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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성수

비를 맞으며 같이걷는 것

(욥기 2:11-13, 누가복음 10:36)

 

 

201521일 주일예배

김성수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원)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욥기 2:11-13 -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누가복음 10:36 -

 

 


들어가며: 문을 열다

안녕하세요?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셨는지요이 예배 가운데, 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우리들 가운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 앞에 섰습니다여러모로 부족할 테지만, 평소에도 매우 다양한 반찬과 국, 그리고 찌개로 차려지는 새길교회의 말씀증거이니, 그 반찬 중에 오늘은 조금 어설프고 거칠며, 설익은 음식이라 생각해 주시면서, 오늘의 말씀양식을 함께 나누는 자리라고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본래 때로는 어설프고 낯선 것이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혜안과 통찰을 주기도 하듯, 오늘 이 자리와 이 시간을 통해서 마음 한 켠에 미약하나마 작은 새로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지 않아의 공동체: 새길의 모습과 이정표

제가 나름 에서, 그리고 아직은 짧은 시간이지만, ‘에서 바라보고 함께 해왔던 새길 공동체에 대한 느낌과 단상을 먼저 밝혀 보자면, 예전에 좋아하던 홍승우 화백의 여덟 컷의 만화가 던져 주었던 메시지와 닮아 있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있으실 테지만, 잠시 소개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홍승우, “그렇지 않아라는 말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이 걱정이 되었는지, 엄마가 딸을 앉혀 놓고서 말합니다친구랑 잘 지내기 위한 말 한 마디가 있는데, 엄마가 가르쳐 줄게. 바로 그러게 말이야라는 말이란다. 상대 친구가 불만에 가득 찼거나,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 주길 바랄 때 해 주는 말인데, 이 말은 나는 너의 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상대 친구의 마음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단다.” 그러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줍니다, 누구누구 아무개 때문에 정말 짜증나 죽겠어, 속상해!” 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을 때, 옆에 가서 그러게 말이야라고 해 주면, 상대 친구의 기분이 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딸에게 말하기를, “이 말을 잘만 사용하면, 넌 여러 친구들을 얻을 수 있을거야.”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다음 날, 그 딸 아이는 학교에서 얼굴을 감싸 쥐고 탄식을 하는 친구를 보게 됩니다. 아마도, 그 딸 아이는 아주 야무졌던 모양입니다. 어제 배웠던 엄마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침 그 친구가 말하기를, “, 난 정말 공부도, 운동도, 뭐 잘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하면서 화를 내곤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제 엄마의 말을 열심히 들었던 딸은 울고 있는 그 친구에게 뭐라고 했을까요그 딸 아이는,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아주 공감한다는 듯, “그러게 말이야!”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얼굴이 더 붉어지며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그 딸 아이 역시도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을 안고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따지듯 되묻습니다엄마, 엄마는 "그렇지 않아!" 라는 말도, ‘나는 너의 편이라는 뜻이 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회자되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다르다라는 것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다르다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분명히 아는 까닭입니다, 새길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이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을까요? 새길 공동체가 때론 힘겨웠고, 외로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걸었던 그 길이어서 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 지향을 잊지 않고 가려는 이정표였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 삶의 결과도 어우러져 잘 설명해 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고 꿈꾸며 바라는 교회라는 것의 방향과 닮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다름에 인색하지 않고, 다름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다름이기에) 따뜻한 온기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환대라는 말로 삶에 밑줄을 긋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또 문을 열 때,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돕는다는 것, 혹은 연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욥기와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본래 두 본문을 따로 떼어내 읽기란 더욱 어려운 신학적, 해석학적 능력이 요청되는 일이기에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두 본문인 욥기와 복음서의 말씀은 지난 한 해, 어쩌면 저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고 씨름했던 본문이 아닐까 싶은 문제의식에서 펼치게 되었습니다. 너무 처절했던 고통의 현실이었던 까닭에, ‘욥기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고통 앞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고 몸부림 쳐야 했던 까닭에, 예수님의 말씀들과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서, 오늘 말씀증거 제목을 통해서 이미 짐작하셨듯,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마땅히 요청되는 바에 관해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돕는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연대는 우산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같이걷는 것이라고 깊은 울림을 주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를 벗 삼아, 그 맥락 안에서 풀어 나가보고자 합니다.

