벌였던 유세장에서의 그 시위는 얼어붙은 5공에 봄을 불러온 몸짓이었어.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1년에서 16개월 정도의 형을 받고 복역한 많은 여학생들이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로로 좌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가족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나마 뜻을 이해하는 운동권 남자와 결혼을 택한 사람이 많았지. 그리고 남편들이 정치지망생이 되거나 가난한 시민운동가로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아갈 때, 살림을 살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 과외선생으로 학습지 교사로 만화 가게 주인으로, 오로지 생계를 잇기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세상의 변혁을 위해 남편과 역할을 분담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10, 20년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어려웠겠지. 점점 지쳐가거나 자신을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했다는 것도 안다. 젊었을 때의 생각 따위는 다 버린, 정신적 전향자로 살고 있다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한 일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초석이 되었다고,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85년 봄이 가고 6월이 왔습니다. 구로공단에서 6.25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라 평가되는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됩니다. 이 동맹파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6월 항쟁이, 학생운동가 출신, 혹은 지식인 출신 명망가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당시 노동운동은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5공화국 5년간 거의 활동을 못하고 있다가 겨우 8485년에 이르러 몇 개 회사가 민주노조를 결성하거나 임금협상을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은커녕 파업의 경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맹파업의 주역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계획한 것이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몰렸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습니다. 시작은 구로공단 내 사업체인 대우어패럴의 노조 간부를, 공안 당국이 갑자기 연행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우어패럴 노조는 회사와 이미 몇 달 전에 아무런 말썽 없이 무사히 임금협상을 마무리했던 곳으로 공안 당국이 문제 삼을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노조였습니다.

 

그들이 연행된 날은, 공교롭게도, 구로 지역의 노조 간부들이 한국노총이 주최하는 조합원 교육을 받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날이었는데, 모인 간부들은, 이제 시작된 민주 노조의 싹을 지키기 위해 함께 연대하여 싸울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가리봉전자의 노조위원장이었던 윤혜련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삼경복장, 효성물산 등을 거쳐 가리봉전자에서 잔뼈가 굵은 스물 세 살의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교육이 시작된 날은 622일 토요일이었고, 월요일인 24일 파업을 시작할 정도로 신속하게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함께 파업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회사가 가리봉전자 외에 효성물산, 대우어패럴, 선일섬유였습니다. 4개 사업장은 모두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업장으로 참가 인원은 다 합쳐 1320명이었습니다. 파업 당시의 사진을 보면 농성장의 노동자들은 거의 여성이었습니다. 파업농성장의 유리창에는 구속자를 석방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노동악법 철폐하라같은 구호가 내걸렸습니다. 유리창에 붙은 구호는 TV 뉴스 등을 통해 반복해서 보도되었는데, 구호의 내용과는 달리 과격하고 대책 없는 시위를 일삼는 노동자의 상징처럼 보도되곤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625일에는 롬코리아 등 3개 회사가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농성을 벌였지요. 당시 롬코리아 라는 전자회사에서 일하던 학출, 학생출신 노동자 즉 위장취업자였던 박민나는 파업을 지지하는 시한부 농성을 벌일 때, 빨갱이 학생들이 순진한 노동자를 꾀고 있으니 자나 깨나 위장취업자를 조심하라는 회사, 언론 등의 대대적인 선전이 가장 신경이 쓰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학생 출신이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질 때 혹시 동료들이 배신감을 느끼거나 정말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항시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노동자로 일하는 동안, 동료들 사이에서 그들은 대학도 나왔고, 졸업하면 잘 먹고 잘 살 텐데 어째서 우리 같이 못 배운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자고 먹으며 사는지 알 수가 없다는 대화가 자주 나왔다고 합니다. 박민나 자신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일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겠지요. 그보다는 단순한 이유, 이게 마음이 더 편해서, 이게 옳아서 등등 이유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겠지요.

