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17.33.156) 조회 수 55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자 한상봉

 

가톨릭아나키스트 도로시 데이

(마가복음서 10:42-45)

2018422

주일예배

한상봉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마가복음서 10:42-45 -

 

그리스도인의 삶에 청사진은 없다

 

저는 스스로 신학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Doing Theologian’이나 ‘Teological Activist’ 그냥 신학활동가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이 책상머리 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때는 의자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시골에서 6년이나 농사를 지었고, 심리적 상처를 다루기 위해 예술심리치료사로 일하기도 했고, 교회개혁을 위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편집을 하고, 지금은 영성에 기반한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의 필요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로마제국주의와 유대 지배세력의 탐욕에 저항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옹호하기 위해 나섰던 길에서 죽임을 당한 셈이니까요.

 

자기 미래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이나 로드맵 없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필요라는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요청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가난한 이들의 형편이 중요하고,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으니까요. 예언자들은 그분을 언제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떠돌이였습니다. 그래서 안정된 삶을 얻지 못하고 불안정한 삶을 강요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이때에 하느님이 야훼, 가톨릭 성경으로는 있는 나”, 곧 임마누엘처럼 나 여기 있다, 늘 너희들 곁에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자들은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다 불쑥 그런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서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언자들처럼 우리도 언제나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성령께서는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법이라고 믿습니다.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

-경계선에서 노예들의 종교를 사랑했던 여성들

-복음적 아나키즘

 

개인적으로 제게 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두 사람입니다. 한 분은 시몬 베유이고 다른 한 분은 도로시 데이입니다. 우연히 두 분 다 여성이지만, 이 때문에 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힘에 대한 숭배와 폭력을 낳기 쉬운 가부장적,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적, 모성적 가치는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어느 편에 속박되지 않고 늘 경계선에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이었던 베유는 가톨릭신비주의에 흠뻑 젖었지만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노동당 입당원서에 사인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내란 당시에 그는 인민전선에 합류해 투쟁했지만, 전쟁 과정에서 좌파가 보여준 폭력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로시 데이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였지만 가톨릭교회를 선택했습니다. “교회는 나에게 언제나 스캔들이었다고 고백할만큼 제도교회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미사를 드리고 기도서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사람들을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든 교회든 정당이든 자신이 속한 제도나 집단이 아니라 복음이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복음적 명령이었습니다. 시몬 베유는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라고 말했는데, 도로시 데이는 그 노예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한결같이 노예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신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노예처럼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모든 권력과 제도는 상대화 됩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만이 삶의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복음적 급진주의또는 복음적 아나키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보여주었던 모습도 그런 것이었지요.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이며 천한 자의 복음은 복음을 천하게 만든다고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 사람만큼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사람도 없습니다. 니체는 예수에 대해 비천한 민중, 추방된 자, 죄인들을 지배질서에 대항하도록 불러 모으는 이 거룩한 무정부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주인의 가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했습니다. 노예의 도덕에서 핵심가치는 가련한 자에 대한 동정’(compassion)입니다. ‘동정은 타인의 슬픔을 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입니다. 귀족이나 엘리트는 타인에 대한 거리 두기에 능숙합니다. 노예들은 불쌍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런 거리두기에 실패한 사람이 예수님이며, 그런 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가톨릭-좌파 성인, 도로시 데이

 

