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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죽음이 삶에게

(전도서 3:1-2)

 

2014112일 공동체추모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 전도서 3:1-2

 

Ocean.jpg

© Anne Loustaunou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

 

지난 주, 가수 신해철 씨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꽃처럼 살았던 그와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신해철 씨와 저는 비슷한 데가 좀 있습니다. 우선 그와 저는 동갑내기입니다. 같은 해 대학에 들어가 같은 전공인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락을 했고 저는 락을 들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락을 좋아했던 것도 같습니다. 정치적 관점도 조금 비슷했던 것 같고, 제도종교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비슷한 점 때문일까요? 그의 때이른 죽음이 몹시 안타까웠고, 그와 같은 또래인 제게도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안타까운 죽음을 접할 때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붓다의 시대에 고타미라는 여자가 어린 아들을 잃었습니다. 넋이 나간 그는 죽은 아들을 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던 한 사람이 붓다를 찾아가 보라고 합니다. 고타미는 붓다에게 가서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붓다는 고타미에게 마을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면 아들을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그 작고 흔한 겨자씨 하나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니! 고타미는 희망을 안고 마을로 돌아와 집집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첫 집에서는, "미안해요, 겨자씨는 있는데, 지난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라고 합니다. 다음 집에서는, "어쩌죠? 우리 큰 아이가 몇 해 전 그만 물에 빠져 죽었어요." 라고 합니다. 그 마을에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단 한 집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고타미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평범하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우리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죽음을 어떻게 볼까요? 성서에는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보는 관점과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이 모두 있습니다.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성서 본문 중 하나는 오늘 읽은 전도서 기자의 시적 표현입니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전도서 3:1-2) 반면, 죄와 죽음의 연관성을 신학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주장하는 이는 바울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2) 전도서 기자의 말과 바울의 말의 차이는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신학'의 차이입니다. 저는 신학자이면서도 바울의 신학적 죽음 이해보다는 전도서 기자의 시적 죽음 이해에 마음이 더 끌립니다.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그의 관조적 성찰이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변화하는 것, 돌아가는 것

 

전도서 기자가 죽음의 필연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움직임을 깊이 응시하며 관조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은 우주의 시인이신 하느님께서 쓰신 시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존재의 실상과 신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모래 하나에서 세계를, 야생화 하나에서 천국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 천국을 담은 가을 국화가 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잠시 이 꽃을 한 번 바라 볼까요? 이 국화는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을 던지는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꽃은, 그리고 우리는, 단지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그 도도한 변화의 부분이며 과정입니다.


이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겨 볼까요?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구처럼, "초록을 심심해하던" 나뭇잎들이 서서히 색을 바꾸더니 하나 둘 땅으로 춤추듯 내려 앉고 있습니다. 나무들은 담담히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잘 어울리지요. 낙엽은 우리에게 생명의 무상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런데 저 나뭇잎은 단지 떨어지고 있는 것,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낙엽귀근(落葉歸根). 뿌리로,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근원'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시작하는 곳입니다. 나뭇잎들에게 죽음은 근원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누군가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참 시적이면서도 영적입니다. '돌아감'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자연의 시집은 죽음의 신비를 알려 주는 시들로 가득합니다. 그 시집의 다른 시를 모리 슈워츠는 이렇게 낭송해 줍니다. "멋진 이야기를 하나 들었네. ... 바다에서 넘실대던 작은 파도 하나가 자기 앞의 파도들이 해변에 부딪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소리쳤어. ', 나도 저렇게 부서져 죽게 되고 말거야!' 그때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파도 하나가 부드럽게 깨우쳐 주었어.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우리는 단지 파도가 아니야. 우리는 바다의 일부야.'" (미치 앨봄,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파도의 관점에서 보면 두려운 죽음도 바다의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존재의 작은 찰랑거림일 뿐입니다.


낙엽과 파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존재로 변화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문을 열고 이 세계로부터 나가는 것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물론 그 문 너머의 삶이 어떤 것일지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궁금해야 할 것이 아닐까요?

 

슬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이런 지혜가 단지 관조에만 머문다면 자칫 무관심과 냉담으로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바라보는 냉철한 이성은 따뜻한 인간적 감정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 감정은 무엇일까요?


