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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014.12.31 18:03

[2014.12.28] 가장 좋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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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가장 좋은 길

(고린도전서 12:31-13:7)

 

20141228<송년주일> 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 고린도전서 12:31b-13:7 -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자연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때죠. 한편으로는, 유난히 가슴 아픈 일이 많았던 사건/사고 공화국에서 무사히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높은 곳에서 농성중인 C&M, 쌍용 해고 노동자들, 낮은 곳에서 비정규직 폐지를 요구하며 소복을 입고 언 땅 위에서 오체투지를 했던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 온갖 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들을 생각하면, 무사히 지내고 있는 게 미안하고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감사와 미안함이 뒤섞인 가운데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의 삶은 계속 됩니다. 오늘은 그 인생 순례길에서 지나게 되는 또 한 번의 세밑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집착과 계속 붙들어야 할 사랑에 대해 함께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세상을 버린 이들의 집착

오늘 함께 읽은 성서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집착과 붙들어야 할 사랑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경계하라고 지적한 집착의 대상은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로 물질이나 권력과 같은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집착하지요. 하지만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고 있던 종말론적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을 버린 그들에게 세상의 물질과 권력은 하찮고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집착은 여러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하나의 집착을 물리치면 다른 가면을 쓴 집착이 나타납니다.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세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집착이 찾아옵니다.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집착은 더 은밀하고 그래서 더 치명적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집착의 대상은 놀랍게도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 예언, 비밀과 지식, 믿음, 베풂, 희생처럼, (고전 13:1-3) 지적, 영적, 도덕적으로 선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과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악에 대한 집착만이 아니라 선에 대한 집착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집착

우선 바울은 사랑 없는 지식에 집착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일깨워줍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고전 13:1) 여기에서 천사의 말을 신비한 방언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문맥을 살펴 볼 때 일종의 과장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것은 유창하고 화려한 말로 지식을 자랑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지식에 집착하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이 절대화될 때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거기에서 정치적, 종교적 타자를 해치는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적 신념의 절대화는 자신이 믿는 바를 하느님의 뜻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더 파괴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폭력은 경전을 절대화하는 성서문자주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맹신은 성서를 사랑의 책이 아니라 미움의 채찍으로 변질시킵니다. 성서적 지식에 대한 집착의 이러한 위험성과 파괴성을 상기시켜주는 중세의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1.JPG

 Joachim Patinir, 성 안토니와 악마들


성 안토니가 성서를 읽고 있을 때 악마들이 그 성서를 붙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포영화 속의 악마들은 성서를 보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데, 이 그림에서 악마들은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성서를 붙잡고 성 안토니의 수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악마는 성서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광야 시험 설화를 보면, 악마는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를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마태 4:6) 이와 같은 성 안토니와 예수의 경험은 성서적, 종교적 지식이 악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 속의 마녀사냥, 반유대주의, 노예제, 여성차별, 동성애 혐오, 종교적 배타주의 등의 폭력은 모두 성서적, 종교적 지식에 대한 집착과 절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촉발되거나 간접적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 가족을 괴롭게 했던 한국교회의 하느님의 뜻스캔들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오늘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으로 남을 공격하고 해치는 것이겠지요. 세상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부족해서일 겁니다. 바울은 사랑 없는 지식은 울리는 징, 요란한 꽹과리라고 말하지만, 만약 그가 오늘의 고통스런 세계를 살았다면 아마도 그는 사랑 없는 지식은 찌르는 칼과 쏘는 총이라고 말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적 신비에 대한 집착

다음으로 바울은 영적 신비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으라고 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전 13:2) 물론, 영적, 신비적 체험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영적 신비에 대한 집착을 성찰하게 해 주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세계관과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지요.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몇 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림2.JPG


절대악 사우론과의 영웅적 투쟁에서 승리하고 고향 호비턴으로 돌아온 프로도, , 메리, 피핀이 주막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을의 다른 호빗들은 언제나처럼 떠들썩하고 흥겹게 술을 마시며 잔치를 즐기지만, 프로도 일행은 어색한 미소를 주고 받으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입니다. 그들이 겪은 신비한 일을 다른 호빗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을 알기에 자신들의 영웅담을 나눌 생각도 못합니다. 그들의 영웅적 투쟁에서 주인공은 프로도고 나머지는 충성스런 조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진정한 영적 영웅은 프로도가 아니라 샘임을 보여 줍니다


그림3.JPG

프로도는 일상을 견디지 못합니다. 전에는 낯익고 중요했던 일상이 신비를 경험한 후에는 너무 낯설고 사소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상의 평범함과 소소함을 견디지 못한 프로도는 신들과 요정의 세계로 다시 떠나갑니다.