현재 도로시 데이에 대한 시성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녀는 생전에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나더러 성인이라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그분이 공식적인 성인이 된다면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겁니다.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에 새로운 바람이 시작된 느낌도 있습니다만.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20세기 사회운동가로서 노동자들의 파업에 동참하고, 전쟁과 낙태를 반대하며, 감옥에 들락날락하고, 교회가 복음적이지 않다고 비난했던 사람이 성인이 되는 거니까요. 정치적으로 좌파 쪽에 있는 사람들은 도로시가 낙태와 피임을 반대했기 때문에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권은 생명권에서 시작된다는 교회 가르침을 도로시 데이가 따른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우파 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반전 평화 운동에 적극 나선 여성이라는 점에서 불편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교구의 티모시 돌란 추기경은 저는 도로시가 우리 시대를 위한 성인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사회정의와 자선, 영성과 실천을 통합시킨 거의 유일한 가톨릭성인입니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보다 제게 가장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도로시 데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환대의 집입니다.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해주는 곳인데, 노숙인들은 여기서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신발도 얻어 신고, 목욕도 하지요. <환대하는 삶>이라는 도로시 데이 평전을 쓴 로버트 콜스라는 사람이 처음 도로시 데이를 찾아갔을 때 이야기를 한 자락 들려드리겠습니다. 콜스는 대학생이었는데, 그가 도로시를 방문했을 때 마침 도로시는 어느 중년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알콜중독자였던 것 같은데, 그 여인은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도로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내심 있게 그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잠깐 틈을 내어 도로시 데이가 콜스에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까?” 콜스는 이 질문에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도로시 데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도로시가 볼 때에는 그 여인이나 도로시나 우열이 없었던 거지요. 실제로 가난하고 술에 절어있는 여인에게서도 들을 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귀부인만을 위해 다이아몬드를 창조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환대의 집에 귀부인이 찾아와 도로시 데이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기부하고 간 모양입니다. 마침 늘 찾아오곤 하던 노파가 오니, 도로시는 이 노파에게 그 반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노파가 돌아간 뒤에, 풀타임 활동가들이 달려와 도로시에게 그냥, 그 반지를 주느니, 팔아서 월세라도 내주는 게 낫지 않아요?” 하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때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죠. “하느님은 다이아몬드를 귀부인들만 끼고 다니라고 창조하지 않았어요. 그 노파가 그걸 팔아 술을 사 먹든, 바하마로 놀러가든, 월세를 내든, 손가락에 끼고 다니든 그건 그 사람이 결정하면 됩니다.” 현실적인 우리들의 상식을 깨뜨리는 발언입니다. 마치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한 여인이 귀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붓자, 제자들이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하던 볼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미카엘, 당신은 신앙이 없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은 돈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분명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미국에는 200여 개의 환대의 집이 있는데, 이 환대의 집들은 규모를 키우지 않습니다. 누구나 먼저 생각한 사람이 작은 규모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환대의 집을 시작합니다. 꼭 무료 밥집일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매매춘 여성을 위해, 어느 곳은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어느 곳은 평화운동을 합니다. 다만 <가톨릭일꾼> 신문을 통해 정신을 공유할 뿐입니다.

 

이 집들은 대개 성요셉의 집, 마르타의 집 등 ‘~의 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교회를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맺는 새로운 가정이라는 신학적 바탕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우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처럼, 가족적 분위기가 환대의 집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환대의 집들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재정적으로는 각자 알아서 운영합니다. 한번은 어느 환대의 집에서 도로시 데이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재정문제로 어려운 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문을 청한 모양입니다. 그때 도로시 데이는 간단한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미카엘, 당신은 신앙이 없습니까?” 그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면 돈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면 접으면 그만이라는 거지요. 그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환대의 집에는 규칙이 없다

 

환대의 집은 규약도 규칙도 회원도 회비도 대표도 없습니다. 그저 그 집에 함께 사는 활동가들과 노숙인들이 함께 의논해서 결정합니다. 중심을 꾸리는 분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이지만, 대부분의 다른 식구들은 종교랑 상관이 없습니다. 벽에 걸린 십자가 외에는 가톨릭이란 표식도 없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사자들인 가난한 이들을 돌봅니다. 하느님 백성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신자들 안에서만 성령이 활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대의 집에서는 일을 시키는 사람도, 일을 배정하는 사람도 없어요. 알아서 일하고, 일하기 싫으면 그냥 쉬면 됩니다.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어요. 그야말로 아나키스트적 운영방법이지요.

 

돈이 필요하면 기도를 합니다. 그렇다고 후원회를 조직하지도 않습니다. 알아서 보내주는 소액 기부만으로 운영합니다.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활동합니다. 그들은 고액기부를 받지 않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복지단체들처럼 정부에 프로젝트를 내거나 교회에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기업의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야 어떤 제도나 집단에게 영향 받지 않고 자유롭게 투신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니까요.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입니다. 특히 그들 사이엔 성 요셉 성인에게 기도하면 필요한 돈을 보내준다는 믿음이 있고, 그게 사실로 입증된 적도 많은 모양입니다. 고액 기부를 받지 않는 이유는, 활동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소액기부를 통해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이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이 큰돈을 내면 다른 소액기부자들의 손이 부끄러워지니까요. 기부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참여의 한 방법이고, 가능한 많은 이들이 가능한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인됨에 있다_인격주의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점만 덧붙이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도로시 데이 영성의 핵심은 인격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는 조직이나 집단의 흥망성쇠에 관심이 없습니다. 193151일 시작되었지만, 지나간 날에 대한 정리보다 현재에 주목합니다. 과거사 정리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자비활동입니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 본부에 해당하는 메리 하우스에 가도, 예전에 도로시 데이가 쓰던 사무실엔 먼지가 쌓여 있지요. 그걸 차분히 정리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은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이 되기 전 단계인 복자 전 단계의 주님의 종이지만, 뉴욕교구에서 관심을 가질 뿐 정작 가톨릭일꾼에서는 도로시 데이의 시성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도로시 데이 자신을 성인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한 까닭도 있겠지만, 기념보다 현재의 활동을 가치 있게 보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인력과 돈으로 당장에 필요한 일부터 하는 것이지요. 기념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모양새입니다.

