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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서진한 목사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았다

(마태복음 11:16-19, 누가복음 15:11-24)


 

20141012일 주일예배

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한다.”

(11:16-19, 새번역)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15:11-24, 새번역)

 

 

 

 

1


누가복음 15장의 본문은 교회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른바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하도 많이 들어서(?) 예수의 비유치고는 꽤나 긴 이 비유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잘 아는지는 좀 따져볼 일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비유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선한 아버지의 비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탕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탕자를 용서하고 품어주는 선한 아버지, 곧 선한 하나님이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비유의 제목은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유의 핵심을 똑같이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본문을 찬찬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아들이 둘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재산분할을 요구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나눠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미리 재산을 나눠달라는 것, 그것은 유산을 미리 상속하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렇습니다. ‘불효막심입니다. 유산이란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부모의 유지에 따라서, 혹은 그 사회의 관례나 법에 따라서 유족들에게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혹 미리 나누어준다 해도, 그것은 부모가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주도적으로 할 일입니다. 자식들이 요구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입니다.

고대근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유산분할을 요구하는 것은 불효하고 부당한 일이었으며, 심지어는 율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였다고 합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이 비유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연하고도 즉각적으로 이런 고얀 놈 봤나!’ 하는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분노할 일은 이 아들이 무슨 원대한 계획이 있어서 유산을 미리 나눠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는 유산을 받아서 사업을 펼치다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 일이란 유산을 챙겨서 먼 지방에 가서 방탕하게 살면서 다 날린 것뿐입니다.

결국 아들이 유산을 미리 나눠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버지 슬하를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슬하에 있기 싫다는 것, 곧 아버지의 세계, 아버지의 질서 아래 있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 그 질서는 아버지가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여 세운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멀리 벗어나려고 합니다. 나중에 먼 도시에서 빈털터리가 된 작은아들이 고향의 아버지에게 돌아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데,(21) 그때 그가 말하는 는 재산 탕진보다는 도리어 이 대목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비유 속의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작은놈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큰놈에게는 나중에 유산을 물려받으라고 할 수 없으니, 결국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만 것입니다. 아비의 심사가 얼마나 복잡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아비의 세계를 벗어나는 아들! 그것은 힘들게 모은 재산을 잃는 것만 아니라,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불효한 아들에 대해 군소리조차 하지 않습니다. 군소리조차 하지 않으니, 늙은 아비의 슬픔이 더 진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아비는 늙었고 아들은 컸습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먼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며칠 만에 물려받은 재산을 다 정리해서 떠났다는 말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예수의 비유는 간결한 문장이고, 때로는 생략되고, 때로는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문장과 침묵의 틈새에는 숱한 현실적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우리의 상상력도 피어납니다.

아무튼 금융자본을 골간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며칠 만에 처분하여 현금화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 사고파는 아파트 한 채도 제값 받고 팔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며 재산이 대개 땅과 과수 그리고 가축들로 이루어진 고대 농경사회에서 며칠 만에 재산을 정리한다는 것은 가치와 시세를 따지지 않고 헐값으로 팔아치웠다는 뜻입니다. 견고하게 쌓아온 아버지의 세계는 그렇게 덧없이 무너졌습니다. 아들은 그 늙고 오래된 세계의 잔해를 뒤로하고 돈주머니를 쥔 채 홀홀히 떠나갔습니다. 남겨진 것은 늙은 애비의 비애뿐입니다.

 

 

2


먼 도시로 간 아들은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큰아들의 비난에 따르면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렸습니다.(30) 그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그 세계의 질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질서에 따라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한껏 실행하며 산 것입니다. 자신이 자라났던 그 세계와 완전히 다른 자신만의 세계, 자신이 법()이자 결정권자인 세계를 세운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보기에 자신의 세계는, 낡고 오래된 세계가 아니라, 젊고 신나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계는 오래가지 않아 급격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그 시기가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라고 합니다. 작은아들이 구축한 자유로운 세계가 몰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시의 큰 흉년은 소농들을 여지없이 몰락시켰습니다. 흉년은 사람들이 열심히 가꾼 삶의 터전들을 마구 뒤흔들었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오갈 데 없게 된 작은아들은 그 지방 주민 가운데 한 사람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품을 팔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들에 나가서 그 사람의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굶주림이 심해서,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작은아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함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처절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 당시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을 것입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결정적으로 혐오하는 동물입니다. 구약 전통에서 돼지는 부정하고, 따라서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강대국 지배자들은 유대인의 신앙심을 꺾기 위해,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 먹기를 강요했습니다. 마카베오서에는 그 강요를 거부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 당시에, 돼지고기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정한 돼지를 치면서, 돼지 먹이라도 먹고 싶어 했다니,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진저리를 치지 않았겠습니까?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제야 작은아들은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17) 그는 낡은 아버지의 세계, 따뜻하고 풍족하며 가족의 온기가 있는 그 세계를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자기가 내팽개치고 온 아버지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노여워하고 있을 아버지의 마음을 풀 수 있을지 궁리합니다. 그리고 할 말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18-19)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아들이 될 수 없으니 품꾼으로라도 받아달라고 간청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3


