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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태초에 품음이 있었다

(창세기 1:1-2)

 

20141123일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낙엽은 정처없이 흩날려 사라지고 가을은 그 깊이를 더하여 초겨울의 기운을 끌어와 아침저녁 추위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곧 달랑 한 장으로 남게 될 2014년도 달력을 보면서 2014년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다사다난했다란 상투적 소감으로 결코 말 해 질 수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참 속쓰리게 아팠던 시간들이었다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땅에서의 삶의 만족도가 OECD 국가 중 제일 꼴찌라고 할 정도로 우리사회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많은 곳이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4.16 참사는 그 무엇으로도 상쇄될 수 없는 고통이요 슬픔이었으며, 교육, 노동, 가정, 정치, 사회 현장 곳곳에서 가슴 아프고 기막힌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아픔이 많은 이 현실 속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주는 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정말 무엇으로 이 고통을 넘어 살아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그 힘은 우리들 서로 간에 품고 감싸주고 위로해 주는 사랑의 힘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좌절과 절망, 고통과 분노, 송파의 세모녀 같이 세상의 생명줄을 다 놓아버리고 싶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품이 있다면 극한의 상황을 이겨낼 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의 힘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그 사랑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절망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품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때가 많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이며 어디에서 우리를 돌아보고 계시는가? 답답한 마음으로 물음을 계속 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매주일 함께 새길신앙고백문을 낭독합니다. 그 처음 시작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하지요.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품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창조와 역사의 주로, 그리고 우리를 품어 인도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고백문은 2010년 개정 작업을 시작하여 201112일 주일부터 함께 고백하여 온 것입니다. 이전의 문장, 이것도 앞부분만 보면,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언제나 새롭게 변혁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칩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품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이 수정 때, 새롭게 들어갔습니다. 2010년 그 즈음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와 역사의 주 만이 아니라 우리를 품어 인도하시는 분으로 새롭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신학적 성찰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수정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상황에 따라 새로운 메타포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만 유일한 하나님의 상징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즈음 여성신학이 발전하면서 모성적 하나님 표상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새롭게 상징하는 것에 대해 남성만 아니라 여성들 중에서도 거부감을 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은데, 실상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요청은 여성신학 훨씬 이전부터 추구되어 온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성서 안에서 하박국 예언자가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전통적 하나님 모습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율법준수를 하지 않으면 징벌하시는하나님을 거부하고, ‘아빠 아버지로 비-가부장적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대 유대인에게 새로이 제시해 하나님 인식을 전환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과 실존에의 위협 앞에서,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학살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물음을 가졌고, 그리하여 근대적 하나님 새로 찾기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하겠습니다. 이에 더하여 제국주의 국가에 희생된 제3세계의 고난 앞에서, 3세계의 독재자들에게 탄압받는 민중들의 울부짖는 소리에서 하나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라든지, 로빈슨 감독의 하나님 앞에 솔직히'와 같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독재정치 억압아래 하나님을 혀 짤린 민중의 아버지'로 노래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인에게 멸족의 위기를 당한 흑인과 원주민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은 누구며, 어디에 계신가란 질문은 계속 됐고,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당한 여성들의 비인간화된 현실에서도, 그리고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는 자연을 보며 생태계위기에 위협을 느끼면서 더욱 절실하게 이런 현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능하시고 저 하늘나라 위에서 우리의 잘못을 심판하시며 징벌하시는 가부장적 제왕적 권력의 하나님은 그러한 절망의 현실 앞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생태신학적 관점과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영역이 더 확장 발전되었습니다. 여성생태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핵의 위협이 긴박한 이 세상에서 지구와 인류를 살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라고 하면서 핵의 위협아래 있는 이 시대 우리의 하나님은 어머니', ‘연인', ‘친구'로 불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전통적, 가부장적 심판자 하나님은 이 생태위기의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품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생태신학적, 여성신학적 관점을 가진 표현이며, 새길은 이 관점을 신앙고백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2014년 이 아픔과 고통의 시간에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를 품어 인도하시는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새길 신앙고백문이 어쩌면 2014년을 위해 준비된 신앙고백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저에겐 듭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에게 품고 사랑하는 일이 절실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 품는 사랑에 대한 절실한 요청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품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성적 하나님의 표상으로만 생각하던 저는 창세기 1:1-2절을 새롭게 보면서 품음'이 더 근원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만물 창조의 원리이고 질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위로해 주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태초의 창조 질서로서의 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태초에 품음이 제일 먼저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품음은 만물의 생명을 출현시켰고, 동시에 만물을 품음을 행하는 존재로 창조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 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개역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물위에 운행, 움직임을 하였다'는 본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드러내는 기록이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선포한 기록입니다. 물론 창세기 기록들은 기원론적 특징을 가지기도 하지만, 기록의 의미를 통해 세상과 인간과 만물의 관계구조를 드러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1: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개역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moved, 혹은 hovering, - ruah elohim merachpet)”는 표현은 매우 독특합니다.

