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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고난 속의 생존력과 창조력

(시편 137:1-6, 창세기 37: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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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6일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

(전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1. 동포들로부터의 메아리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지난 828일부터 94일까지 8일 동안 중국 연길시 연변대학에서 가졌던 '미래의 세계와 여성의 문화'란 주제 아래 모였던 모임에서 듣게 된 해외 동포들의 현실을 전하면서, 고난 속에서의 생존력과 창조력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려고 한다. 조금 지난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전하는 까닭은 동포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아직도 나의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을, 그리고 고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또한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2. 동포 사회의 고난 속에서의 생존력과 창조력

지금 현재 해외 동포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훨씬 나아졌지만, 그들의 과거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고난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우리민족 해외거주역사 시작의 대부분은 약소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경제적 가난 그리고 사회적 모순으로 인한 도피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로 간 경우는 1960-70년대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으로 시작되었고, 그 때 우리 사회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쓰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경제 5개년 계획을 몇 차례씩 세웠고, 마을마다 '잘 살아보세'를 노래하였다. 미국 이민도 6.25 이후 미군과 국제 결혼한 여성들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그래도 구미 사회의 이주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모순을 피하려는 자발적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동포들은 강제적으로 혹은 민족의 비극적 운명으로 인한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의 거주는, 일제시대 때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서 갔거나 또는 일본이 토지 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농어민의 토지와 산림을 빼앗았기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살길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이 중국과 일본으로 들어가서 시작되었으며, 해방이 되었으나 정치, 경제적 그리고 반도 내의 사회적 혼란으로 돌아 올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때 약 50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중국에는 1,794,740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고 그중 대부분이 중국의 동부지역에 있는 3성에 거주하고 있다. 일본으로는 일제 때 강제로 연행되어 간 조선인이 725천인데 이들은 탄광, 광산, 토목공사 등에 종사하였고, 23만 명이 전장으로 징병 당했으며, 14만 명이 위안부로 강제 연행되어 갔다. 해방 후 2백만 명의 조선인이 귀국하려 하였으나 국내상황이 어렵고 6.25 전쟁 발발 등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해외거주 자체가 민족. 인종 차별이라는 고통을 수반하는데, 중국과 일본에 있는 한국동포의 경험은 더 특별한 것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이 자치주를 허락하고 자기민족 고유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나가게 하고 있어서 차별의 문제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 1940년 그들의 항일투쟁 때나, 1946-49년 동안의 장개석과 모택동의 전쟁 때나, 그리고 6.25 때 항미원조 전쟁이란 이름아래 전투를 할 때도 거기 맨 앞장을 세운 것은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 조선족은 과거 역사에서 중국 인민을 위한 총알받이가 되었다. 연변에는 열사가 대단히 많은데, 그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일본의 한국동포의 처지는 민족 차별주의에 의하여 참으로 열악한 것이었다. 192391일에 관동 대지진이 있은 후 조선인이 6천명정도 학살되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면서 학살이 진행되었다. 일본의 민족 차별주의는 극악하여서, 조선인들을 자신들이 강제 연행하여 갔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물론 주거지역도 하천이나 오지의 더러운 곳에서 집단 생활을 할 수밖에 없도록 차별하였으며, 그래서 '가난''더러움'의 종족으로 멸시하였고,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영역에서 멸시하고 차별하였으며, 그 차별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동포들의 삶은 고난 속에서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중국에 있는 동포들은 56개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13위에 속하는데 조선족은 교육열이 매우 높아서 중국 안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종족이 되고 있다. 198712세 이상 문맹률이 한족 24.6%, 티베트족 71.6%인데 비해 조선족은 불과 7.2%이고, 조선족 대학교가 다섯개, 중등전업학교 아홉개, 그리고 조선족 집거구역에는 거의 모두 조선족 중. 소학교가 있다. 연변대학은 이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으며, 그 도서관에는 민족 관련 자료들이 산더미같이 많이 있었다. 대학문화 정도도 한족이 108, 소수민족의 평균이 60인데, 조선족은 441명으로 총인구의 14.06%이었고, 대체로 정신노동과 기술직에 종사하고 있어서 문명을 앞장서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조선족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활발하였으며 어린아이들도 매우 똑똑하였다. 그들은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조선인이라는 이중의 국적이 주는 갈등을 잘 소화해내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들의 발전을 위한 창조적 힘으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더 강하고 힘있게 조선족의 긍지를 가지려고 하는 힘은 그들의 삶을 창조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었다.