 

욥에게 닥친 시련, 그리고 의 친구들

아마, 모두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 그가 겪었던 시련은 말로 다 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닥친 불행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그래서 우리는 욥의 시련에 몹시 당황합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영웅적인 인물에게 느닷없이 닥쳐오는 불행으로, 사람들에게 연민'공포'의 감정을 환기시킨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바로 욥을 바라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에 대해 공포'를 느낍니다.

 

욥의 시련은 사탄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자, 사탄은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b)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욥의 시련은 우리에게 성찰의 물음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겠는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이 물음을 남겨둔 채, 사탄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으로 욥을 시험합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도, 심지어 자녀들도 모두 잃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파도가 욥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은 제게 꽤나 불편했습니다. 차라리, 시편의 시인들처럼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절규라도 했더라면, 그 불편함이 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욥의 이러한 믿음은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욥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에게서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본문에서처럼,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이후에 전개될 이야기에서 하는 역할' 때문에, 어느 정도 우리에게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친구인 욥에게 닥쳐 온 불행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은 '을 위로하기 위해 단걸음에 달려옵니다. 만나서 어떻게 위로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욥과의 대면을 심정적으로는 위로하면서도 회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 친구들은 만사를 다 제쳐두고, 친구를 향해 달려옵니다. 거리가 멀다거나, 바쁘다거나,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걸음에 달려옵니다. 이 정도의 을 본 적 있으십니까?

 

그들은 욥의 에 머물러,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함께 울었습니다. 친구의 불행을 함께 애통'해 하고, ‘동고' 합니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단 하루도, 고통 속에 있는 친구 '에 머물기 어렵고, 어지간히 부담스러워하는 저희들로서는 감히 그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끊긴 그 자리에서 그저 그 친구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은 뜨거운 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친구의 아픔 때문에, ‘함께' 아파하는, 그래서 꽤나 괜찮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이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에는 금이 갔고, 결국에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욥의 친구들에 대한 우리들의 부정적 인식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해석의 욕망 앞에서

여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그들 사이에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은 서로 하나'이었습니다. 뜨거운 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와 신념, 또 사상, 그리고 내 생각과 내 판단이 끼어들자, 그들의 관계는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벗이 겪는 그 고통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마음으로 함께 ' 되어줄 때, 그들은 '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는 순간, 그들은 판관이 되었습니다. 판관이 있는 곳에서, ‘'은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늘 되새기며 명심해야 할 말씀을 들려주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고전 8:1)

 

그들은 인습적인 사고에 젖어서 세상을 죄와 벌, 원인과 결과라는 도식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 우리는 우리가 내던져진 '의 풍경을 비추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호'합니다. 선과 악은 때로 종이 한 장 차이기도 하고, 선한 사람에게도 불행은 불현듯 다가올 수 있고, 또 악인에게도 행운은 따를 수 있습니다. 경건하다고 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불신자라고 해서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다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여백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감히 고백해 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악인도, 그렇다고 위선자도 아닙니다. 다만,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경솔했습니다. 어쩌면 불행에 빠진 욥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은, 남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인 까닭입니다.

 

수많은 해석의 욕망 앞에서 또 다시 침몰한 세월호

우리는 앞서 나누었던 내용이 낯설지 않음을 바로 직감합니다. 지난 해 내내, 우리 사회에서, 또 주변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해석의 욕망 앞에서 갈라지고 넘어졌던 우리의 모습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지난겨울, <곁에 머물다>라는 책에서 정경일 원장의 짧은 글에서처럼, “고통의 봄날, 세월호 사건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유가족이고, 실종자들의 가족이었습니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차이는 거대한 고통의 바다 앞에 사소한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흘린 눈물은 우리의 기도였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 우리는 가장 인간적이었고, 가장 종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편협한 진영논리에 묻혀,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자, “인간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바뀌었고, 모두가 피로감'을 느꼈으며, 나아가 불편'하게까지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편만 남고 곁이 파괴된 사회였습니다.

(정경일, [], <곁에 머물다>, 157-158.)