작은아들은 먼 길을 걷고 걸어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직도 마을에서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20)

작은아들이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아버지가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이 비유는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라는 짧은 문장에 아버지의 상태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떠나갔던 바로 그 길로 돌아오고 마을은 아직 먼 곳에 있는데, 아버지가 멀리서 그 아들을 보고 달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아버지가 본래 시력이 좋았는데, 우연히 그 길을 쳐다보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은 아들이 오는 것이 아버지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젊은 아들이 먼 도시로 떠난 그 길을, 늙은 애비가 여러 해 동안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떨칠 수 없어 동네 어귀에서, 자식의 뒷모습이 사라져 간 그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망부석처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편지나 전화가 있어서 서로의 안부나 생사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연락할 길은 인편(人便)뿐이었습니다. 인편도 먼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비의 세계가 싫어 떠난 자식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을 리 만무합니다. 재산을 다 날린 뒤에는 마음이 있어도 돈이 들어야 하는 일이니, 아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비는 몇 년째 자식의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혹시 재산을 처분해서 거금을 들고 가다가 강도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타지방에서 돈 냄새나 풍기다가 험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낯선 도시는 위험합니다. 아비는 그야말로 자식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을 더는 볼 수 없는 상황, 이것이 아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혹여 눈앞에 나타날까 목을 빼고 기다립니다. 자식을 키운 사람은 잘 압니다. 이것이 부모에게는 가슴 미어지는 고통이란 것을!

늙은 아비는 고통스런 가슴으로, 작은놈이 떠난 길을 매일 지켜보며,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은 모진 기다림입니다. 이 기다림은 말 그대로 늙은 아비의 가슴을 헤집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짓물러가던 그 눈에 신기루처럼 작은놈의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아비는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고, 마구 끌어안고 입 맞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비는 거지꼴의 지저분한 아들을 마구 끌어안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삭히기 위해 미리 생각하고 연습해 온 사죄의 말,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고 이제부터는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등의 말은 아버지의 기쁨 앞에서는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어라 지껄이든 상관없이, 들떠서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을 신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고,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좋은 옷, 반지, 신발은 아들 신분을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그러고서 말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24) 아비의 말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아비는 자식을 잃을 수 있었고 다시는 못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에는 아비의 절망과 고통, 희망 없는 긴 기다림, 그래서 또한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이 대목을 클라이맥스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 혹은 그 탕자를 받아들이는 선한 아버지의 비유가 됩니다.

 

 

4


그러나 이 비유의 끝은 여기가 아닙니다. 여기가 절정도, 클라이맥스도 아닙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큰아들은 집 가까이 오자, 집에서 나는 음악소리와 춤추고 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종이 대답했습니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27)

그런데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누구나, 당연히 큰아들이 반가워하며 동생에게 달려가는 장면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큰아들은 분노합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유를 듣던 당시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놀라운 반전입니다.

결국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을 달랬습니다. 그러자 큰아들은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29-30) 이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정반대 편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는 주체할 수 없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참을 수 없이 화를 냅니다. 아버지와 큰아들은 완전히 다른 감정입니다. 기쁨과 분노, 참으로 극적인 대비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아들의 출현으로 인한 아버지의 기쁨과 그 대척점에 있는 큰아들의 분노라는 극적 대비는, 작은아들이 나타나기 전 아버지의 고통큰아들의 평온함이라는 극적 대비를 전제합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잃고 고통당할 때, 그 곁을 지킨 큰아들은 내내 평온했다는 말입니다. 상실한 것 때문에 고통당한 사람은 그 상실한 것을 되찾으면 뛸 듯이 기뻐하겠지만, 상실이 결코 상실이 아니었던 사람에게는 갑자기 나타난 동생은 평온함을 깨는 문젯거리입니다.

