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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영적 지혜 - 우리의 공동체와 삶을 사건화하자"

(성서본문: 고린도전서 2:6-16)

 

1994.12.04

권진관 형제

 

[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

고린도전서 2:6-16

 

우리를 좌절시키는 오늘의 상황과 우리의 문제의식.
  우리는 70년대를 살아오면서 오직 민주화, 혹은 문민화되면, 즉 민간정부만 세워진다면 대부분의 중요한 정치. 사회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유신시절을 살 때 특히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이다. 개혁을 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개혁만 한다면 우리는 이웃 일본이나 미국보다도 훨씬 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은 군사정부에서 민간정부로의 단순한 전환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역사의 냉혹한 현실을 깊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시기이다. 최근에 우리들은 많은 좌절을 경험하고 있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이미 여러 번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부동하는 우리 정치관료들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것이다.


  이 무서운 복지부동 앞에서 우리 모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세금도둑 사건도 우리 사회가 복지부동 상황에서 전연 바뀌지 않고 있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까운 대만에서는 이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못하도록 법제화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법도 허술할 뿐만 아니라, 있는 법도 집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기강이 헤이 해졌을까? 어떻게 부정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활개치며, 부정을 저지른 공무원들이 오히려 훈장과 포상을 받으며, 칭찬을 받는 사회가 되고 말았던가? 생각하면 원통하고, 인간 죄성이 너무 뿌리깊다는 것을 새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만이 복지부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가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 버리는 복지부동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수단방법을 다 써서라도 성공하면 그만이라는 것, 올바르게 산다하며 가난하고 힘없이 산다면 그것은 능력 부족한 못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 이 세태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12.12가 기소 중지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당연한 귀결이 아니냐고 넘어가 버릴 정도로 무감각해졌고 정의감에 무디어진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도 우리를 좌절케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무감각해 진 것일까?


  교회는 어떤가? 우리 한국 교회는 외양적 종교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대교회주의, 개교회주의로 한국교회는 병들어 가고 있다. 대교회는 교인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신경을 써주지만, 작은 교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너도나도 대교회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량주의, 대교회주의는 한국교회의 큰 병폐가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이기적인 공동체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든 추세는 한국의 자본주의화의 과정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삼박자 구원의 신앙이 이러한 추세와 잘 어울리고 있다. 이렇게 신앙에 대한 극심한 오해는 한국의 대부분의 대형교회 뿐만 아니라 일반 제도교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이러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올바른 실천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행동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 전체 교회를 갱신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씨름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새길공동체가 이렇게 따로 모이는 것은 모두 이러한 도전에 성실하게 임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저도 공동체를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러한 공동체를 하게 되는 의미를 오늘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도전에 성실하게 응답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처음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신경 쓰지만,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은 지혜를 묻는다고 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합니다."(6절)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이다. 공동체로 모인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 지혜이다.