 

민족 차별을 극심하게 받고 있는 일본의 한국동포는 그러나 가장 강한 힘으로 그들 자신의 내일을 창조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참으로 역설적 사건이었다. 일본의 조선인 차별의 극심함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지만 2세들의 갈등은 더욱 컸다. 학교에 숟가락을 가져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 때부터 멸시를 당해 정신병에 들게 된 한 조선인은,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부터 그 정신병을 치유 받게 되었고, 나쁜 사람이 조선인이 아니라 민족을 차별하는 일본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조선인의 긍지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일본인으로 귀화해야만 자격을 주겠다는 일본인의 요구를 거절한 김경록씨의 경우에는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사람처럼 되려고 매우 애써왔는데, 그것이 사실은 차별 받지 않으려고 한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히려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차별 받는 사람을 위해 변호사가 되려한 자신의 정신을 귀화하지 않고 지키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건은 요즈음 재일 동포 사회에서 많이 생기고 있으며 이런 일로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재판소에도 가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는 장소가 되며 우리 민족의 식민지 역사는 일본을 회개시키고 올바르게 살게 하는 교과서가 된다고 한다. 지금 재일 동포 여성들은 이라는 양로원을 만들려고 하는데, 우리 1세들이 병들고 죽음 앞에 이르는 쇠약한 몸이 될 때는 그나마 쓰던 일본말도 잊어버리고 김치를 먹고 싶어하기 때문에 일본 의사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름을 색동이라 한 것은 조선인의 인권문제가 다만 조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일 동포의 인권문제를 통하여 일본도 차별주의를 버리고 올바른 인간으로 살게 해야 한다는, 즉 공존하는 사회를 희망한다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이제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족내의 갈등, 분열, 상처를 끝내고 치유하기 위한 창조적 노력을 시작하기 위해 그들은 지난 3.1절에 민단과 공화국 측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하는 통일모임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해외 동포들은 고난을 단순히 고난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생존하는 강한 의지를 키웠으며, 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계와 대항하고 고난을 초래하는 불의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힘을 생산하여 내었다. 고난은 오히려 승화되어 고난을 단절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3. 고난 속에서의 생존력과 창조력의 신학적 의미

우리들의 고난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도덕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인과응보론적인 것이다. 가난, 질병, 불의의 사고 등은 신의 징벌이나 자신의 죄의 결과로 돌린다. 상대적으로 부귀, 영화는 신의 축복이라 한다. 성서의 신명기적 역사관도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고난에 대한 이해는 또 한편으로는 고난을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해석한다. 요셉의 환란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것이 그 예라 하겠다. 또 성서는 대속적 고난을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를 대신한 희생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고난의 어느 한 면을 이해하게는 하지만 참으로 이유 없이 수동적으로 당해야 하는 고난의 문제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참으로 우리들이 실존적으로 당면하는 수동적인 고난은 차라리 인간 실존의 신비의 한 측면으로, 그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 편이 정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은 그 고난으로부터 발생되는 창조적 힘을 보는 일이다. 고난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생존력과 창조력의 위대함이라 하겠다. 앞에서 동포들의 고난에 찬 삶의 현실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안고 오는 모습을 보았다. 창조력은 고난 속에서 자기 존재의 확인으로부터 생겨났고, 자기를 긍정하고 세상에 정의를 수립하려고 하는 힘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보았다.