 

욥의 친구들처럼 우리는 조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의 말처럼, ‘'의 언어가 되기 위해 견뎌야 할 최소한의 시간마저 견디지 못했습니다. 고통의 현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소리, 몸짓, 절규, 흐느낌을 온전히 듣기' 위해, 견뎌내면서 온전한 말이 부활되기를 견디며, 그저 끊임없이 성찰적 물음만을 던졌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엄기호 선생은, ‘'은 답을 공유하는 사이지만, ‘'물음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견디면서, 물음을 더 치열하게 공유했어야 했는데, 조급했고, 또 성급했습니다.

 

해석의 욕망 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다시 예수에게로

그렇다면, 무조건 해석의 욕망'을 경계해야 할까요? , 단순히 조급하고 섣부른 해석의 욕망을 경계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그럴 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는 우리가 묻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지평에서 해석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어떤해석인지가 매우 중요해 집니다.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며, 그 과정에 점철된 해석의 해석이야말로, ‘가벼운해석, 혹은 쉬운해석 앞에 선 욕망을 단단히 경계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그래서 예수를 길로 삼아 걷고자 하는 신앙인들은 다시 예수에게로 시선이 향합니다.

 

우리는 이미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의미 있고, 통찰 있는 혜안을 지니신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래서 사실 말씀증거를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부담이 있었습니다. 저부터도 가슴을 치며 공감했던 말씀이었고, 각주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간결하고 명확한 말씀이었던 까닭에, 그 뒤에 말을 붙인다는 것은 부끄러운 사족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 저는, 해석의 욕망 앞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으로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율법교사와 예수가 나눈 대화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어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대응하는, 혹은 응답하는 형식에 주목해서 단순하고 가벼운, 그리고 쉬운 해석의 욕망을 넘어서 의 언어, ‘의 몸짓으로 응답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답이 아니라 되물음’, 그리고 대답이 아니라 응답

해석의 욕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율법교사는 이미 자신의 해석이 전제된 물음을 예수에게 던집니다. 앞선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물론, 예수를 시험했다는 누가복음의 기자의 의도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만, 그 부정적 인식을 지우고서라도, 그 물음에 대해 예수는 쉽게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시, 되묻습니다.

 

물음에 대해 대답이 아니라, “다시 물음이란 화두는 쉬운, 혹은 가벼운, 그래서 단순한 해석의 욕망 앞에서 갈피를 쉬이 잡지 못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굳이 영생에 대한 물음이 아니었더라도(물론, 대답으로 정의 내려질 수 없는 문제가 영생임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또 영생은 대답으로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물음은, 대답이 아니라 더 큰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답해질 때가 많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우리들이 내던져진 의 풍경은 모호하고,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많은 까닭입니다그리고 그 되물음은, ‘무엇물음을 던진 이로 하여금, 다시 돌이켜 스스로 라는 물음으로 그 자신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합니다.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는 물음에 물음으로 이어져 계속 됩니다. 율법교사는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로써 두 번째 물음 앞에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는 쉽게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자세히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 끝을 우리는 다시 주목해 봅니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두 번째 물음 후에도, 역시 대답이 아니라, 다시 되묻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이웃이 누구냐라는 물음에, 다시 그에게 이웃 되어주기로 바꾸어 오히려 되묻습니다. 다시 말해, 물음에 물음으로, 그리고 물음에 더 큰 물음으로, 대답이 아니라 응답을 하시면서, 또 그 응답을 일러주십니다그가 처음 물었던 영생'에서 시작된 물음이 이웃 되어주기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생은 이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주시는 것일까요? 아무튼, 이를 통해 이웃의 경계를 설정하거나 범주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물음을 던진 이의 생각의 방향을 전복적으로 뒤집어 이웃 되어주기로 바꾸어 놓으십니다아마도 예수는, 해석의 욕망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어 놓는지, 또 그것에 얼마나 쉽게 유혹되고 쓰러지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던 듯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해석의 욕망이 아니라, 이웃 되어주기를 통해 의 언어, ‘의 몸짓을 일러주십니다.