아비는 떠나간 자식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병들어 갔지만, 큰아들은 자기선(自己善)에 만족했습니다. 큰아들은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잘 섬겼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는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 주장합니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집안, 한 세계에 살아도, 다른 집, 다른 세계에서 산 것입니다. 아비는 잃어버린 아들 생각에, 그 아들이 살아 있을지, 그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 채 기다림에 목을 매고 있었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의 슬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관리에 집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였습니다. 작은아들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였지만, 아버지를 몰아낸 세계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법과 관례에 비추어보면, 작은아들에게는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 큰아들에게는 3분의 2가 상속되었을 것입니다. 꽤나 큰 몫입니다.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그날도 밭을 돌보다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을 관리하고 늘리는 데 열심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큰아들은 동생이 빈털터리로 돌아왔으니, 자신이 상속받은 재산에 손을 벌릴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화를 내는 큰아들을 달래는 늙은 아버지의 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라는 말은 그래서 가슴을 아리게 만듭니다. 조금이라도 동생을 걱정했다면 아버지의 슬픔을 알았을 것이고, 그 아버지의 슬픔을 알았다면 그 기쁨에 그렇게 화를 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우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만을 보는 아들,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선을 생각한 그 아들은 끝끝내 아버지의 고통을 공감(共感)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마태 21:28-32 참조) 온전한 섬김은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그 명령에 담긴 마음을 헤아려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어도 결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압니다. 함께 있지 못해서 생기는 슬픔보다,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아서 생기는 슬픔이 더욱 크다는 것을! 잃은 것은 그리움이고, 함께 있으나 따로 있는 것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절정에 있는 인물은 작은아들이 아니라 큰아들입니다. 예수의 긴 비유는, 함께 있어도 끝내 함께 있지 않은 큰아들의 냉담함 앞에서 멈춥니다.

 

 

5


오늘 본문의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 이어져 있습니다. 세 개의 비유가 다 상실과 회복을 말합니다. 이 비유들은 어느 아카데미에서 보편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들은 갈등이 벌어지는 특정한 상황에서 말해진 것입니다. 상황은 이 세 비유가 시작되기 직전, 누가복음 15:1-2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비난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정결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죄인과 의인을 구별하여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예수께서 이 비유를 그들에게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들, 특히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들어야 했던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민족의 구원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았던 경건한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를 최우선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면 누구나 제사장들만큼이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결하게 살기를 요구했습니다. 경건하게 살기를 요구하고, 거룩함에 이르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이 솔선수범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살려고 애쓴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경건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의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죄인들은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과 분리되어야 했고, 경건하지 않은 것은 경건한 것과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거룩한 것이 거룩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들은 차단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구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죄인의 다수가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고통당하는 밑바닥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민초들의 삶은 피폐했습니다. 고액의 세금에 시달렸고, 흉년이라도 들면 소농들은 땅을 담보로 곡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리(高利)에 땅이라도 빼앗기면 소작인이 되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몸까지 팔아야 했고, 그래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식민지 사회의 질곡을 그 사회의 밑바닥에서 온전히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열정으로 경건을 실천했던 바리새인들은 그 민초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만 민초들의 불경건함부정결함을 보았습니다. 민초들의 고통, 그들의 생명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 자신들이 세운 선()이 우선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경건하였으나, 그래서 가장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집단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길은 갈라졌습니다.

마태복음의 본문도 똑같은 현실을 풍자적으로 꼬집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예수께서 보기에 당시 세대는,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상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러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아이들이란 본래 신나는 놀이판이 벌어지면 덩달아 흥을 내고, 슬픈 일이 벌어지면 자신과 별 관계없는 일일지라도 눈물을 그렁거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반응 없이 냉담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아이들이 아닙니다.

예수의 풍자는 구체적인 현실 비판으로 바뀝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고, 자신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자 마구 먹어대는 자요, 술 잘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한다며, 당시 사람들의 행태를 꼬집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회개할 것을 외쳤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고, 예수가 하나님나라가 지금 시작되었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냉담했고 냉소했습니다. 요한은 목이 잘렸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 신랄한 풍자는 남의 기쁨에도, 남의 슬픔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함께 있어도 결코 함께 있지 못하는 세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대는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 크게는 당시의 유대인들만이 아닙니다. 남의 슬픔과 기쁨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다면, 우리 역시 그 풍자의 칼끝에 서 있습니다.

 

 

6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계명 역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사랑은 말 그대로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은 몹시도 이루기 어려운 목표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신적인 경지의 일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랑을 그리스로마식으로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최고의 단계에 지고지순의 사랑(아가페)을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라고 요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여러 단계로 나누는 이론이 서구 신학에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사랑이란 도축한 가축의 각종 부위를 해체(정형)하듯이, 그리 잘 구별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어려운 것은, 사랑이 이성이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니, 삼가고 노력하면 이룰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인 한, 그것이 남녀의 사랑이든 어머니의 사랑이든, 사랑은 감정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랑이 어디 사고와 결단만으로 되는 일이던가요?