 

구약성서학자 김이곤은 히브리 백성의 애굽 종살이의 고난이 발생시키는 해방의 창조적 힘을 가시떨기 나무에 타지 않는 불꽃으로 현존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은유 된다고 한다. '가시'라는 히브리어 '스네'"연약한 것"에 대한 상징인데 그 '스네' 속에 하나님이 강한 불꽃으로 나타났고 임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출애굽기 3장은 보여준다. 힘없는 유민-합비루, 곧 연약한 노예 이스라엘의 한 상징인 '스네' 속에 강한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다. 태양이 작열해도 소멸될 듯한 연약한 운명의 스네와 불꽃의 공존은 놀라운 사건이다. 이 상징은 고난 속에서 자기 역사를 찾고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힘을 가지는 동포들의 삶과 일치한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스네들에게 응답하시는 신은 멀리 초월하여 있고 지시. 지배하는 신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정의를 향하게 하고 용기를 가지게 하며, 탄식을 저항의 힘으로 변화시켜 주는 동력으로 함께 한다. 그들의 그 저항의 힘 안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창조력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민족사와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특히 그들의 바빌론 유배생활은 오늘 우리가 전해들은 해외 동포들의 삶을 연상시킨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도, 성전도 잃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큰 능력에 대한 회의마저 품게 되었다. 그들에게 바빌론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청을 들어 줄 수 없을 만큼 나라 잃은 슬픔에 쌓였다. 오늘의 성서 시편 137편은 바로 그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위대한 신학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자기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여 민족의 비전을 제시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재정립하여 야훼 하나님이 바빌론의 마르둑 신보다 훨씬 위대한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된다는 신앙고백을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세기 1장의 선포가 바로 그것이다. 비극을 역사 재창조로,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는 신앙의 힘, 그것이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불가사의한 신앙의 비밀이다.

 

4. 자발적 고난으로 연대하는 삶

이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고난 속의 생존력과 창조력의 의미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자 한다. 이것은 수동적 고난이 아닌 자발적 고난의 차원을 우리들의 삶 속에 우리가 열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변 과학기술대학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 등 엘리트들이었다. 자신들의 안일하고 행복이 보장된 사회에서의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연변에서의 고생스런 생활을 자청하고 있었다. 월급도 받지 않으면서 조선족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하고, 앞으로 역사에 주인공이 될 그들의 역할을 뒷받침하고자 헌신하며 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발적 고난의 삶이 만들어 내는 창조의 힘을 또한 볼 수 있었다. 북한의 실정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도 어렵다는 소리에, 신의주 건너편에 있는 단동에 빵 공장을 만들어 북한 어린이들에게 공급한다고 하였다. 한국정부는 이름 없이 당장 북한을 돕는 일에 나서지 않고 통일기금을 마련하고 있어 남한에 오면 울분이 터지고 북한에 가면 가슴이 저민다는 말을 하였다. 자기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연변 조선족의 미래를 위하여 고생을 선택한 그 분들을 보면서, 통일을 이루는데 우리가 어떤 희생을 할까, 어떤 역할을 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통일되면 어떤 자리가 나에게 올까, 어떤 이득이 생길까를 생각하는 일부 정치인. 종교인들의 모습이 대조되었다.

 

자발적 고난으로 연대하는 삶을 보면서 그러한 삶의 근본적인 영성은 지극한 인간애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자기 헌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애 -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우리가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모습은 바로 지극한 인간애, 곧 그 자비의 속성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헌신 그것은 자기존재 자체를 궁극적 실재에게 맡기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진리 앞에 정의 앞에 헌신하기 위한 자발적 고난의 선택적 삶이라 하겠다.

 

형제의 환란에 무관심하였던 요셉의 형들처럼 살아 온 우리들이 이제 해외에 흩어져서 창조적 삶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동포의 삶을 보면서 언제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요청되는 삶을 지속하면서 자발적으로 고난의 삶에 연대할 수 있는 영성을 가질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 고난으로 연대하는 삶은 고난 속에서 생존력과 창조력을 만들어 내는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우리들의 메아리이며, 우리들의 창조력은 또 다른 창조력을 만들어 내는 반향을 듣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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