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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인섭

십자가의 길: 조롱과 모욕의 비를 맞으며

(마가복음 15:16-20; 29-32)


 

2014127<인권주일> 예배

한인섭 형제(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번 주는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하는 인권주간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 주간이기도 하고요. 지금 서울시에서는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12.10.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선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서울시민위원회를 통과한 인권헌장 중에 1개 조항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미진하다고 하여 선포를 보류한다고 합니다. 여론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듯이 동성애 관련 논란이 있는 조항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울시장은 득표에 영향을 미칠 기독교 일부세력의 반동성애적 경향에 신경 쓰는 것 같고, 인권단체들은 소수자의 인권은 다수의 횡포에 맞설 근거’, ‘인권 없이 생존 없다면서 인권조항의 정치적 흥정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문제조항의 대립은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헌법이든, 유엔이든, 인권헌장이든, 인권에 관한 문서의 핵심조항 중의 하나는 차별금지조항입니다. 누구든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데 반대하기란 사실 어렵습니다. 동성애혐오단체들은 처음엔 아예 [인권헌장=동성애조장헌장]이니 인권헌장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억지로 나왔습니다. 여러 차례의 토론과 숙고 끝에, 그런 주장을 도저히 관철할 수 없자, 다음엔 인권헌장 중의 차별금지조항을 문제 삼았습니다.

쟁점은 단순합니다. “서울시민은 누구나 차별을 받지 아니할 권리가 있다고 간단히 처리할 것인지,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혼인 여부, 임신/출산, 가족 형태/상황, 인종, 피부색, 양심과 사상, 정치적 의견,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예시적으로 규정할 것인지의 대립이었습니다. 전자로 한다고 해서,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성애 혐오 기독교단체들은, “성적 지향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동성애 등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조장까지 하는 꼴이 되기에 그런 표현은 아예 표출조차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성적지향이니 동성애니 하는 건 말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성애 반대경향은 성경의 일부조항에서 연유한다고 하여 기독교 일각에서 동성애 반대의 경향은 하나의 흐름으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동성애와 기독교의 바람직한 관계를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성적 지향이란 단어를 삽입하지 말자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의 방식, 단순한 반대를 넘어서, 상대의 존재 전체를 능멸하는 그런 극단적 언사를 거리낌 없이 쓰는 그런 태도를 문제 삼고자 합니다. “동성애는 항문섹스를 조장하고, 에이즈의 창궐 원인이 되고, 동성애자는 수간(獸姦)/시간(屍姦)을 한다는 식으로 하여, 아예 동성애자들을 짐승만도 못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면서, 여린 마음을 찢고 있습니다. 인권헌장 공청회장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면서, 그 회의 사회를 맡은 인권운동가 박래군 씨에게 네 동생이 죽었으면 다냐는 식의, 가슴에 못을 박는 그런 언사를, 정교한 조준사격 하듯이 준비해서 자행했습니다.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감도 없이 쏟아내는 막말은 사실 엄청난 상처를 남깁니다. 육체적 고통, 상처에 못지않게 그런 혐오적 언어폭력이 남기는 트라우마는 심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런 언행들이 마치 서로 경쟁하듯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하는 현장에 난입하여 폭식투쟁한다면서 대놓고 조롱하는가 하면, 5.18 희생자의 관에 대고 홍어택배왔다고 하는 이런 막가는 언행들 말입니다. 이런 말은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 아마도 그래 짐승이면 어때라고 한 술 더 뜰 것 같습니다. 해방직후 수많은 테러와 학살을 저지른 서북청년단을 부활한다고 하면서, 단기에 해골을 버젓이 그러놓는 그런 작태들 말입니다. 십자가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 동성애는 항문성교, 잘났어 정말과 같은 이런 피켓을 들고 자랑스러워하는 목사도 있는데, 이런 짓거리를 보면서,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토록 막가는 짓을 하고 고개를 쳐들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것인가, 예수님은 동성애자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했던가, 아무리 봐도 제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으로 복음서를 들여다보니, 예수님이 받은 수난 중에서 조롱, 모욕, 희롱등의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마다 매우 상세한 편인데, 그 때 예수님의 수난행적 중에서 조롱과 모욕에 대한 기록이 빠지지 않습니다.

