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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우리 하나님: 나와 그것 사이에

(마태복음 6:7-13)

 

 

2015125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

(새길교회 신학위원, 성공회대 조직신학 교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6:7-13 -

 

 

어제 토요일 안양천변을 걷는데 한강의 고기떼들이 안양천으로 올라 와서 여기저기서 수면 위로 점프하여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어느새 봄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봄이 온다고 하니 마음이 기쁩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도 약동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모두의 삶 속에 따듯한 봄날 같은 행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정한 본문 말씀은 정의에 관한 공부를 하는 중에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성서를 보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 정의론, 말하자면 합리적인 세속적 구원론인 정의론을 공부하면서 거기로부터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어 오늘의 본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많은 시간을 써가며 정의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하여 왔습니다. 제가 정의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결국 도달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한 사회의 구성원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요 정의이론가인 하버드대 교수였던 롤스(John Rawls)라는 분은 정의를 공정(fairness)라고 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소 애매한 개념인 공정이라는 말은 자유와 평등을 아우르는 개념인데 사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모순되는 가치입니다.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시장자본주의를 연상하게 되고, 평등은 사회주의적 평등을 연상하게 되는데 롤스는 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정의란 바로 공정이라고 하면서 이들 모순된 것들을 하나로 통합해 냈습니다. 사회의 기본원리는 공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롤스의 공정이라는 말은 일단 우리에게 생소하며 구체적이지 않고 잘 잡히지 않는 복잡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작동의 기본 원리인 정의에 대한 이론이 그렇게 복잡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하지만 구체적이고 분명해서 실천해 낼 수 있는 것, 잡힐 수 있는 개념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볼 때에 소통과 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일방적인 소통이 오늘날 박근혜식, 아니 박정희식 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얘기만 있지 다른 이야기는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일방적인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얘기도 들려지는 소통의 세상, 소통의 사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서로 소통하면 관계가 편해지며, 관계가 좋아질 때 우리는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 있는 자들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주장과 이야기가 관철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소통과 관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의 기본 원리는 무엇일 수 있는가를 계속 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살리는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 구체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개념, 확실한 진리일까,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관계(relation)”라는 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 몇 주 사이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텍스트로 해서 몇 편의 설교가 나왔습니다. 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나온 첫 질문에 관심을 갖습니다(누가복음 10:25 이하).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가 다시 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율법교사가 바르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대답은 지식입니다. 이해의 요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의 국면 전환(twist)이 있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네 대답이 옳다. (그렇다면) 그대로 행하여라.” 행함이 지식적 답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주 여기에 또다시 새롭고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인데, 그렇다면 누가 이웃입니까? 그 대답을 위해 예수는 강도만난 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강도만난 자가 거의 죽게 되어 길에 누워있는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천한 대접을 받던 하층민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치료하고 돌보아 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보호해 주었습니다. 예수의 또 다른 강력한 펀치, 매우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누가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여기에서 원래의 질문이 역전됩니다. 나에게 누가 이웃이냐 라는 명사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하는 동사형의 질문입니다. 남이 나의 이웃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다른 이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다른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나의 능동적인 관계 맺기가 우리를 살린다는 말씀입니다. 능동적인 관계 맺음, 옳은 관계 맺음이 우리의 초미의 관심이며,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하는 질문에 우리는 나만의 고립된 개인으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 골방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관계맺음으로 내가 커지며, 그것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고립된 나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또 무관심한 대중들 속에서 자아가 실종된 그들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정의가 이루어진 우리들 안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관계적 정의의 중요성, 그리고 이것의 사회의 구성원리로서의 근본성에 대해서는 정치철학자인 독일 교수 Rainer Forst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하, 여기에 해결의 발단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롤스 등의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공정이라고 하는 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관계적 정의(relational justice)라는 개념이 보다 이야기적이고 보다 민중적이고, 보다 이해하기가 쉽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저는 마가복음을 읽고 분석하면서, 문득 마가복음에는 없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의 우리라는 말에 필이 꽂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가에 대해서 관심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라는 말에 관계적 정의라는 개념이 나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라는 말을 쓰셨는가? 왜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냥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왜 우리라는 말을 넣었는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여기에서 나(I)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썼을까? 왜 그들의 죄를 말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말했는가? 나와 그들 사이에서 왜 우리라는 말을 예수께서 쓰셨는가? 그런데 우리의 죄라는 말에서 죄가 원래는 빚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hopheilemata라고 하는 헬라어는 죄가 아니라 빚입니다.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하는 죄를 의미하는 단어를 쓰지 않고 호페일레마타라는 빚을 의미하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뜻은 우리의 빚을 탕감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kai aphes hemin ta hopheilemata hemon(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하는 것, 빚을 청산한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은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에서 절감할 수 있습니다. 빚 폭탄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연말정산에서 세금폭탄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한 것도, 그리고 국가와 공공기관의 빚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구조화된 문제 앞에서 무기력한 우리 전체의 모습에서 이 기도문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빚이 많아지면 의 신세가 됩니다. 채권이 많을수록 갑이 됩니다. 내 은행통장에 수억 원씩이나 저금되어 있으면, 저는 그런 경우가 한 번도 없었지만, 은행에서 대우가 달라집니다. 돈을 꾸러 다니는 사람은 을이 됩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을이 되어서 눌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나빠집니다. 갑질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온갖 불의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갖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종교개혁의 기치는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만 잘되면 된다는 삼박자 구원관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종세 가톨릭교회는 그것(It)의 종교였습니다. 