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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014.09.24 11:59

[2014.09.21] 진정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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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기협

진정한 예배

(4:23-24, 12:1-2, 22:37-40)

 

2014921일 추수감사주일 예배

김기협 형제

 

 

여러분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이 자리에 서서 말씀증거를 하려니 부담되고 떨리기까지 합니다. 여러분께서 납득하기 어려운 게 좀 있더라도 잘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새길에서는 추수감사예배를 통상, 추석이 지난 2주후쯤 드려서,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11월 넷째주인데 비해 우리는 보통 9월 하순경, 오곡이 무르익는 때입니다. 의미는 추석과 추수감사절이 비슷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차원에서는 추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의 경우엔 둘은 크게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길은 올해 많은 추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활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적극 행동하는 형제, 자매들로 변화해 가고 있음을 볼 때 영적으로 많은 수확을 거두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최근 세계 과학계에 있었던 한 추수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렵니다. 물고기가 육지동물로 진화하는 과정을 규명한 논문이 과학지인"네이쳐"지에 게재된 것입니다. 물고기는 약 4년 전쯤(지구나이가 46억년이니 상대적으로는 최근이지요?) 육지로 올라와서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로 분화했다는 것이 그동안 과학계의 통설이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골격이 어떻게 육상보행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는가는 큰 수수께끼였습니다. 캐나다의 오타와대학과 맥길 대학의 연구팀이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어종인 폴립테루스 세네갈루스를 육지와 물속에서 두 군으로 나누어 키워서 실험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물고기는 아가미와 허파를 함께 갖고 있어 육지에서도 살 수 있고, 배에 달린 긴 지느러미를 이용, 땅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움직이기도 한답니다. 1년생 물고기들을 각기 물속과 땅위에서 8개월간을 기른 뒤, 이동능력 등을 비교했습니다. 물속에서 자란 물고기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육지에서 생육된 것은 지느러미 2개를 다리처럼 곧추세워 움직이고, 이동시 머리를 들 수 있도록 가슴뼈에도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물의 몸 구조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발달적 성형성(가소성)현상을 입증하는 중요한 논문이라고 평가 되었으며, 어류가 육상동물, 특히 네발짐승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규명하는 단서도 제공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진화발달 생물학과 실험 진화연구 분야에서 획기적인 결과를 얻은 것이며 놀라운 사실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진화론과 기독교와의 갈등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인들에게 창세기의 비유적 해석이 허용되고 있고, 어떤 부분들은 반드시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과학의 발전은 점점 하나님 즉, 유일신의 존재를 더 확신시켜주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 왜 서로가 이해 못하고, 배척을 하는 걸까요? 저는 한동안 해초를 이용한 바이오에너지를 연구하는 중, 지구 및 바다의 생성과 해조류의 출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처음엔 미세조류 다음에 갈조류가 생긴 뒤 홍조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녹조류가 생겼습니다. 서서히 녹조류가 육지로 올라가 육상식물, 풀 나무들이 생성된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미역, 다시마는 갈조류이고 우무가사리는 홍조류의 하나이고 파래는 녹조류의 하나입니다. 인간의 역사보다는 십수억 년이 더 오래된 생물들이지요.