뉴욕에서 살 때, 아침마다 아이를 통학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제 일상의 하나였습니다. 그 길에 아이의 한국어 능력을 길러 주려고 '알아맞히기' 게임을 자주 했습니다. '스무고개'와 비슷한데, 각자 속으로 뭔가를 생각한 후 힌트를 줘서 상대가 그것을 알아맞히는 게임이었습니다. 보통 '자전거''사과'처럼 사물을 문제로 내는데, 하루는 뭔가 추상적인 개념을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생각하며 힌트를 줬습니다. ", 이건 말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야." 근데 아이가 대뜸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슬픔?" 사랑을 물은 건데 슬픔이라 답하니 애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아이의 답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되고 그의 부재를 슬퍼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죽음은 필연적 사실이지만, 사랑했던 사람과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하지 못하면 슬픔은 딱딱한 돌덩이처럼 굳어져 우리의 몸과 마음 깊은 곳에 박히게 되고, 두고두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슬픔이 눈물과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슬픔은 안에서 밖으로 흘러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해야 할 때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은 감정적 평정이라기 보다는 감정적 마비 상태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제가 유학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항공권을 구해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저를 기다리지 못하시고, 제가 돌아오기 이틀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받을 충격을 염려한 가족은 제게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머니를 고향 선산에 모실 때까지도 저는 온전히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했습니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이었기에 제가 느낀 것은 슬픔보다는 당혹감과 죄책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지낸 후에도 제 마음의 장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몸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 어머니의 침대에 누워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울음이 밀고 올라오며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밤에 펑펑 울고 난 후에야 저는 어머니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슬픔의 수분이 있었기에 이해의 싹이 틀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슬픔의 의미와 힘을 배우게 해 주었습니다. '울다'라는 뜻의 한자 '()''눈물 루()' 자에서 따온 '삼수 변()''설 립()'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스이 고타로는 이를 눈물을 흘린 후에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해야 비로소 일상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슬픔은 다른 감정보다 더 오래 지속됩니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슬픔에 너무 오래 사로잡혀 사는 것도 문제지만 슬픔으로부터 너무 빨리 빠져 나오려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가 보인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애도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입니다. 200일밖에! -- '200일이나'가 아니라 --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 진상규명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그만 잊자고, 이제 그만 슬퍼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알아맞히기' 문제를 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 그게 뭘까요?" 그 답은 지난 봄에 그분들도 함께 흘렸던 눈물 속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하는 사랑의 공동체

 

슬픔은 관계적 감정입니다. 슬픔은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슬픔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을 때, 죽음은 덜 고통스럽게 경험됩니다. 죽음을 깊이 탐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도 친숙한 환경에서 사랑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죽는 사람은 죽음을 덜 두려워하며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공동체적으로 맞이하는 것은 전통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여섯 살 때 고향 마을에서 경험한 최초의 죽음이 꼭 그랬습니다.


마을 어른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마을 남자들은 천막을 세우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거꾸로 뒤집은 검은 무쇠 솥뚜껑에 돼지비계로 기름을 낸 후 전을 부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사람들은 떠들썩거리며 술을 마시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원색의 종이꽃으로 장식된 꽃상여도 기억납니다. 상여꾼의 종소리와 곡소리는 구슬펐지만, 음악의 선율 같은 느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최초로 경험한 죽음은 무섭기보다는 자연스럽고, 화려하고, 심지어 흥겹기까지 했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삶과 죽음이 페이드 인/아웃 영상효과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이미 죽음이 시작되고, 죽은 후에도 얼마간 삶이 지속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환갑을 맞는 사람은 그때부터 조상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죽음으로 건너 가는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후에는 탈상 때까지, 상식(上食)이라 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받았습니다. 자손들은 집을 떠나고 돌아올 때마다 큰 소리로 고인에게 인사했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과정이 서서히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공동체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핵가족과 개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의 죽음은 지독하게 외롭고 부자연스러운 과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생명연장 의술의 발달로 인해 대부분의 현대인은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홀로 세상을 떠납니다. 죽는 자도 살아 남는 자도 죽음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죽음은 더 낯설어지고 더 두려워집니다.

 