 

학출노동자였던 제 친구 임윤옥은, 자신이 들어간 공장에 모두 2명의 위장취업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16살짜리 소녀였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기위해 남의 주민증을 들고 나온 것이지요. 제 친구는 자신이 아직도 이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 소녀와 같은 삶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무튼 구로공단의 파업은 파도처럼 이어졌습니다. 이제 학생들이 연대하여 가리봉오거리에서 지지시위를 벌였고, 이어 시민사회운동권이 지지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이었던 김영미는 연대와 지지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 담장 바로 밖에서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특히 여자들의 목소리. 우리가 여자였기 때문일까. 그리고는 담장 안으로 빵과 생리대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꼭 필요했던 거죠. 나중에 경찰이 담을 빙 둘러싸서 못 오게 막으니까 멀리서 구호가 들리고 빵들이 날아오다 담 밖으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게 없었으면 우리는 하루도 못 버텼겠지요.’

 

당시 구로동맹파업을 이끌었던 윤혜련 김영미는 학출 여성노동자들에게 특별히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효성물산의 경우 최소한 6명의 학출이 있었고 가리봉전자는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해도 3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서로 말없이 짐작하여 대개 노조 각 부서의 차장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조의 간부나 부장은 노동자가, 학출은 차장이,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서강대학, 서울대학, 이화대학 출신의 그 여성노동운동가들 중 정계로 나아가 정치지도자가 된 인물도 있지만 대개는 이 사회의 어디에선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그들 중 다수는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밝힐 수 없었던 위장취업자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 탓도 컸을 겁니다. 그때 담장 밖에서 구호를 외쳤던 여성들, 빵과 생리대를 던졌던 여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한 시절을 바쳤던 그 여성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당신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866월 그러니까 6월 항쟁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입니다. 당시 주식회사 성신이라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던 허명숙이라는 여성노동자 한 명이 부천 경찰서에 잡혀왔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그가 위장취업자임을 알아냈고, 곧 그에게 5.3 인천사태로 수배 중이던 서노련 인노련 관련자들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성, 이름 없이 그저 성으로만, 권양, 이라 불리던 여성, 권인숙은 그렇게 우리 앞에 왔습니다.

 

당시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기독교회관에서 농성 중이었는데, 인천교도소로 가족 면회를 다녀온 사람이 재소자 중에 부천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여성이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민가협 여성들은 부천경찰서 앞으로 가 급히 적어 온 피켓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성고문 자행하는 경찰은 물러가라. 사실, 그들은, 성고문을 당했다고는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아직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민가협 여성들이 누구입니까? 운동권의 기동타격대, 떳다방, 5분 대기조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조직입니다. 즉각적인 대응을 통해 민주운동 진영에 최초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것이 이 조직의 특장이었습니다. 사실 민가협의 원조는 70년대의 구속자가족협의회입니다. 남민전 가족, 구미유학생간첩단 가족,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가족 등으로 각각 모임을 갖던 가족들이 민청련 여성들의 노력을 통해 민가협으로 통합된 것이지요. 민청련은 80년대 중반, 5공의 기세가 아직 서릿발 같을 때, 민족민주통일의 기치를 걸고 반독재투쟁을 선언했던 단체로, 남영동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김근태가 의장으로 있었던 단체입니다. 그러니까, 민청련의 여성들은 구속자가족이기도 했습니다.

 