주석에 의하면 이 모습은 하나님의 영이 창조의 기적을 낳으려는 새처럼 만물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마치 어미 새가 둥우리에서 포근히 알을 품고 있듯이 물위를 휘돌아 감고 있다'라고 풀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2:11의 기록을 보면,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 라고 하는데, 이는 창세기 1:2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은 31장에서 이어지는데, 그 내용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죽음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라며 부를 노래를 모세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그 가운데 32:10-12절이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보살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님의 품음’, ‘보살핌태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품음에서 생명을 얻었고, 품음창조의 원리이며, ‘인간존재의 본질이고, ‘인간 삶의 원리가 된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 우리는 품음의 질서 안에 있고, 모든 피조물은 동시에 상호 품어주는 존재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창조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끝까지 품어 인도하시는 분으로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11:3에는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고 자신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들이 반역하였음에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식을 품어 양육하는 어머니 모습에 일치합니다. 품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성서에서 모성적 이미지로 곳곳에서 기록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모성적 이미지들을 밝혀내는 일들은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으로 표현되는데, 예를 들면 이사야 44:24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너를 모태에서 만드신 주님이라 하고, 43:1에서도 너를 지으신 주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또 이외에도 상당한 구절들이 하나님을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품고 돌보는 하나님이라는 성서 표현은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모든 관계가 상호-품음돌봄에 근거하여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의 원리가 품음에 있고 세상과 인류 역사를 유지하는 힘은, ‘품음의 관계형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는 것은 품음이 있은 후, 다음 절인 3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원초적으로 우주의 모든 생명은 품음에서 비롯되었고, 모든 생명의 유지는 품음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빛의 창조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고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는 바로 빛의 창조요 빛과 어두움의 분리로 혼돈이 질서를 얻게 되었으며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로고스적 질서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Logos 이전에 품음의 원리’, ‘품음의 질서를 우리가 간과해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품으시는 영이었고 창조의 영이었습니다. 품으시는 영은 사랑의 영이며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다르게 죄인, 창녀, 세리,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 여성들, 아이들을 품으며 보여주신 지혜의 하나님, 소피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거나 내안에 성령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품음의 영성이 있다는 말이고 만약 그런 영성이 없다면 진정한 성령의 내재는 아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품음의 원리 혹은 특성들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간절함', ‘온 정성을 다함'이라고 봅니다. 새들이 생명을 출현시키기 위해 알을 품는 것은 온 정신을 거기 집중시키고 오직 생명을 부화시키기 위한 일에만 자신을 다 바칩니다. 주위의 어떤 것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오직 그 알을 품습니다. 그것은 진정을 다한 정성을 기울임이라 하겠습니다. 품음은 그렇게 온 정성을 기울임이고 그 정성은 우주를 움직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 말은 유명하지요.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 준다네.” 간절함으로 가득한 것에 우주의 모든 것이 거기에 다 모여듭니다. 우리말에 지성이면 감천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정성에 천지신명이 감응한다고 합니다. 품는다는 것은 이렇게 우주적 절실함을 갖는 것, 온 정성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로는 모든 위험을 막는 품음입니다. 저는 여기서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를 생각했습니다. ‘엄마 까투리' 이야기인데요, 엄마 까투리가 아홉명의 새끼 까투리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불이 났습니다. 