바울은 사람이 남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어 불사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3:3)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극한으로 실천해도, 그것은 의무의 이행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공감에서 비롯됩니다. 적어도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때, 그의 존재의 울림에 내 존재도 공명할 때, 우리는 마음을 열게 되고, 상대를 내 안으로 들이게 됩니다.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상대를 내 안으로 들이게 된 사랑, 그것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고통이기도 합니다.

연민은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민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연민은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공감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입니다. 사회적 존재라고 표현해도, 관계 내적 존재라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관계로부터 비롯해서 모름지기 인간의 관계란 의존과 공존의 관계입니다. 생명을 기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공감 없는 관계는 바른 관계일 수 없고, 공감 없는 사회는 인간의 사회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기쁨에 즐거워하고 남의 슬픔에 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일에 기쁨보다 더 많은 것은 슬픔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남의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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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사건을 보면서, 공감, 공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지도층의 공감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짓거리를 지켜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부모가 죽어 남겨진 아이를 고아라고 부릅니다. 남편과 사별한 여인을 과부라고 하고,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보낸 부모를 부르는 이름은 없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붙일 말은 만들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죽으면 뒷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은, 그 처절하고도 질긴 슬픔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식들이 떼거지로 죽었습니다. 이 나라, 이 정부는 건져낼 수 있는 시간이 적지 않았는데도, 제대로 구조도 하지 않은 채 수백 명을 수장시켰습니다.

온 나라가 슬퍼하고 분노하며 절망한 것은 사고의 규모가 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해경이나 정부 재난대처 체계의 무능하기 짝이 없는 현실 때문에, 꽃 같은 아이들이 기울어가는 배에서 얌전히 구조를 기다리다가 한꺼번에 차가운 물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뉴스 속 그 장면을 차마 더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이야기만 들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우리는 집단적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지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접어두고 팽목항으로 달려가 자원봉사자가 되었습니다. 이 땅은 그 슬픔에 대한 거대한 공감, 공명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문제는 급격하게 유병언 추격놀이로 변질되더니, 어느새 정치권의 소꿉놀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늘 하던 대로 정부 여당과 야당 시민단체가 밀고 당기는, 그야말로 정치놀이가 된 것입니다. 이 정국을 주도하는 정부 여당의 마술 같은 정치솜씨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그 사이 여당 일각에서는, 이 죽음의 숫자를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와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단순사고’, ‘교통사고의 하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대통령의 눈물은, 그것이 진실이었든 아니든, 이미 말라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가족들이 가슴 아픈 일이 없게 하겠다던 진심어린 듯한 말은 바람에 날아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유가족들의 요구가 헌법체계에 맞지 않는다거나, 그 일을 야당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더니, 이제 한국 경제가 위기 앞에 서 있다면서, 정부 부처별로 릴레이로 경제회복을 합창합니다.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말하지만, 그 슬픔은 결코 같은 뜻이 아닙니다. 진상규명을 함께 약속하지만, 그 규명은 결코 같은 내용이 아닙니다. 책임자 처벌을 같이 말하지만, 그 처벌은 알맹이가 같지 않습니다. 끝내는 세월호 비극 앞에 함께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함께, 같이 우는 눈물이 아닙니다. 한쪽은 잃어버린 자식을 위해 울고, 다른 한쪽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웁니다. 지금 여기, 함께 있으나 끝내 함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2014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황의 방한이니, 아시안게임이니 하는 요란한 일들로가 아닙니다. 다만 세월호의 충격과 슬픔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416로가 아니라, ‘2014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416일의 충격과 슬픔으로만이 아니라, 2014년 이 한 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억장 무너지는 불통(不通)과 불감(不感)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가족만 아니라 그 너머 사람들에 대해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눌린 사람, 내몰린 사람,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짐승이든 식물이든, 이 땅 모든 생명의 신음을 듣고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만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로마 8:19-22) 그는 만물의 신음소리를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밟히고 내쫓기고 약탈당하고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맘으로 공감하고 몸으로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약탈과 죽임은 그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슬픔이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끝내는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에 동감하고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명하는 사람, 공명인(共鳴人)입니다. 예수가 그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명했습니다. 그 예수의 공명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그 예수의 사랑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공명의 끝이고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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