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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양희송 대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

(갈라디아서 2:1-5)

 

 

2015118일 주일예배

양희송 대표(청어람아카데미)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어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2:1-5 -

 

 

1.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책이다. 자신이 믿는바 복음의 진리가 무엇과 충돌하고 있는지를 가장 격렬하게 드러내고 있고, 에둘러가지 않고 핵심으로 바로 나아간다.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긴박한 상황은 이렇다. 첫째, 이 문제는 자신이 달음질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기 위해 꼭 점검해야 할 일이다. 둘째, 그런데 이 문제는 교회 내의 유력한 자들과 긴장이 발생하거나 주요한 관행을 거스르는 문제가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셋째, 이것은 우리의 자유가 걸린 문제인데, 이는 곧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다.

 

2.

바울은 할례'를 문제 삼았다. 잘 알다시피, ‘할례'는 유대교의 가장 가시적인 징표이다. 그가 유대인인가 아닌가는 할례로 판별된다. 개종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입증했고, 공동체는 그를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핵심적인 통과의례이자, 식별표지이다. 바울은 이를 문제 삼았다. 그것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사용될 경우, 이는 복음정신을 거스르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 누가 이스라엘의 안이냐, 밖이냐를 구별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지가 오히려 본질을, 복음정신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 내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 먼저 할례를 받아 유대인의 반열에 들어온 뒤에 예수파에 속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반면,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방인이 할례를 받은 다음에 예수파에 속하도록 하는 것은 불필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바울에게 할례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는 디도는 할례 받지 않게 했지만, 디모데는 할례를 받도록 했다. 바울은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사역이 이방인들 할례 받도록 하는 일인가를 되묻는 것이다. 할례를 받고 받지 않고의 문제에 하나님 나라의 자유가 걸려있는 것이 맞느냐고 묻는 것이다.

 

3.

중세시대라면, 누가 예수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의 말단부에 가입되어 있는가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는 신앙이란 것이 교황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칙이 더 중요했다. 성경의 권위로 교회가 판단되어야지, 교회의 권위로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신자의 양심이 루터에게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4.

오늘 우리에게도 유사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한국교회 내에 가나안 성도' 현상이란 것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에 안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늘어나고 있다. 한목협 조사에 따르면 100만 명은 될 것으로 추산한다. 그리고 이들이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교회 주변부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아니라, 교회의 중심부에서부터 벌어지는 이탈행위란 점도 드러나고 있다. 가나안 성도 300명을 조사해보았더니, 평균 교회 출석 연수가 14년에 달했고, 교회를 옮겨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45%를 차지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를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남은 자들은 가나안 성도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본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떠나간 사람은 프리즌 브레이크'라고 생각한다. 탈옥에 성공한 사람이 감옥으로 그냥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 인식의 격차가 그만큼 벌어져 있다. 가나안 성도를 교회 쇼핑족'이나 영성 소비자'따지기 좋아하는 까다로운 사람' 등으로 보는 관점은 대부분 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방어적으로 설명하는 논리들이다. 떠나간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고민 속에서 교회를 떠나갔는가?

 

5.

내가 인터뷰한 가나안 성도의 이야기는 이랬다. 자신이 청소년기부터 자라서 청년부 임원이 되어있던 대형교회에서, 어느 날 분쟁이 벌어졌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간의 갈등이 수년에 걸쳐 격화되다가 마침내 양측 간에 폭력사태와 용역동원까지 이어졌다. 청년들은 서로 싸우고, 거짓말하는 양쪽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신학생이었던 그 청년은 결국 신학교를 포기하고 군대를 가버렸다. 군을 마치고 나와서 새롭게 출석한 교회는 나름 개혁적이고, 평판이 좋은 교회였다. 담임목사는 종종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설교를 했다. 거기서 3년을 다닌 이 청년은 어느 날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 교회가 더 커지거나, 이런 교회가 좀 더 많아지면 한국교회는 좋아지는 건가?' 대체로 무난했던 그 교회는, 그러나 그 청년이 보기에 너무나 나이브한 현실인식을 하고 있다고 보였다. 과연 내가 경험한 교회분규는 재수가 없어서 당한 일이었던가, 다른 교회를 다녔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해프닝이었나? ‘가나안 성도들' 중에는 어디든 정착할 교회를 찾아 뿌리 내리고 싶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부는 다른 교회'가 아니라, ‘다른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반문한다.

 

6.

중요한 것은 교회 안이냐, 교회 밖이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은 매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원래 보통명사이다. 헬라문화권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소집된 모임'을 일컫는 단어였다. 군대나 시민들의 민회를 부르는 말이었다. 바울은 대부분 갈라디아의 에클레시아'라든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는 식으로 명확히 규정하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했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처럼 수식어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예외적이라 볼 수 있다. 보통명사로서 에클레시아는 상설조직이라기 보다는, 사명의 성취 여부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를 임의로 하는 조직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영속성'성장'을 에클레시아에서 요구한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언제나 사명/미션이 더 중요하다. 그 사명에 맞추어서 유효기간이 정해지고, 적정 규모가 정해져야 마땅하다. 그 반대가 아니다.

 

7.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책을 쓰면서 역사상 사례로 종교개혁시기의 에라스무스, 청교도 혁명기의 존 밀턴, 한국에서는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을 꼽았다. 더 찾아보면, 아마 이 새길교회의 노력도 잘 평가되고 언급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본회퍼가 이야기한 성도들의 공동체'의 의미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내가 일하는 청어람아카데미는 세상 속의 성도들을 위한 지식생태계'를 꿈꾼다. 온통 우리는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는 성도를 위해 존재하지, 성도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할례가 그러했듯, 오늘 한국교회는 제도로서 교회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수가 100만에 이르는 시대이다. 우리는 다른 에클레시아가 되어야 한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에클레시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거짓 형제들에게 절대 빼앗기지 말자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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