엄마 까투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둥대다가 뜨거운 불길에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다 놀라 다시 내려와 새끼들을 찾으며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하나 정신이 없었지요.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결국 엄마 까투리는 아가들을 모두 자기 품안에 꼭 품어 안았습니다. 불길이 다 지나간 후 엄마 까투리는 까맣게 탔지만 아가들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위험을 막아주는 품음은 자기희생,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품음입니다. 그러므로 품음은 가벼운 감싸 안음이 아니라 엄마 까투리를 위협한 불길 같은 둘러싼 악의 횡포나 불의한 세력의 힘을 막아주는, 목숨을 걸고 그 악과 사투하는 희생적 행위를 암시합니다. 제 어렸을 적 기억입니다. 사실은 저의 희미한 기억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합해진 것입니다. 저희 가족이 만주에서 해방 이듬해 남하해서 내려오는 길에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피폐한 당시의 상황에서 기차엔 창문도 제대로 없었답니다. 저의 어머니는 13, 11, 8, 5살짜리 딸 넷을 데리고 탄 기차였는데, 갑자기 총알이 기차를 향해 날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졸망한 딸 넷을 의자 밑으로 숨게 하고 딸들을 팔을 벌려 품어 안았습니다. 총알의 위협을 느끼면서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입니다. 희생적으로 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제가 생각하는 품음은, 품에 안기는 자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도와 성령은 간곡히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간구한다고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아픔을 함께하는 영이며, 품는 것은 연약한 것, 고통과 아픔이 있는 것을 감싸 안고 위로하면서 품는 것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려고 청운동에서 생활을 할 때, 그들에게 힘을 주고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여러 단체와 사람들이 매일 그들 맞은편에서 집회를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번 참석했다가 가족 중 한분의 얘기를 듣고 가슴이 정말 아팠습니다. 가족 중 한 분이 말씀 하시기를, 자신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허기짐을 느낄 때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물속에 잠겨 죽게 해 놓고 내 배고픔이 느껴지다니너무 그 순간이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비슷한 경험을 잠깐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아들이 몇, 생사를 오가는 대수술을 받던 날 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정신이 없이 병원 복도를 오갔는데, 온 피로감에 몸을 가눌 수 없게 졸음이 나를 지배하였습니다. 자식이 생사를 오가는데 졸음이 오다니, 난 에미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자책하면서 씨름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먹고, 자고, 배설하고 이런 것조차 미안하고 죄스럽고 고통이 되는 이들의 아픔을 어떻게 다 헤아리겠습니까? 세월호는 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이를 계기로 조금 더 나은 사회로 바꾸기 위해 지금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이 그 의미를 지키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저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이해하고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세상의 중심은 가장 아픈 곳'이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그 가장 아픈 곳을 품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고 가장 아픈 그들을 품는 것이 지금상황에 태초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사회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픈 곳이 너무 많아 품어야 할 일들 또한 수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사회가 돌봄 체제의 사회로 가야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지난 1124일 저녁 뉴스보도에서 부산에서 사망판정을 받은 노인이 영안실 냉동고로 옮겨지기 직전 살아있음이 판명되어 치료중이라는 보도를 들었는데, 다음날 신문을 보니, 가족들이 이 노인을 자기들은 부양의무가 없다'고 신병인도를 거절하여 아직도 병원에 있다고 했습니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노인들이 지금 어려운 세상입니다.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도 간간이 들립니다. 노인 빈곤율이 48.6%OECD 회원국가와 비교하면 12.4%가 높다고 합니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 비정규직 비율,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1위 국가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압축적 근대화, 초고속 경제발전 과정에서 가족형태가 급격히 변했습니다. 