그것은 교회나 성사라고 하는 제도가 하나님을 대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복수형입니다. 왜 하나님과 복수형인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인데, 그 실마리를 예수의 선포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아픈 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심으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함께 먹이심으로 (오병이어 이야기가 대표적)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인간답게 사는 상태, 즉 많은 사람들이 바른 관계 속에서, 즉 관계의 정의 속에서 잘 살아나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7:20-21의 말씀입니다. “너 안에도 아니고 그것 안에도 아닌, “너희들 안에입니다. 이 말씀이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체로 인용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아라여기에 있다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예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깊은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 사이의 관계의 질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느껴질 수 있는 것이고, 살아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요소는 관계의 정의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에, 사이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관계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평화가 있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관계는 복수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 즉 너희들의 관계 속에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다시 주기도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에게 양식이 주어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빚을 탕감할 뿐 아니라, 일용할 양식, 일용할 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빵이 우리의 빵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our daily bread)이라는 말 속에서 관계가 떠오릅니다. 빵을 꾸미는 말이 우리가 아니라, 그 반대로, 빵이 우리를 꾸밉니다. 빵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종속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빵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수단일 뿐입니다. 빵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우리들이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잘 사는 부자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있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식탁의 분위기가 아주 안 좋습니다. 너는 천박하니까 계급이니까, 저 구석에 가서 먹어, 너는 지체 있고 가문 높은 사람이니까, 여기 높은 자리에 앉아서 먹어, 하는 식의 분위기에서 음식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게 맛있겠습니까? 화목하고 정당한 관계가 없는 식탁은 삭막하기만 합니다. 먹는 둥 마는 둥 할 것입니다. 이런 식탁은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하더라도 평화스럽고 화목한 식탁은 기쁨이 있는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잔치의 비유에는 상하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장애인이 차별 없이 편안하게 앉는 식탁입니다. 그러한 식탁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음식이 보잘것없더라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즐겁습니다. 이런 식탁의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보다 어떤 분위기에서 먹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음식(It)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음식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음식과 물질을 정의롭게 나누는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물질을 매개로 하여 일어나는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질이나 음식의 많고 적음이나 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나 음식을 매개로 한 인간들의 관계가 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물질이라도 나누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병이어라고 하는 물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들의 정의롭고 올바른 관계 안에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올바른 관계, 정의로운 관계는 종속적인 관계일 수 없습니다. 갑을의 종속과 지배의 관계가 아닙니다. 대등한 관계, 평등한 관계, 상호 인정하는 관계,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정의로운 관계입니다. 마가복음 12:33에서 예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번제를 드리는 것, 즉 예배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고 나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5:34 ). 보통 병을 고치는 능력을 베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종속적인 관계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진 목사가 있으면 그 주위에 거룩한 장막이 쳐져서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신도들이 그 목사를 하나님처럼 떠받듭니다. 그 목사는 그러한 군림을 즐깁니다. 목사와 그 교회가 부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관계는 결국 불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말씀은 상대방에게 대등한 주체성을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준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해낸 사건이니 당신이 진정한 주체라는 말씀입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 주종의 관계가 없소, 당신은 이제 떳떳한 주체요.” 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정의로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관계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6 이하에 바디매오라고 하는 눈먼 거지가 나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에게 간청하니 예수가 소경을 고쳐줍니다. 그리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히 병자들을 고쳐주고 나서는 사회로 복귀시킵니다. 마가 5:18 이하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나서 예수에게 함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예수는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을 알려라고 하면서 그동안 끊어졌던 가족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공동체로의 복귀를 권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예수의 관심은 모든 사람들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는 관계의 정의에 가장 깊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 개의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I)를 통하는 길, 그리고 그것(It)의 길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라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라는 현실 속에 친밀한 관계, 대등하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관계가 깃들여 있습니다. 나만을 강조하면 관계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들 속에서도 관계는 없어집니다.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고독한 군중들은 경제성장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관계의 정의는 무시되고 물질적인 성공만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인간들은 그들입니다. 한 사회를 나와 그들이 지배하게 되면 정의의 관계는 사라지고, 개인주의나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동학의 최제우 선생의 말씀처럼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제 3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I)그것(It)” 혹은 그들”(They)이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라는 상징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인격적으로 인정하며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누고,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는 관계가 생성합니다. 음식과 물질을 나눔으로써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는 그러한 관계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 우리의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깃들어 있다는 깨달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맘몬이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의로운 공동체적 가치는 사라지고, 각자는 고립되어 서로 무관심한 그들의 바다 속에서 외롭게 사라가고 있습니다. 무관심의 바다 속에서 지배와 종속의 불의한 관계가 사회를 작동하는 원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된 상황 속에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들에게 서로 간의 올바른 관계, 즉 관계적 정의가 귀중한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관계적 정의가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사회와 국가에서, 그리고 우리 가정에서도 생성되어 살아 움직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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