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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하나님 자녀들의 자유"

(성서본문: 로마서 8:12-17)


1994.06.26

길희성 형제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 로마서 8:12-17-


  종교가 과연 인간성을 고양하고 살리느냐 아니면 인간성을 파괴하고 말살하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종교인들, 신앙인들은 종교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종교의 횡포와 질곡을 고발하며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휴머니스트들의 눈에는 종교는 인간성을 질식시키고 말살하는 인간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사실,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고 죄악상을 고발하려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잔악한 종교재판으로부터 비롯하여 교권에 의해 가해진 수많은 심문과 고문, 파문과 추방, 양심의 자유의 구속, 사상적 자유의 말살, 미신과 광신, 독선, 배타성, 그리고 탐욕과 부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서구 그리스도교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조선조 시대에 유교의 이름 아래 자행된 온갖 억압과 부조리, 특히 여성의 비인간화는 새삼스러이 언급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사회에서는 종교 율법의 이름으로 우리가 보기에 도저히 상식으로 용납할 수 없는 비인간적 현상들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준 종교 집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북한 사회의 비인간화된 인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종교의 해악을 가장 선명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종교의 깃발 아래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대립, 살상과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종교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인가 의심할 때가 많으며 종교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부르짖는 휴머니스트들의 외침에 공감할 때가 많습니다. 무지와 광신보다는 차라리 불신앙이라도 휴머니즘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이자 현대의 위대한 지성중의 한 사람인 에리히 프롬은 종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권위주의적 종교요 다른 하나는 휴머니스트적 종교입니다. 권위주의적 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며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하는 종교로서 인간을 정신적 노예로 만들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마치 절대복종을 강요하는 폭군과도 같은 존재로 그려지며 그 앞에서 인간은 벌벌 떨고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폭군 같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벌레와 같은 존재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읊조리면서 한없이 자기를 비하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해 이러한 권위주의적 종교는 자학적인, 매소키즘적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에 매혹되어 그것이 마치 참다운 신앙인양 하나님 앞에서 자청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양도해버리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노예와 같이 비인간화되어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며,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인간성을 배반하고 그것으로부터 소외당함으로 인해 오는 죄책감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되기에 또 다시 교회에 나와서는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한탄하며 또 다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몽땅 양도해버리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휴머니스트적 종교는 인간성을 살리고 개발해주며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적 삶을 살도록 억압적 구조와 사상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종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신앙은 과연 어떤 유형의 것일까요? 인간성을 살리며 자유와 창의성을 개발해주는 신앙인가요 아니면 인간성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신앙인가요? 분명히 오늘날 한국 기독교 신앙에는 병적인 면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첫째로 병적이고 습관적인 죄의식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화해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습관적으로 말끝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신앙과 경건성의 확실한 표시나 되듯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인의 판결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죄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큰 죄악 가운데 하나이며 비신앙적이고 비복음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책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지 자학적으로 자기의 죄를 되씹기 위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는 성숙하지 못한 노예 근성 내지 의존성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서구인들에 비해 독립적이지 못하고 의타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것은 신앙생활에서조차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특히 이 점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깊은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부모와 사랑하는 자식들과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진리로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서 모든 신앙인들이 여기서 무한한 행복과 기쁨, 위로와 평화를 체험해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진리이기에 실감이 나지 않으나,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에게는 너무나 참된 진리였습니다. 그는 오직 이 한가지 진리만을 깊게 믿고 깨달아 거기에 따라 철저하게 사셨기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송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진리이기에 사도 바울은 이 엄청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성령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 우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종이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폭군과도 같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벌벌 떨며 굽실거려야 하는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러할진댄 하물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누가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를 의존하고 누구를 섬긴단 말입니까? 우리는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가 약속한 엄청난 유산을 이어받을 상속인입니다.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압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로 하여금 대가족 안에서 우리들의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들도 그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로마 8:29). 예수가 우리의 맏아들, 혹은 맏형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좀처럼 듣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며 틀림없이 사도 바울의 증언입니다. 예수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참 아들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들의 형이고 우리는 그의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다가 고난 당했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유산을 처음으로 획득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그가 못 다한 고난에 동참하다가 그와 같이 영원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존재들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라고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엄청난 유산을 약속 받은 공동 상속자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예수의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이 큰 희망 가운데서 오늘의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함께 고난의 길을 걷자고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유산을 받을 큰 희망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으며 가난해도 부자이며 없어도 비굴하지 않으며 고난을 당해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산다는 것은 현재에도 큰 기쁨이요 축복이지만 아직은 이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아니기에 우리들에게는 실망과 좌절이 늘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맏형 예수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유산을 상속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을 유산은 절대 평등한 것으로서 결코 상속자들 가운데서 재산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유산은 누가 더가지고 덜 가질 수 있는 그런 유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풍요로운 유산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모두 사회적 신분도 다르고 가진 것도 다르며 생긴 것과 성격도 다르나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같이 영광된 몸을 가지고 천사와 같이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절대 평등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차이와 차별, 갈등과 대립이 거기에는 없으며 모두가 한 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에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아들과 딸의 구별조차 없는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지상의 가족 공동체가 가지는 모든 불완전함을 덜어버린 한몸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에 가장 가까운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가족 공동체는 아직도 차별이 있고 억압과 폭력이 있으며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가족보다는 교회공동체야말로 하나님나라에 가장 가까운 공동체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징표입니다. 이 교회공동체는 가족공동체만큼 끈끈한 사랑과 정이 없을는지는 몰라도 믿음의 자매 형제들간의 사랑은 가족 성원들간의 사랑보다 더 순수한 데가 있고 교회공동체에는 가족 이기주의나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세상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차별이나 억압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와 같이 순수한 공동체를 찾아서 다시 한번 출애굽을 감행한 것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성직자와 평신도, 장로와 집사, 남자와 여자, 젊은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의 차별이 없는 곳,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징표로서의 교회공동체의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한 분만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맏형이자 목자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이러한 공동체가 또다시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는 문자 그대로 아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징표이어야 합니다. 커다란 공동의 유산을 앞에 놓고서 우리들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부풀어 있기에 사소한 일로 분쟁이나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매우 험난한 곳에 깊이 감추어진 엄청난 보화를 차지하려고 큰 희망에 부풀어 공동 탐험에 나선 사람들이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불평하지 않고 서로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온갖 난관과 역경을 이겨내듯이 믿음의 공동체도 그러합니다. 오직 우리의 맏형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 각자에게 맡겨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험산준령을 넘어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유산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그네와 같이 잠깐 다녀가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나그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확실한 징표를 발견하고 그 희망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사는 일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나그네 인생길이 끝나면 허무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징표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징표를 찾아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하나님 자녀들의 사랑과 은총, 자유와 헌신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나섰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영원한 유산을 공동으로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를 맏형으로 모신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임을 기억하면서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믿음의 행진을 계속합시다. 서로 아끼고 감싸주며 쓰다듬고 다독거리면서,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실망하면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나그네 인생여정을 함께 힘차게 걸어갑시다.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고 감사함으로 새로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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