흔히 십자가처형이라고 하면, 그 육체적 고통에 집중합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세 번씩이나 쓰러져 스스로 십자가를 운반할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고, 십자가에 매달려 손바닥과 발목에 쇠못이 박히고, 6시간 동안 그에 매달려 피를 쏟고 물을 쏟고, 그러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절망 속에 죽어간 한 결백한 인간의 고통 말이죠. 저도 십자가 하면 늘 그런 연상을 하며, 형법학자로서 십자가처형 없는 시대가 그래도 문명발전 아닌가 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숙독해보니, 성경 본문에는 십자가형의 고통 자체에 대한 언급은 별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자체야 상식 중의 상식이니까 언급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재판 도중에 받았던 조롱과 모욕에 대한 서술은 상당하고, 사형이 확정된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받았던 조롱과 모욕은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그냥 사형이 확정되고 집행되어 생명을 상실한 게 아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조롱과 모욕을 우박처럼, 비처럼 맞으며 속절없이 견뎌야 했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에서,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미명까지는 참으로 기가 막힌 순간들이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호산나 하며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에 가서 환전상을 때려 엎고, 학자들과의 논쟁을 중인환시리에 타개하는 순간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지배층의 극도의 반감을 샀고, 곧바로 죽이자는 음모가 실질화 되었습니다. 목요일 저녁 최후의 만찬을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계속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안자고 떠난 제자 한 사람은 스승을 잡아 넘기는 향도자로 나섰고, 애제자들은 다 도망쳤습니다. 수제자는 스승을 맹세코 모른다며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을 면전에 대하면서,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까요.

예수에 대한 사형은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한밤중에 잡혀가 새벽에 사형판결이 이뤄졌고, 바로 처형대가 있는 골고다로 끌려갑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애매한 가운데, 하루아침에 사형선고와 집행이 있는, 그런 재판은 사법살인 중에서도 최악의 사법살인입니다. 예수에겐 변호인도 없고, 말도 하지 못한 채,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어버린 거지요.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하고는, 그 와중에도 책임을 모면하려고, 예수와 바라바 중 한명은 사면/석방 시켜주겠다고 했을 때, 군중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군중은 호산나 하던 그 군중이 아니라,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동원된 관제 군중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예수님은 제자의 배신/부인에 이어, 군중재판. 여론재판에서도 패배하여, 바라바만도 못한 사람으로 판정 찍혔습니다. 이렇게 제자도, 군중도 그를 버렸습니다.

 

예수의 사형이 확정되자, 군인들은 예수를 대놓고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왕으로 만들어 조롱하는 것이지요. 임금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면류관을 대신하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인사합니다. 예수가 어떤 실권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이 같은 왕의 의식 놀이를 할 리가 없지요. 그의 인기 기반이던 군중과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병사들에 포획된 불쌍한 존재인 예수, 그를 치켜 올리고 절을 하고는, 곧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이렇게 마음껏 그를 희롱합니다. 희롱이라 하니, 정확히 말해 갖고 논다는 거지요. 예수는 마음껏 갖고 놀 수 있는 희롱대상, 즉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예수의 모욕 대열에 가세합니다. 평소에 했던 말을 비틀어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 내려 오려무나하고 그의 무능력을 비웃습니다. 대제사장, 율법학자들도 네가 그리스도거든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게하면서 조롱합니다. 성전 허물고 짓겠다는 비슷한 얘기는 예수님 스스로 한 말이지만, 다른 맥락에 그 말을 대입시키면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네가 신통력 있으면 지금 십자가에 내려와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어줄게 하는 조롱들.

그런데, 이 말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지 않나요? 바로, 예수님이 광야에 40일 금식하러 갔을 때, 사탄이 했던 두 번째 시험과 똑같습니다. 그 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너를 떠받치게 할 것이다고 시험하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고 배척한 바 있지요. 지나가는 군중들이, 평범한 백성들이, 생각 없이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그 말들 속에서, 악마들이 낄낄거리며 준동하고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아마도 정치적 반란자)도 예수에게 욕설을 퍼붓습니다. 인간은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든, 자기보다 힘없는 자들을 향해 욕설하고 조롱할 자세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언어적 폭력에 그치지 않고, 병사들은 이제 예수의 옷을 찢어 나눕니다. 겉옷은 4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한명이 제비 뽑아 가지니, 십자가 위의 예수는 완전히 빨가벗겨졌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채, 그를 가릴 옷 한 조각 없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 이 분이 예수님입니다. 호산나 하던 군중도, 제자도 다 도망가 버리고, 침뱉음 당하고, 뺨맞는 예수. 병사에게 희롱당하고,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조롱당하고, 제사장등에게 조롱당하고, 심지어 같이 죽어가는 죄수들에게까지 욕설을 받아야 했던 예수. 이게 우리가 믿는 예수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그 때,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부활의 미래를 알고 있든 없든, 모든 고난은 온몸의 마디마디에 전해오는 전존재적 고통입니다. 그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망의 극단을 토로하고 숨을 거둡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6시간의 고난은, 아주 짧은 시간이 아닌가, 한숨 잘 시간 정도에 불과하지 않는가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극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1초가 하루 같고 1시간이 1년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수난자의 고통에 대해서, 복음서는 정황을 서술할 뿐, 수난자 자신의 심정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심정에 대한 실마리는 예수님의 엘리엘리의 진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그 자체로써 어떤 절망적이고 절박한 심리를 알려주지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할 때 바로 시편 22편을 암송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시편 22편의 첫 머리는 바로 엘리엘리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하고 절박하게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하는 수치스런 상황에 대해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모욕거리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니, 주님이 그를 구해주겠지.” 합니다.

자신은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 처지의 나를 보고, 옷을 찢어 나누고, 조롱하면서 즐거워한다고 말이지요.