 

연민과 시혜의 관점을 넘어

물론, 대답이 아니라 응답으로 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답이 아닌 응답으로서 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 받는 이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변해 버린 오늘의 세상살이에서 타자를 향한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것 자체로 사치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본 바처럼, 우리는 그래도한 번 더, 물어야 합니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더 물어야 합니다.

 

평화 활동가이면서 평화를 글로 남겼던 수전 손택은, 자신의 책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을 넘어서기 위해 이런 말을 남깁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적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게으르고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수전손택, <타인의 고통>, 154.)

 

분명한 것은,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혹은 베풀 수 있는 이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어쩌면 시혜는 강자가 약자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분명 예수를 길로 삼아 걷는 우리들은, 그저 나 혼자 선하게만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우산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같이걷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고, 더욱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연민과 시혜의 관점을 넘어서야만 으로 응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근기(根氣)

문제는 근기(根氣)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할 때, 그래서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합니다. 사람됨, 역사가 혹은 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잘 바라보기 위해서는, 쉬운 대답이 아니라 치열한 되물음', 그리고 쉬운 대답이 아니라 삶으로 응답'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똑똑한 이들이 없어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니라, 알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못한 탓일 겁니다. 스스로 길이 되어 길을 내어주셨던 예수의 삶을 살아내려는 근기(根氣)’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나가며: 문을 닫다

저는 지난 해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합니다. 비록 당일이었지만, “세상 속으로: 사회적 영성이라는 주제로 모였던 새길 공동체의 여름 수련회 때,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새길 공동체를 나는 새길이다!’ 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였는데, 각자가 선 자리에서의 고민을 녹여내어 즐겁고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퍼포먼스들을 만들어냈던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그것이 제게 인상 깊었던 이유는, 다양하게 표현된 퍼포먼스들을 가로 지르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우리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자기반성'성찰이 진하게 묻어있던 것이었습니다. 함께 신앙인으로, 또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면서 때로는 말이 앞섰던 우리 자신(공동체)의 모습, 또 그로 인해 진실된 헌신이 결여되었던 모습, 또 낯선 이들을 깊이 환대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공동체)의 모습을 스스로 아주 신랄하게 비꼬아 풍자했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지만, 저는 동시에 아주 반갑고, 또 감사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또 진정으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거리 두기인 자기반성성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자부심이, 다만 끊임없는 자기반성자기성찰물음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물음은, 비로소 출발점임을, 거기서 출발해서 나아가 예수가 걸었던 그 길처럼, ‘자기부정’, ‘자기비움을 향하는 데 있음을 깊이 되새겼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시대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성복 시인의 글귀가 떠오릅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63.)

 

병이 든 것도 문제이지만, 아프지 않은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의 글귀는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수 따르미라 자신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단순히 우산을 건네주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성육신적 의미, 화육의 의미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서, 조건이 있어야만 나눔이 가능하다는 고백도 이제 우리에게는 무의미해 집니다.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걷는 길인 까닭입니다.

 

예수의 낯선 시선을 통한 인문학적 통찰로, 또 그 인문학적 통찰에서 신학적 응답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의 언어, ‘의 몸짓을 살아내는 저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기에, 또 여전히 말이 앞서기에 두려움이 큽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제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진짜 내가 맞는 비를 같이 맞아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 물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이 앞서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으로서 내딛을 수 있는 단 한 걸음' 앞에 충실하기를 기도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성찰적 다짐의 지향을 잊지 않기를 다만, 바랄 뿐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기를 다만, 바랄 뿐입니다. 다음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스스로를 진리의 추구자라고 묘사하는 어느 방문객에게 스승은 말했다. ‘당신이 찾는 것이 진리라면, 모든 것에 앞서 한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방문객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넘치는 열정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다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자기가 잘못인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인정할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앤서니 드 멜로, [일 분 지혜] 중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남아공 인종차별을 반대하며 인권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남긴 기도문으로 대신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타인들의 필요'를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열어주소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열어주소서.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열어주소서.

강자들의 분노에 두려워하지 않고 약자들을 보호하게 하시고,

부유한 자들의 분노에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게 하소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한 곳을 내게 보이시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바로 그곳에 사용하게 하소서.

내 눈과 귀를 여시어,

오늘 당신을 위해 평화의 일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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