이기연은 민청련의 인상적인 로고, 독을 잔뜩 품은 두꺼비를 그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독을 잔뜩 품은 채 독재라는 뱀에게 먹히리라, 그리하여 그 뱃속에서 뱀을 죽이고 민주주의의 알을 낳으리라. 이것이 그 로고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남편과 함께 민청련 활동을 했고, 남편이 먼저 구속되자 그때부터 농성장과 거리와 법정과 교도소, 그리고 민가협 사무실을 집 삼아 살았습니다. 구속학생 부모들에게 자식의 석방에만 애태우지 말고,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서자고 설득한 것도 그였습니다. 당시 학부모들은 용공분자 자식을 두었다는 세상의 손가락질에 잔뜩 위축되었던 데다가, 반성문을 쓰면 자식들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자식을 야단치며 눈물로 호소하던, 불안에 떠는 힘없는 부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기연은, 그들을, 한 사람의 운동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운 것이지요. 물론 그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부모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 장기수들과 자신의 자식들이 하나의 범주로 취급되는 것에 격렬한 반감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억압적인 정권의 희생자요, 민주화운동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강하고 위대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넘어서 우리로 가는 그 좁은 길을 서로 의지하며 기꺼이 걸어왔고, 오늘 민주화운동의 동반자로 굳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 자식 밥만 해주고 살았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중주가 권인숙의 재판에서 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하고 일갈하며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 흉악한 운동권으로 몰린, 억울하기 짝이 없는 권인숙에게 발언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재판부를 꾸짖었다는 일화는 많은 분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법정모독죄로 구속되어 서대문 구치소에 입감되었는데, 입감 순간, 큰 소리로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엄마가 너희들 곁으로 왔다. 이제 같이 힘내서 싸우자고 외쳤다고 합니다. 재소자들에게 그 외침은 희망의 소리였습니다. 872월에 아직 추웠을 그 무렵에 그 희망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독재는 아직, 멀쩡한 학생을 물고문해서 죽일 만큼 무모하고도 강했으니까요. 이중주는 그 순간 이기정의 어머니가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나선 모든 이들의 어머니였고 그 자신 당당한 운동가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확장시켜 새로운 삶으로 들어선 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871, 행방이 묘연했던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남영동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알려지고 사나흘이 지났을까, 그러니까 아직 박종철의 죽음이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던 때, 군부독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던 때, 감히,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때의 대공분실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권력을 가진 곳,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것으로 알았던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 권력의 어두운 심연을 향해, 바로 그 코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박종철의 이름을 부른 것이지요. 그로부터 며칠 후 122, 30명 정도 되는 여성 시위대가 남영동 남영극장 근처에서 박종철은 내 아들이다로 시작되는 성명서를 뿌리며 연좌시위에 나섰습니다. 박영숙, 김희선을 비롯한 여성들이 보여준 그 용기는 이어지는 범국민적 저항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27일 박종철범국민추도식, 33일 박종철49재 겸 고문추방국민대행진, 413일 호헌 발표, 그리고 520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사건진범을 발표하기까지, 6월 항쟁을 준비하는 시간은 그렇게 숨 가쁘게 흘러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69일 연세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요.

 

저는 오늘 이우정, 이해인, 권인숙, 이기연, 이중주, 김희선, 박영숙, 윤혜련, 김영미, 임윤옥, 박민나, 그리고 여전히 익명인 여성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이름들이 6월 항쟁과 거기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거나 대표적인 이름들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제가 보고 들은 이야기 중에 몇 가지를 전해 드렸을 뿐이니까요. 사실 이 분들이, 한 때, 자신 앞에 놓인 역사의 수레바퀴를 기꺼이, 그리고 힘차게 굴려 나간 분들인 것은 맞지만,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 혹시 그 바퀴에 쓸리거나 다쳐서 자신의 삶을 가둔 것은 아닌지, 혹은 너무 많이 소진되어 마치 20대에 삶의 대부분을 살아버린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 크고 작은 이름들이 합쳐져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이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5공의 거대한 벽을 맨손으로 쳐서 균열을 내고, 혼신의 힘을 다해 민주주의의 봄을 불러왔다는 것을 압니다. 876월 항쟁이라는 위대한 그림을 완성하는 한 조각의 퍼즐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가나안을 향해 떠난 고난의 행진에서, 미리엄과 함께 일어나 영광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다시 길을 떠날 힘을 내었던 수많은 자매들처럼 말이지요.

 

이 이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고맙습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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