우주는 빅뱅으로 만들어 졌으리란 게 천체물리학계의 정설이고 137년 전 쯤 만들어졌으리라 계산이 되고, 우주는 계속 팽창, 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며 지구상에 생물체가 출현한 것에 대해서도 과학자들은 이제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창조의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부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창조의 역사를 주관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육신의 형상을 한 사람과 같은 존재보다는 오히려 자연법칙을 만들고 주관하는 신의 존재를 믿게 합니다. 아직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의 끊임없는 역사로 인해 우리가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우주의 생성으로부터 있었고 현재도 태양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수소를 위시한 여러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육신과 또한 영이 있어 이 작은 뇌로 우주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동경하고 그리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간이 등장한 게 분명한 걸 과학이 밝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의지 및 뜻, 더 쉽게는 영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세월호 참사는 돈이라는 우상숭배를 하는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즉 자연법칙을 거슬러 엄청난 사고를 당한 게 아닌가 합니다. 실제 죄과를 받아야 할 사람들보다는 억울한 어린 학생들과 무고한 승객들이 목숨을 잃어 당신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하나, 이는 우리 인간의 현재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의 한계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위해 우리는 더욱 더 과학과 종교 간에 상생의 길을 가야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믿음사이에 본질적인 알력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05년 선종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과학은 종교를 잘못과 미신으로부터 정화 시킬 수 있다. 반면에 종교는 과학을 맹목적 숭배와 거짓 절대로부터 정화 시킬 수 있다란 뜻 깊은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덕분에 무지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지금은 지구를 초월하여 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과학이야 말로 인간의 창조물중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상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앙망하는가? 하나님은 영원무궁하고 전지전능하신 존재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죠. 어차피 피조물 우리 인간은 유한하여 길어야 백년도 안 되는 짧은 일생을 살다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고요. 그러나 인간은 우리의 DNA를 계속 유지, 발전해 나가라는 축복을 하나님을 통하여 받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은 계속 우리의 삶을 관장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한 분이기에,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기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예배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예배의 삶을 산다는 것은 전체의 삶을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뜻은 매일 그가 원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늘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진정한 예배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영국의 목사인 피터 루이스는 신약성경에서 예배란 교회모임에서가 아니라 그 모임 이후의 우리가 해야 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고 설파 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가 전례를 행하거나 교제를 나누거나 좋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세상 생활 속에서 우리의 육신적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있다고 묘사합니다. 요한복음 4장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씀인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라는 엄명이 있습니다.

진리와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이성과 영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귄다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스스로 각자가 자신의 이성과 영성을 다해서 자기에게 충실한 삶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배하는 것을 말하며,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사는 생활종교를 이루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마디 말로서 성직자와 예배당 없는 종교, 교리와 신화에서 벗어난 생활공동체 종교를 말씀하신 것이고,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로 사귀는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사무실 책상을 제단으로 만들고, 우리가 일하는 일터를 성별된 땅으로 만들고, 우리 자신을(단지 교회뿐만 아니라)세상에 받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을 때, 우리는 가장 진실하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게됩니다.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란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1924년 파리에서 열렸던 올림픽 경기를 정점으로 영국의 두 육상선수의 실제 이야기를 1981년에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이고, 테마음악도 유명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멜로디이며 듣기 좋습니다. 영화에서 올림픽 육상주자인 에릭 리들이 자신의 누이에게 멋진 말을 합니다. “제니,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느껴.”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모든 일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이며 기도며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일, 하찮은 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함께 할 때, 그것은 성직자의 일이나, 성경을 보고 묵상하는 일 못지않게 하나님께 귀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의 모든 일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교회에 오는 것을 절대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오는 것은 준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란 의미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마태복음 2237절 말씀의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란 가장 큰 계명을 위해서도 우리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즉 전체의 삶을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전 인류의 구원을 주장한 윌리엄 바클리는 참된 예배란 우리 각자가 그 영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친밀함을 가질 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특정 장소에 가는 것이나, 어떤 의식이나 예전을 치르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어떤 헌물을 드리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안에 있는 불멸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인 영이 불멸하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만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그 연약함과 결함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으나 영은 우리의 가장 숭고한 꿈과 생각과 이상과 소원의 근원으로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고자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 인간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 무에서 시작,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현재 과학적으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창조의 비밀을 인간이 조금씩 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우리 삶의 주관자이신 그를 예배할 수 밖에 없으며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 삶 전체가 되어야 하므로 일요일 드리는 예배는 매일의 삶 전체의 예배를 위한 준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모두 매순간 하나님께 감사하고, 독생자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을 위해 예수 따르미로 거듭나는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새길은 매일 매일을 감사예배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 하셨음으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의 비밀과 왜 당신이 우리를 여기, 지금, 이곳에 있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어,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진정한 예배를 매일 드리는 예수 따르미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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