여성들의 삶의 형태도 급변하여 그들의 성장과 사회진출, 동시에 가족경제를 위한 여성들의 경제활동 등으로 가족구조가 전통적인 형태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여성들이 희생적으로 떠맡아 온 돌봄 노동이 더 이상 남성은 부양자로 사회적 활동인이고, 여성은 돌보는 자로 가정영역 담당이라는 이분법이 성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돌봄 문제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 가족 해체, 저출산의 심각성, 그리고 돌봄 노동의 상업화 등으로 인한, 돌봄 문제로 인해 사회적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정책은 사회의 가장 기본 인프라이며 사회안전망의 기본인 가족문제 해결에 예산을 우선하고 그 회복에 다양한 정책을 세워야만 하는 것이 현재의 우선적 과제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국가정책은 경제부양이라는 문제에만 집중해 건설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다 보니 토건국가가 되고 정경유착의 만연과 돈으로 다 해결하는 편법적 삶의 행태가 일상화되고 사회전체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대한 돌봄 영역의 회복을 위해 집중적 관심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과제는, 무엇보다 사회자체가 돌봄 공동체로 전환하면서 일과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한 사회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봄의 성격이 혈연, 가족관계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매우 정교한 사랑과 책임과 창의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상호-돌봄을 실행할 수 있는 인간성을 육성해야 하고 그런 교육이 동반되어야 함이 중요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돌보는 일이 사회 제도화 되어야 하면서도 가족적인 참으로 정교한 차원의 해결 방안이 나와야하기 때문에 더 깊고 확고한 정책을 사려 깊게 만들어야 하고 이를 사회 정의의 원리로 천명해야 합니다. 돌봄을 사회적 가치이게 만드는 실질적인 사회적 운영방식의 전환이 매우 필요한 현실입니다.

돌봄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보살피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중심적인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하고, 사랑과 생명의 살아있는 감정관계의 보살핌을 이루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요청됩니다. 이런 가치의 교육을 사실은 교회가 가장 책임 있게 담당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지금 한국교회는 이 책임을 방기하고 엉뚱한데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이 아픔의 시대, 돌봄의 노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에서 다시 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가장 아픈 곳을 돌아보고, 품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부터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이들을 자매형제들이 품어 봅시다. 또 가족 중 아파서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으면 이들을 먼저 품어 봅시다. 여러 가지 문제로 마음이 많이 아프고 상처를 받은 이들도 품읍시다. 세월호로 너무 큰 고통을 안고 있는 저 가족들을 따뜻하게 품어줍시다. 성적 소수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멸시, 적대시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송파의 세모녀처럼 저들도 버려두지 말고 생명을 살아내도록 품어줍시다. 아주 크게는 핵으로 인해 멸망의 위험으로 가득 찬 한반도를, 이 지구를 품어야 합니다.

엄마 까투리처럼 목숨 걸고 품어야 할 일들이 아홉 마리 새끼보다 훨씬 더 많은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면 좋겠습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고통의 신음에 귀를 닫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힐링한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이 삶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통 받는 타자를 통해서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웃, 곧 가장 아픈 이들로 귀결되지 않는 사랑과 거룩은 위선이라고 김기석 목사는 말합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고통당하고 있는 누구를 품기 위해 힘쓰고 있을 때, 진정한 경건은 품음과 돌봄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품어 창조하신 소피아 하나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우리를 품으신 예수님, 품으시는 성령의 영을 받아 이 아픔과 고통과 위기의 시대, 돌봄을 절실히 요구하는 이 시대에 품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희망이요 생명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새길 자매형제들, 그리고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이 이 희망과 생명의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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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2015 [2015.04.12] 금요일엔 돌아오렴 (세월호 참사 1주기 유가족의 아픔을 함께하는 "기억과 동행" 예배) file 2015.04.17 *낭독: 안윤경, 안인숙, 박흥식, 장은정
927 2015 [2015.04.05] 부활, 그 평화와 사랑의 동력 file 2015.04.15 한완상
926 2015 [2015.03.29] '달의 신비' : 무거운 짐을 지는 이 1 file 2015.04.03 김용덕
925 2015 [2015.03.08]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 file 2015.03.24 길희성
924 2015 [2015.03.01] 흔쾌한 부활: '3.1. 혁명'과 그리스도교 file 2015.03.03 윤경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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