  그러면 이 지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것이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지혜는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라고 한다.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배자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과 재물을 숭상하고 그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지혜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지혜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지혜라고 했는데 지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지혜는 축적되고 모아지는 지식이나 정보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일종의 입장이요 길이다. 그것은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과 현장을 밝히 비춰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정도로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지혜는 이와 같이 구체적이며 동시에 포괄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울 선생은 우리에게 그 지혜가 무엇인가를 매우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그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특히 십자가에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장 22-25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이 말 속에 우리는 엄청난 비밀이 선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계시적 진리의 힘을 가진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십자가가 지혜라는 것이다.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자 정의의 몸부림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리고 온갖 고난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싸우시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적인 눈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부질없는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고개를 돌릴 것이다. 성공이 최고의 가치인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일은 지혜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예수는 성공이라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었던 로마시대에, 성공의 우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강하게 뿌리쳤던 분이셨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다."(마태 4:8-9) 그뿐 아니라 그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성공이 로마시대보다 더 큰 가치로 숭배 받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시대에 더욱 큰 의미를 가져다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이다. 또 하느님의 힘이 매우 약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대로, 하느님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힘은 매우 약하게 보이기도 한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힘과 지혜를 무시해 버리고 만다. 우리들의 눈에도 하느님은 힘 약한 분이라고 고백될 정도이다. 그러나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이 힘은 인간의 힘보다는 강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과학을 발전시키고, 핵무기를 개방하고, 제도화되고 구조화하여 권력을 강화한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 힘보다는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 궁극적인 목적이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얻는 것도 매우 중요한 목적이다.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르침, 즉 지혜요, 다른 것은 우리의 힘이 부족하므로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으려는 것이요, 그 힘에 의지해 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와서 고개 숙여 바라는 것이다. 우리의 힘이 모자라고, 우리의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 힘과 지혜는 세상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힘과 지혜는 화려하고 위용 있지만 하느님의 지혜와 힘은 미약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바울도 하느님의 힘이 미약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하여 이렇게 불의와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는가 말이다. 하느님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지혜가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지혜에 의지하며, 십자가에서 나타났던 부활의 힘에 의지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가 의지하는 힘은 생명의 힘이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의 생명에서 우리는 인간의 물질문명과 권력체계로부터 짓눌리고 있는 생명을 살리는 보다 더 큰 생명의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생명의 힘, 생명을 살리는, 짓눌려서 힘없는 민중, 여성, 어린이, 생태계를 살려내는 이 힘에 우리가 의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힘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다르게 내려야 한다. 힘이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이 생명의 힘과 지혜에 의지하고, 그것을 구하라는 이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과 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영적인 눈을 가진 교회나 공동체가 소수 있는가 하면, 우리 시대의 대부분은 맘몬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교회와 공동체가 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 이세상의 맘몬의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 교회를 비롯한 이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세상의 구조와 제도적인 힘들은 이러한 부름을 응답하지 않을 뿐더러, 이러한 것을 어리석다고 말한다.