 

그렇지만, 도로시 데이 자신은 언제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인됨에 있다고 했습니다. 테툴리아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 지옥을 면하는 데 있지 않다고 한 말과 비슷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함으로 불리었고, 가톨릭일꾼운동 역시 이 일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함으로써, 내 자신이 거룩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환대의 집은 이런 성인됨을 배우는 학교이고, 캠프라고 여깁니다. 많은 이들이 환대의 집과 가톨릭일꾼운동을 거쳐 갑니다. 굳이 이 사람들을 조직에 묶어둘 생각이 없습니다. 활동가들은 가난한 그리스도가 되어 가난한 노숙인 그리스도를 돌봄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사회변혁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변혁운동의 과정에서 변화되는 자신이라고 도로시 데이는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동선을 위해 일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에 살아가는 개별 인격입니다. 그 개별 인간을 위해 벌이는 사회적 사랑, 정치적 사랑이 곧 신앙운동이라 믿습니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자

 

도로시 데이와 더불어 가톨릭일꾼운동을 창립한 피터 모린은 경신, 경문, 경작을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을 예배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명료화를 위해 학자들과 노동자들이 모여서 원탁토론회를 하고, 시골에는 도시에서 배제된 이들이 농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개인에게 적용시키면, 저희들이 지금 한국에서 일꾼운동을 하면서 내건 슬로건과 같습니다.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성심으로 공부하며, 기쁘게 일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로건은 베네딕도수도원의 기도하고 노동하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 말에는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노동()에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공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누구신지 명료한 의식이 있어야 헛된 기도와 허튼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오래 기도하고, 이명박처럼 부지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바랄 것을 바라고, 믿을 것을 믿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제대로 공부가 안 되면,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는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느님을 섬긴다지만, 몸으로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말로는 하느님의 종이라고 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능멸할 수 있습니다새길로고.jpg


  1. [2018. 9.16]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를 묻다: 공공적/수행적 교회

    Date2018.09.20 Category2018
    Read More
  2. [2018. 8. 26] 어느 일요일 아침의 기도

    Date2018.09.06 Category2018
    Read More
  3. [2018. 8. 5] 고통과 선(善)

    Date2018.08.16 Category2018
    Read More
  4. [2018. 7. 29] 담을 허무는 사람, 문익환

    Date2018.08.07 Category2018
    Read More
  5. [2018. 7. 22] 청년, 우리 시대의 이웃

    Date2018.07.26 Category2018
    Read More
  6. [2018. 7. 15]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신앙고백

    Date2018.07.20 Category2018
    Read More
  7. [2018. 6. 10] 여성들은 그 때 어디에 있었나요?

    Date2018.06.14 Category2018
    Read More
  8. [2018. 6. 3] 자연의 신음과 고통은 하느님의 가쁜 숨입니다!

    Date2018.06.12 Category2018
    Read More
  9. [2018. 5. 27] 이 세상의 하나님

    Date2018.06.01 Category2018
    Read More
  10. [2018. 5. 20] 일하시는 하느님

    Date2018.05.24 Category2018
    Read More
  11. [2018. 5. 13] 하나님의 권세와 세상의 권세

    Date2018.05.16 Category2018
    Read More
  12. [2018. 4. 29] 경건에 이르는 길

    Date2018.05.09 Category2018
    Read More
  13. [2018. 4. 22] 가톨릭 아나키스트, 도로시 데이

    Date2018.04.26 Category2018
    Read More
  14. [2018. 4. 8] 일상의 신성

    Date2018.04.24 Category2018
    Read More
  15. [2018. 4. 1] 부활, 종말, 영생

    Date2018.04.10 Category2018
    Read More
  16. [2018. 3. 25]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리다

    Date2018.04.04 Category2018
    Read More
  17. [2018. 3. 18] 예수의 생명을 품은 바보, 이용도

    Date2018.03.28 Category2018
    Read More
  18. [2018. 3. 11] 국가 ‧ 전쟁 ‧ 여성

    Date2018.03.21 Category2018
    Read More
  19. [2018. 3. 4]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Date2018.03.08 Category2018
    Read More
  20. [2018. 2. 25] 맨손혁명으로 만들어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Date2018.02.28 Category201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4 Next
/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