예수님도 바로 그런 처지에 있었던 것이겠지요. “사람이 아닌 벌레로 취급되는 느낌말입니다. 속된 말로 버러지. 그러니까 예수는 자신이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단 말이지요.

버러지는 무엇입니까? 누구나, 맘대로 짓밟아도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고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 사람도 아니고, 버러지이니까요. 이렇게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당하고, 대중의 구경거리, 비방거리, 조롱거리로 전락한 처지는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객관적 형편이 열악하다고 곧 비참하게 느끼는 지경으로 가진 않지요. 믿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부정당하고, 아무도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황. 스스로에 대한 어떤 변론이나 변명도 통하지 않아 입을 다물고, 닥쳐온 고난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상황. 대놓고 희롱당하고,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낙인찍히고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참담한 실존의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행은, 바로 이러한 배신과 부인, 조롱과 모욕의 비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임을 우리 예수 따르미들은 분명히 인지하고 감지해야겠습니다.

 

 

이제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불의한 세력들이 막말과 조롱, 희롱의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은 어디에 위치해야 하나요? 세월호 유가족, 5.18의 유가족, 존재 자체로써 그저 조롱과 희롱의 대상이 된 이 땅의 동성애자들. 그들에게 돌팔매를 던지고 조롱하는 편에 예수님이 설 수 있을까요? 터무니없는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며(com-passion), 그들이 던지는 돌팔매를 같이 맞아주는 게 예수 따르미의 참 모습이 아닐까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그러니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0-11).”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예수 따르미라면,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는 그 편에 확고히 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걸고, 성경을 내걸면서, 기독교적 언어로 조롱하고 박해하고, 사람을 짐승 취급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부 기독교인들은 무례한데다 무식합니다. 인간혐오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보면, 결백한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과 꼭 닮아 있습니다. 기독교와 성서 속에는 인간의 존엄과 존중을 일깨워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지만, 모든 내용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년 전의 이야기인 구약 레위기의 일부 구절을 갖고 와서 바로 현실에 대입시키려는 것을 보면, 그건 기독교적 탈레반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레위기 수준의 법제와 관습을 21세기 한국의 기준으로 끌어들이게 되면, 저 탈레반 아프칸이나 이라크 북부의 이슬람국가의 수준, 세계최악의 인권침해국가의 수준으로 후퇴합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이라면, 4천년도 더 된 구약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따라 세상살이의 기준을 세워가되, 현대국가가 도달한 인권기준과 기독교교리를 조화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령 UN인권선언은, 예수님 가르침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을 집약시켜 놓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대의 인권장전은 세속적으로 쓰여진 성경복음서라는 신학자의 평가도 나와 있으니까요. 예수 따르미는 현대적 인권가치를 전파하고 그보다 더 나은 단계로 견인해야 합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는 이해관계의 반영인 현실 법률보다는 더 고차원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인권을 조롱하고 인권침해를 서슴지 않는 기독교도들은 세상의 애물단지요 걱정거리일 따름입니다. 이슬람 탈레반이 위험천만이듯이, 기독교 탈레반의 횡포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조롱하고 모욕하는 이들의 행태를 복음서들이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을 박해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저열한 패악질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민낯을 여실히 폭로하는 것이겠지요. 자신을 향해 쏟아내는 그런 조롱과 모욕에 대면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들고 혐오발언을 쏟아내면서, 타인을 모욕하고 능욕 하는 게 마치 진짜 기독교인인양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네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짓이 바로 예수의 말씀을 배반하는 것이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고요.

예수 시대에 문둥병은 오늘날 에이즈처럼 불치의 병이고, 또 천형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문둥병자, 앉은뱅이 등에 대해 어떤 선험적 낙인을 찍지 않고, 모두 하나님을 빛내기 위한 존재라면서 감싸 안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옆에는 당시에 핍박받고 낙인찍힌 약자, 소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창녀, 세리,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여인, 혈루병, 문둥병 등 천형 같은 질환자들, 정신장애인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환대하고, 함께했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돌팔매처형당할 여인도 예수님의 보호망 속에서는 안전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동성애자, 외국인, 다문화가정, 다양한 결손으로 힘들어하는 이들도 예수님의 환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학대받고 조롱당하고 희롱당하는 이들을 예수님은 차별 없이 환대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가겠는가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분명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요. 그렇다면 이 세상 어디선가 터무니없이 조롱과 희롱의 대상이 된 이들에 대해,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돌팔매질하는 자가 아니라 그 처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그런 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요.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인격입니다.

사람을 장난감처럼 희롱하고,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로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은 예수 따르미의 참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악마적 횡포로 인해 온갖 희롱과 조롱과 멸시를 받았음을 기억합니다.

터무니없이 온갖 비난을 받는 이와 함께하는 이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런 짓의 죄악성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존중하고 아끼고, 서로의 고난을 같이 아파하며, 예수님의 모습으로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도록 부족한 저희를 이끌어주소서.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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