현대의 이러한 죽음문화에서 교회는 공동체적 관계를 경험하게 해 줍니다. 퀴블러-로스의 관찰처럼, 공동체와 함께 할 때, 죽어가는 이와 살아가는 이 모두 덜 외롭고, 그래서 덜 괴롭게 죽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경험되는 죽음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고마움, 사랑의 감정도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지난 한 해 동안 먼저 돌아가신 공동체 자매형제들과의 이별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난 해 박윤자 자매님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 된 상태여서 가족도 공동체도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님은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치고 계셨습니다. 문병을 갔을 때 보았던 자매님은 삶과 죽음을 달관하신 분 같았습니다. 물론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셨지만, 그것은 한스러운 눈물이 아니라 초탈한 이의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슬피 우시다가도, 우스갯소리를 하시며 환히 웃으실 때는 참 고우셨지요. 그 맑은 눈물, 고운 웃음에 문병 간 우리가 오히려 위로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방에 함께 앉아있는 죽음을 친구처럼 받아들이고 계신 자매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죽음은 '관계의 소멸'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박윤자 자매님이 떠나신 며칠 뒤에 홍근수 목사님께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향린교회를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심장으로 만들고 은퇴하신 후, '원로목사'로 대접 받으며 여생을 편히 지내시는 것을 마다하시고, 평신도 공동체인 새길교회에 한 명의 '형제'로 참여하는 모험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목사님의 장례식장에는 '평화와 통일의 사도, 홍근수 목사' 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비록 병세가 심해지면서 새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목사님은 우리에게 정의, 평화, 통일의 '사도행전'을 계속 써 갈 수 있도록 영감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번 봄에는 정광복 형제님께서 세수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형제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서로돌봄위원들과 교우들이 병실을 찾았을 때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형제님은 너무 힘드셔서 눈도 뜨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번쩍 눈을 뜨시고 우리를 둘러 보시더니, 산소 마스크를 자꾸 벗으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호흡이 불편하셔서 그러시나 보다 생각했는데, 당신 손으로 산소 마스크를 벗으시고는 한 마디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앉으세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형제님은 서 있는 우리 다리 아플 것을 생각하셨던 겁니다. 저는 그 한 마디가 정광복 형제님께서 평생 동안 살아 오신 영성을 요약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배려'의 영성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직접적 멤버셨던 이 세 분 외에도, 우리 각자의 가족, 친구, 지인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있습니다. 고타미가 깨달았던, 모두가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 모두 지난 한 해 동안 체험해 왔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더 깨닫습니다. 죽음은 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죽음은 사랑을 끝내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속시킨다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죽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영적 경험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자매형제와 마찬가지로, 저 낙엽과 파도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의 우리도 때가 되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죽음이 삶에게, 우리에게 해 주는 말은 단순하면서도 명백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다 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가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으로 들어갈 때, 공동체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마지막 호흡의 순간,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실어 날숨을 내어 보내겠습니다.

내가 죽는 그 날이 추운 날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 입김에 담긴 따뜻한 사랑을 볼 수 있도록.

- 제러드 킨츠

 


자비로우신 주님,

오늘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죽음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 앞에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음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을 느끼게 하시고,

신비에서 불안이 아니라 희망을 찾게 하소서.

죽음이 주는 모든 물음표에

사랑의 느낌표로 답하게 하소서.

이 생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날숨이 오직 사랑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
    조성희 2014.11.07 07:31 (*.150.73.225)
    말씀 감사합니다. 공동체가 죽음을 경험할 때마다 가까이 있지 못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항상 공동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고신해철씨 기사를 다시 찾아 읽으면서 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 보고 싶습니다" ㅡ 조성희 드림
  • ?
    최만자 2014.11.08 00:28 (*.54.86.195)
    오늘 말씀, 슬픔과 아름다움이 하나가 되었읍니다. 말씀 들으며 난 많이 울었습니다.
    조성희 자매님, 잘 지내나 궁금했는데 여기 같이 말씀듣고 나누게 되네요. 계획한 일들 잘 이루고 건강히 지내시고 얼른 돌아오세요. 항상 그리워합니다.
  • ?
    조성희 2014.11.08 06:49 (*.145.61.202)
    사랑이 듬뿍 묻어난 선생님의 답글을 읽으니 마음이 많이 따뜻해지네요.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전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타국에 있으면서 '사랑' 이 어떤 것인가를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인간의 평등성'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보고싶습니다."
    -조성희 드림
  • ?
    정경일 2014.11.09 20:45 (*.79.171.223)
    제 부족한 이야기를 징검돌 삼아 두 분이 대화 나누시는 모습이 참 좋네요. ^^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성희 선생님, 그곳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깊은 교제 나누시고
    평화가 되어 돌아 오세요.
  • ?
    조성희 2014.11.10 08:19 (*.145.48.102)
    정경일 형제님, 새길공동체에 있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제게 '돌아 갈 곳이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심 또한 감사합니다.
    제가 있는 이곳에서 만나는 분들은 저를 보면 한국의 긴장상태를 염려하며 묻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가 필요한 곳 중에 하나인 우리나라로 돌아갈 때 '평화' 가 되어 돌아갈 수 있게 정진할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조성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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