  지혜의 중심은 자기 출세, 자기의 영달, 성공이 아니라 자기 포기, 자기 극복, 고난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이므로 이것을 따르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개혁을 원하지만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구태의연, 복지부동은 지금도 예나 마찬가지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세상의 권력자들, 지배자들이 추구하는 힘과 지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적 지혜와 사랑과 생명의 힘에 귀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새길교회가 일반 제도교회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힘과 그 십자가의 지혜에 의지하고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죽어가고 있는 교회들 속에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공동체에서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공동체로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맘몬을 숭상하는 만큼 십자가의 지혜에 귀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역사는 자기들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역사 하시는 것이라고 동일시한다. 자기들 교회의 주변에 있는 생명이 약해지고 꺼져 가는 속에 성령이 함께 하시며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러나 적어도 새로운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새길교회는 다른 뜻을 함께 하는 공동체들과 함께 공동으로, 연대하여 하느님의 지혜와 힘에 의지하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뜻을 펴는 진정한 공동체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운동은 지금 이미, 그리고 이전부터 이 한반도에서 싹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우리 "새로운 교회공동체" 연구소에서는 하나의 뜻 깊은 프로젝트를 정하고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금 한반도에서 교회갱신을 위하고 사회변혁을 위한 대안적인 공동체들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가를 연구 조사하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우리 새로운 공동체들이 힘을 합해서 꼭 이루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님께서는 이미 제도교회 속에서 숨막혀서 괴로워한 지 오래 되었다. 그 성령님은 이미 신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성령이 살아 움직이고 역사 하시는 새로운 공동체들을 이 땅에 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고 계시는 족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고 있다. 이번에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틀 간 길희성 교수님과 김창락 교수님 등을 모시고 강연회를 했는데 우리의 예상 밖에 연인원 100여명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15-20명만 참석하면 만족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준비 기간도 짧았는데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신학생들이 호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개척교회의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교회공동체".
  우리가 결국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운동을 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의 한국교회의 판도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 신학교에서의 신학생 배출과 진로 지도를 위해서도 이러한 전망을 고려에 넣지 아니할 수 없다. 개척교회는 앞으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물론 예외적으로 성장하는 개척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서는 교회여야 잘 일어서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교회는 대부분 곧 무너지고 문을 닫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이다. 외부로부터(즉 큰 교회로부터) 기금을 받지 못해서 홀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교회는 매우 고전하게 되며 결국 견디지 못하여 문을 닫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한국의 개신교의 모습을 보자. 서울의 골목골목, 거리거리마다 빽빽이 들어서 있는 개척교회들을 보라! 미국과 유럽,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 어디 이런 모습을 하나라도 볼 수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나라가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하면 할 수록 이러한 임대나 전세 교회들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선진국에는 이미 건물 있는 교회들도 텅텅 비기 시작한 지 오래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 가다가는, 즉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맘몬을 섬기고 거대주의를 택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가면, 일반인들로부터 지탄을 더욱 많이 받게 될 것이고, 곧 텅텅 비게 되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있는 우리가 거리의 건물 옥상 위에 여기 저기 서 있는 십자가들에 하나를 더 보태는 일에 일조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상황에서 이제 소규모의 개척교회는 매우 힘들게 되었다. 부동산 값도 매우 올랐다. 매년 많은 숫자로 배출되는 신학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성교회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기성교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 이들은 개척교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매우 비현실적인 일이다. 많은 경우 개척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직하거나 포기해 버린다. 신도들과 목회자의 관계가 좋은 것으로 지속되지 못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소규모의 개척교회의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가 더 많이 공헌하기를 요구하고 기대할텐데 이 속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는 지금도 많이 세워지고 있는 개척교회를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이다. 오늘날과 같이 고단위의 재정을 요하는 교회 개척은 물질적, 인적인 낭비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못하며, 또 빨리 교회를 일으키려는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신도들을 끄는 일을 초래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개척교회들이 물적 인적인 토대가 약하기 때문에 자립적인 교회로 성장하기가 하늘의 별처럼 따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다. 많은 목회자와 사모들이 이러한 여건 속에서 건강을 잃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에 시달린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개척교회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요, 건강하고 진보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요 방책이 될 수 있다. 개척교회에서 자립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이 매우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교회로 계속 남는 것은 성장 과정에서 보수적이고 물량주의적인 방식을 썼기 때문에 교회의 건강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목회 방식은 자립교회가 되어서도 계속 유지될 소지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교회공동체"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교회로서 그 건강성을 유지할 것이며, 또 공동체가 힘이 커져서 제도교회로 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정신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는 시작하기가 쉽다. 많은 재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 공동체를 시작하는 지도자는 우선 자기 자신의 먹을거리를 스스로 책임지는 결단이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강한 신학적 이념성과 강한 실천력을 가지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각오와 노력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공동체가 발전하여 새로이 건설될 교회는 미국의 회중교회와 비슷하게 민주적이며, 평신도 참여적이어야 하며, 적어도 현존의 회중교회보다는 더 민주적, 참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는 이러한 실제적인 요구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진정으로 성령의 교회로 활동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다. 한국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활동적인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교회이다. 이것은 은혜의 교회가 비활동적이고 이기적이며, 정치적인 교회, 빛과 소금의 사명, 누룩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령의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하느님의 약함과 어리석음 속에서 진정한 강함과 지혜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사건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개인의 삶이 얼마나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고, 의미 없는 것인지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의 삶은 사실의 연속만 있지 사건으로 점철되지는 않고 있다. 같은 사실도 사건이 될 수 있고 무미건조하고 의미 없는 사실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이 사랑의 사건으로, 어리석음 속에서의 지혜로 가득 찬 삶으로, 남을 억압하고, 남을 지배하는 행진의 삶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 강함을 드러내는 삶, 생명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삶, 꺼져 가는 생명의 현장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사건의 삶으로 점철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비록 위대한 업적의 삶을 아닐지라도 그것이 바로 영적 지혜의 삶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이러한 영적인 지혜의 삶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고 예사의 제도교회로 모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공동체가 사건의 공동체로 되기 위해서이다. 제도교회의 반복적인 삶이 아니라, 늘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실천으로 점철되는 사건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지혜를 깨달으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치려고 한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 한가지를 반복하려고 한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아서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되겠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모인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이 땅에서 사회개혁과 교회갱신을 위해 힘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당신의 지혜를 구합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주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서 당신의 십자가와 구원의 힘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결코 이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지혜와 힘을 구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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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995 [1995.01.15]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나니" 2002.01.16 한완상
36 1995 [1995.01.08]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2002.01.16 허버트
35 1995 [1995.01.01]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 2002.01.16 최만자
34 1994 [1994.12.25] "忍從의 성자 요셉 - 크리스마스에 잊혀진 성자" 2002.01.17 한완상
33 1994 [1994.12.18] "새롭게 하는 은총" 2002.01.17 서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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