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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

(성서본문: 고린도후서 5 : 14∼17)

 

1995.01.01

최만자 자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 고린도후서 5 : 14∼17

 

 


1. 새해를 맞는 그리스도인
  오늘은 을해년 첫날입니다. 새길 자매형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기를 바라며 또한 해방 50주년을 맞는 우리 민족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여 민족의 미래를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은 지난해에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잘못에 대한 후회를 뒤로하고, 그것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새날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실은 새해라는 것이 다른 때와 다를 바 없는 어제이고 오늘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시간의 마디를 잘라서 삶의 내용들을 매듭짓고자 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매듭의 한 마디를 넘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지난해에 우리들은 사회적으로 너무나 엄청난 큰 일들을 많이 당하여서, 새해에는 부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좋은 일만 생겼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새로워짐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곧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새로워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광복 50주년에 대한 의미를 새기는 일들과 아울러 통일 민족을 꿈꾸는 일들이 올해의 중요한 과제이겠지만, 우선적인 일은 이 사회와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그 역사를 책임져야 할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자신과 그리스도교의 새로워짐을 위한 자기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의 수가 천주교인을 합하여 1천만이 넘는다는 통계는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근래에는 그리스도인의 증가가 멈추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 후 폭발적 성장을 한 한국교회는 회중적 특성에 있어 모이기를 좋아하여 주일 낮, 저녁,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 등 모임에 열심입니다. 또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였고 재정력도 든든해져서 실제로 한국사회 안에 하나의 힘있는 사회조직으로 부각되었고(세계 최대의 대형교회들이 많음)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외면하였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해 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 힘과 영향력은 오히려 사회와 단절되었고 도리어 왜곡된 형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좀 오래된 보고이긴 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의 출석 동기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가 대부분이고, '내세에의 소망'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개인적 불안감의 해소, 피안 지향의 사고 등은 '나' 중심적, 또는 현실 도피적 신앙 특성을 가졌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가 해체와 도덕성의 위기에 직면해도 구태의연하게 개인의 평화와 내세의 소망 그리고 교회의 성장에만 집착하고 있으며, 세속적 물질. 물량주의 가치를 극복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의 지배를 받아 성공이나 출세의 척도를 물질로 평가하는 물질 만능적 사고에 빠진 것입니다. 따라서 천만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들로 인한 불행을 막는 일에 아무런 영향력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참으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고, 그래야 사회와 민족의 미래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뜻
  바울은 100회 이상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바울 당시의 영지주의적 표현 형태와 상관시키면, 이 표현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비주의적 신앙체험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치사 'in'을 공간적 의미로 보아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영으로 거듭난 것을 뜻하며(요한 3:5), 내적 인간성이 변하여(로마 12:2, 고후 3:18) 그 안에 새로운 영이 가득 부어져 다시 난 것(디도 3:5)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육을 버리고 영적 존재로만 되어야 한다는 영육 이원론으로 오해될 수 있고, 실제로 기독교 역사에서 그렇게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바로 그러한 해석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 안에' 있음을 방언, 예언 등과 같은 은사를 받는 종교적 신비체험으로 한정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그런 의미에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령의 은사보다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선적으로 행하여야 할 윤리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고전 13). 또 바울이 이 '그리스도 안에서'를 사용하였을 그 당시에는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생겨나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위치를 공식화한 말이 없었으므로, 이것은 '교회 안에서'라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런 의미에서의 사용을 좀 더 깊이 분석해 보면, 그 말은 기독교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할 때 그것은 유대교 율법주의와의 대립 개념이 그 말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고백은 엄격, 철저하던 율법주의자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전환한 그의 회심이 그 근원에 깔려 있는 말입니다. 바울 신학 논쟁의 핵심이요 필생의 과제는 한마디로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율법주의가 아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윤리에서 살아가게 됨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철저한 유대교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대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사도행전 22:3),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 베냐민 족속 히브리인이고,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충실한 이스라엘 전통인으로(로마 11:2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요, 선이며, 의라고 생각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철저한 유대전통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갈1:13) 사람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그 유대교에서는 도저히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체험한 유대교 율법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유대교 율법주의는 사람의 생명, 인격, 존엄성보다는 율법이 더 우선하였습니다. 예수 당시는 바리사이파가 율법의 적용 영역을 확대하여 일상적인 생활에까지 규범을 만들어 적용시켰으며 강권을 발동하여 이 법에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법이나 정결법 등의 세부 규정들을 만들어 사람들의 삶을 구속하였고, 더 나아가 비인간화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고, 지키지 못하면 죄인으로 규정하여 자신의 행위의 업적에 의해 구원받게 되는 교리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교리들, 곧 율법을 지키는 일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서민들은 로마의 세금뿐 아니라 유대 종교의 세금과 율법에도 억눌려서 신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며, 사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는 등 율법의 비인간성과 비생명성에 정면 도전하였습니다. 또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성전이 있고 경건한 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며, 또 의인으로 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는 천박한 사람들이 사는 나사렛 출신이며, 더구나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린 자이므로, 도저히 그가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 분노와 저주를 퍼부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인식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예수를 새롭게 만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삶의 차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회심 장면은 성서에서 매우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지만 회심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평소에 율법주의에 대하여 일말의 회의를 가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는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지역에서 노예로 또는 가난으로 신음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저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가졌을 것이고 율법으로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율법의 한계성과 배타성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후 평생을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산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만난 예수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는 예수를 생전에 만나지 못했고 따라다닌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부활한 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18)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의 인간사랑, 생명사랑의 실천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눌리고 세금에 눌리며 가난과 전쟁에 시달리는 보잘것없는 죄인(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희생이, 경직되고 생명을 죽이는 율법과 어떻게 다른가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통하여 인식의 전환을 가질 수 있었고,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어리석게 보이던 것이 지혜가 되며, 패배라고 보았던 것이 구원이 되고, 죄인이 의인이 되는 인식의 대 전환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바울은 비로소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사랑과 은총, 희생을 통한 구원의 도, 곧 인간사랑과 생명사랑이 가장 우선인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 됩니다.

