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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영무 다니엘
"교회일치를 실천하는 떼제 공동체"


1994.08.14
김영무 다니엘 형제



  현대의 성인으로 칭송되는 가장 사랑 받는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분인 요한 23세는 일찍이 떼제 공동체를 가리켜 '작은 봄(春)'이라고 했다. 여러 교파로 갈라진 교회가 다시 한 마음으로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화해의 누룩'이 되려고 노력하는 이 공동체에 참으로 어울리는 비유이다. 분열과 아집이라는 신앙의 겨울을 은은히 녹이는 봄기운과도 같은 이 공동체의 몇몇 형제(수사)들이 우리 땅에 실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도 15년이 되어간다.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온기에 힘입어 그동안 천주교와 개신교의 여러 교파, 그리고 성공회와 동방교회의 뜻 있는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리와 기회가 이 땅에서도 여러 번 있었다.
 
  분열과 아집의 얼음장이 특히 두꺼운 이 땅에서 이런 해방의 시간이 생겼다는 사실­그것이 아무리 작은 자리이고 그 순간이 그야말로 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작은 봄'의 순간이 이제는 해마다 일치주간에 한겨울 속 봄처럼 찾아온다는 사실­그 자체가 한없이 귀하고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서는 기독교 신자라면, 특히 젊은 신앙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아는 이 공동체를 이 땅에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서 별로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얼어붙은 땅에서 그 추위와 암흑에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주 마비가 된 사람이 아니라면 본능적으로 봄을 그리워할 것이며, 이런 그리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작은 봄'의 기운이 환영받을 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떼제 공동체 형제들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에 떼제 공동체가 생기기 1년 전인 1978년 미국 뉴욕에서였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 신부님이 틈만 있으면 떼제 공동체 형제들을 초대하여 함께 주일 미사를 볼 기회를 마련했다. 매우 짧으면서도 영성 깊은 떼제의 돌림 노래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독서와 강론 위에 긴 침묵이 있는 미사, 마음 안에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이 있는 미사에 참례하면서 그때 나는 처음으로 미사의 참 맛을 진하게 맛볼 수 있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떼제 공동체가 갈라진 기독교인들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는 형제들의 모임이라는 것과, 이들의 이런 노력이 무슨 요란한 '운동' 혹은 '캠페인'같은 것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조용한 실천적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삶을 옆에서 들여다보면서, 갈라진 기독교 신자들 사이의 일치가 이 공동체의 최종목표가 아니라 궁극의 목표는 인류 전체가 하나가 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천주교니 개신교니 등으로 갈라진 기독교라는 무슨 큰 종교 하나를 이 세상에 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사이의 친교와 일치(communion)를 창조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그러나 흔히 잊혀지는 진리­를 떼제 형제들의 삶은 나에게 보여주었다.
 
  몇 년 뒤 귀국하니 김 추기경님의 초대로 떼제 공동체 수사들 몇몇이 1979년부터 서울의 화곡동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여간 반갑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틈만 있으면 화곡동으로 달려가 '작은 봄'이 그리워 찾아오는 다른 마음이 추운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떼제 공동체가 주최하는 묵상 기도모임은 이제 화곡동은 물론이고, 명동, 구로동, 압구정동 등에서 열리고 있다.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되풀이해서 참석하는 가운데 같은 침묵 중에 떠오르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기쁨을 맛본 사람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떼제 공동체 형제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가족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의 이웃을 향해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오직 가족과 친지밖에는 모르던 마음의 문을 열어, 낯선 사람들도 환대할 수 있는 자세가 싹튼 것이다. 그리고 남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체험하게 되었다. 남을 반갑게 손님으로 맞아 서로 나눌 수 없을 만한 궁핍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삶을 보여주고 함께 나누는 일이 중요할 뿐,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떼제 수사들의 삶이 깨우쳐 주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오히려 남을 더 잘 환대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신비로운 진리이다. 내가 가진 것이 많으면 남에게 관대하고 남을 더 잘 받아들이고 더 잘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응접실에 값비싼 양탄자가 깔려 있을 때, 장식장에 수백 만 원짜리 도자기들이 놓여 있을 때, 집주인은 이웃집의 개구쟁이나 코흘리개가 엄마를 따라와 그 귀한 것을 깰까봐, 우유라도 쏟을까봐, 오줌이라도 쌀까봐 두려워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남에게 개방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지난해(1992년) 5월에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지상에 신뢰의 순례길'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떼제의 기도모임이 있었다. 마침 캐나다의 토론토에 머물고 있던 나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가족과 함께 네 식구가 장장 왕복 2,000Km를 차를 몰아 다녀왔다. 몇 십만 명이 참석하는 유럽에서의 떼제 모임에 비해, 참석 인원이 몇 천명밖에 안 되어 조금은 기대 밖이었지만, 미국의 곳곳에서 캐나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처럼 수천 리를 차를 몰아 달려왔고 중남미에서 날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무엇을 찾아 이들은 이렇게 먼 길을 떠난 것일까?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가지밖에 없는 것 같다. 이들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오직 신뢰하는 마음 하나로 순례 길을 떠난 것이다.
 
  다른 참석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민박을 했는데 5박 6일 동안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지상에 신뢰의 순례길'에 나선 우리를 맞아준 집은 아이들이 무려 11명이나 되는 가정이었다. 대학졸업반 맏아들로부터 백일 되는 갓난아이까지 4남7녀를 둔 재해보상청 가난한 공무원의 가정으로, 자신들의 방도 모자라면서(방 하나에 딸 다섯, 다른 방 하나에 아들 셋) 서슴없이 집을 열어 우리 4식구를 맞이하여 응접실을 내주었다. 십여년 전 아이들이 다섯밖에(?) 없던 때는 월남 난민 여섯 식구를 받아 석달 이상을 함께 살면서 일치의 삶을 실천한 가정이기도 하다.
 
  몇 천리 길을 마다 않고 떠난 우리의 신뢰의 순례 길은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이 가정의 환대에서 이렇게 그 절정에 달했다. 이제 우리는 준비가 안 되었다느니, 방이 없다느니, 누추하다느니 등등의 어떤 구실로도 우리 집의 문을 닫아 걸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일치와 화해를 기원하는 우리 교회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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