그림4.JPG


반면 프로도와 가장 가까웠던 샘은 마을에 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일상을 살아갑니다. 샘은 일상 속에서 신비를 기억하고 재체험하며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제게는 신비체험 후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샘이 프로도보다 더 위대한 영적 영웅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후 천사들이 시중드는 신비의 상태에 머물지 않으시고 고통의 땅 갈릴리로 돌아와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신비를 목격한 제자들이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초막을 짓고 머물자고 할 때도 산 아래 고통의 세상으로 앞장서 내려가셨지요. 예수는 천상적 신비를 체험하시고도 지상적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가신 분입니다.

영적 체험이 깊을수록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아니, 그 체험이 정말 진정한 것이라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울은 참된 영성은 세상을 위한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쳐 줍니다. 성령이 맺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갈라디아서 5:22-23)는 모두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필요한 도덕적 열매들입니다.



도덕적 선에 대한 집착

그런데, 바울은 잠든 우리의 어깨를 죽비로 내리쳐 깨어나게 하는 준엄한 선사(禪師) 같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는 도덕적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전 13:3) 도덕적 선에 대한 집착마저 끊으라는 추상같은 가르침입니다. 너무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 삶의 현실을 돌아보면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르침입니다. 도덕적 선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기의自己義의 집착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젊어서 학생운동을 할 때 저는 지독한 자기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독재의 폭압 앞에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겁하고 이기적이라고 속으로 깔보았습니다. 그뿐인가요. 함께 운동을 하더라도 노선이 다른 이들을 미워했습니다. 악에 맞서 싸우면서 저는 악에 물들었던 거죠.


종교에도 자기의의 집착이 있습니다. 특히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의 집착에 더 쉽게 빠집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는 단지 이념적, 지상적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자기 몸을 넘겨 줄 만큼 모든 것을 바쳐 선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자기의에 더 집착합니다.

 

선을 추구하는 이들의 자기의가 초래하는 어둠과 악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울은 겸손하면서도 치열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7:21) 우리의 선 곁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알아차릴 때 악이 우리를 압도할 수 없게, 지배할 수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가장 좋은 길


바울이 말한 지적, 영적, 도덕적 선에 대한 집착은 근본적으로 에 대한 집착, 즉 자기사랑의 집착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지식, 영성, 도덕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지식, ‘나의영성, ‘나의도덕으로 소유하려는 집착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반면, 바울이 열거한 사랑의 열다섯 가지 속성이 나타내는 공통점은 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4-7)

 

예를 들어보면,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남을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과 비교되는 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뽐내거나 교만하거나, 자기의 이익을 구하거나, 성내거나, 원한을 품을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속성은 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랑을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적이거나 세상적이지 않은 다양한 집착들 하나하나와 힘겹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에 대한 집착 하나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그것은 힘들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것입니다. ‘를 비우는 것, 내려놓는 것입니다. ‘라는 토양이 없으면 집착의 씨앗은 발아할 수 없습니다. ‘만 내려놓으면 모든 집착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무집착의 행동


그런데, 무집착은 무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으면 우리는 더 자유롭게 사랑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공과 승리에 대한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오직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행동할 뿐,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번 12월은 우리 공동체에게는 특별한 한 달이었습니다. 새길의 두 자매형제님이--이름을 부르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경란 자매님과 김이수 형제님이 한국 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문경란 자매님이 열정을 다해 추진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의 공격과 서울시의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인해 선포가 무산되었고, 헌법재판관 김이수 형제님의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반대 의견은 81의 소수의견으로 남았습니다.

 

두 분의 행동은 패배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두 분이 목표했던 것은 승리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단지 승리가 목표였다면 힘 없는 이들이 아니라 힘 있는 이들을 편들고, 소수가 아닌 다수 의견에 손을 들었겠지요. 저는 두 분의 선택을 이끈 것은 승리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집착 없는 사랑이었다고 믿습니다. 이 땅의 고통 받는 약자들의 인권과 그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그것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입니다.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리고 우리의 스승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가장 좋은 길승리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시도는 계속 무산될 지도 모르고, 우리의 의견은 계속 소수의견으로 남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오늘의 최악the worst이 역사의 최후the last는 아니기에,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승리할거야라는 믿음소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지금 여기에서 작은 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우리가 걷는 이 길은 가장 좋은 길입니다. 져도 지는 길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역설과 신비를 이미 한완상 형제님께서 감동적으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철저한 자기 비움자기 지움,’ 우아한 패배’”의 길, 그것이 예수 따르미의 길이라고. 그것이 새 길이라고,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한 해 동안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지우는 사랑의 길을 새길의 자매형제님들과 함께 걸을 수 있어 아프고 행복했습니다. 그 길, 가장 좋은 사랑의 새 길을 새해에도 함께 계속 걸어가기를 바라고 다짐합니다. 그림5.JPG




사랑 1
- 김남주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 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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