 


3. 바울이 체험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
  율법주의로부터 탈출한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구체적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자기 부정과 긍정의 체험을 하여 거듭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를 유지하여 온 학력, 권력, 명예 등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과 이제는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육체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육의 개념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여 자기 긍정을 표현합니다. 자기 존재를 규정하는 근거와 기준이 송두리째 뒤바뀌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전 존재의 근원은 예수의 사랑-십자가에만 둡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인간사랑, 생명사랑에 존재의 근거를 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자기 부정과 긍정의 체험은 예수를 따르던 당시의 무리들에게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세상에서 부정적인 존재로 취급당하던 자들로서, 바울과는 대조가 되나, 자신을 긍정적인 존재로 자각하는 자기긍정의 체험을 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육체의 병 고침을 받은 자들, 간음한 여인, 죄인, 세리들의 체험은 예수로 인한 자기긍정의 획득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통하여 이들은 부정과 긍정의 체험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존재의 규정을 새롭게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삶의 새로운 윤리, 이전과는 다른 삶의 차원을 가지게 됩니다. 유대 남성들은 하루에 세번씩 '자기가 노예가 아니며, 이방인이 아니며, 여자가 아닌' 사실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바로 이와 짝말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윤리를 보여줍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노예도 자유인도, 이방인도 유대인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하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당시 그리스도인으로 입교하게 될 때 세례 의식문이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차원을 가지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 율법과는 다른 은혜의 질서를 빚진 관리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었고(마태 18), 포도원 일꾼의 동일한 임금 지급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가 제시한 새로운 질서, 이전과 다른 삶의 차원을 발견하고는 새 윤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종말론적 삶을 가지게 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끝이 시작되었고 새 시대가 온다는 사상을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가졌습니다. 마지막날 심판과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때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사는 삶의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이는 묵시 문학적 종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묵시적 사고는 세상의 종말이 예정된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 이 세상의 삶의 무의미함을 주장하고 염세적 사고를 가져,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종말 이해는 언젠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새 시대가 지금 현재 이미 시작되어 그 완성의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종말의 성취로 생각하고, 종말을 미리 앞당겨 이 때를 최대한으로 사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살 때 모든 것을 초월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끝이 날 인생을 현재가 그 마지막의 성취라고 생각하면서 살 때, 우리는 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우리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의하여 우리 존재에 대한 규정이 새로워졌는가를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기 부정과 긍정의 체험이 참으로 우리에게 있는가? 그 체험이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나의 인생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가치관이 전도되어 나 자신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체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존귀함과 생명 중심적 삶의 원리를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사건을 나의 다른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그러한 경험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질병 가운데서, 절망 가운데서 그리스도 때문에 삶의 희망과 기쁨을 회복한 경험이 있습니까? 한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게 된 경험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다른 차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나의 삶의 원리가 그리스도의 인간사랑 생명사랑과 합치됩니까? 예수가 제시한 은혜의 질서와 평등, 정의의 윤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종말론적으로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성취를 향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 나가고 있는가를 자문하면서 이러한 물음에 '예'를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완성은 참 인간성의 완성과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세계 구원은 참 인간성 형성에 있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포함된 한 집단의 선구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그리스도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는 것은 그의 인간사랑, 생명사랑의 십자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절규는 율법주의로서는 안 되고 인간과 그 생명 사랑을 위해 온몸을 바친 예수 안에서만 인류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주의에 대립되는 인간성의 완성으로서의 예수를 말합니다. 역사적 예수인가 아닌가라는 그런 논쟁이 중심이 아니라, 참 인간성인가, 생명 중심인가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아노미 상태가 한국사회 병폐의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이원론적이며 근본주의에 빠져 있는 기독교와 그 신학이 인간성 회복과 생명 중심의 가치를 바르게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울과 같은 회심을 필요로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체험을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십자가 진리 앞에서 자기 부정과 긍정, 새로운 차원의 삶의 발견, 그리고 종말론적 삶을 가짐으로써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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