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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봄의 종말론적 이야기 - 최만자 자매

새길교회 말씀증거













2004. 12. 12.





 



돌아봄의 종말론적 이야기


[마태복음 25:31~34]


 


최만자 자매 



 



 
12월은 성탄절이 있어 축제 같은 분위기가 우리를 들뜨게 합니다. 예수의 오심은 온  인류에게 기쁜 사건임에 틀림없기에 예수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때가 즐거운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예수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아기예수를 우리는 한껏 그립니다. 대강절 내내 우리는 찬송 104장을 부릅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곧 오소서 지혜의 주 온 만물질서 주시고 참 진리의 길 보이사 갈 길을 인도 하소서, 곧  오소서 소망의 주 만백성 한 맘 이루어 시기와 분쟁 없애고 참 평화 채워주소서,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이렇게 포로생활 같은 삶의 고달픔을 풀어주실 분, 만물의 신음 가운데 참 진리의 길로 구해 주실 분, 그리고 시기와 분쟁(폭력과 죽임) 없애고 참 평화를 채워 주실 분 이신 예수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린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성탄을 맞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성탄을 기뻐하는 것은 단지 아기예수의 오셨음에 대한 회상에 머무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기다리는 예수도 아기로 다시 태어나는 아기예수이기 때문에 편하게 즐거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성탄절은 상당히 낭만적이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성서에서는 다시 오시는 예수는 아기 예수가 아니라 재림의 예수, 이 세상 끝 날에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금 다시 재림의 주, 심판의 주로 오신다면 기쁘게 예수를 맞이할 수 있을까 묻게 됩니다. 한껏 즐거운 성탄절에 심판하시는 재림의 예수 이야기를 해서 우리들 마음을 공포스럽게 할 생각은 아니지만 이 대강절에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자신들에게 성탄의 의미를 다시 깨달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탄절, 그것은 사실인즉 예수의 재림을 기다림입니다. 소란스럽고 폭력이 난무하며 곳곳에 죽음의 음침한 그늘이 서리고 고통의 아우성이 울려 퍼지는 이 세상에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끝장내고 새 세상을 이루어 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우리는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탄절의 중심은 예수의 재림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다시오시면 어디로 오실 것이며 무슨 일을 하실까? 나에게(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며 무슨 말씀을 하실까? 지금 내 앞에 찾아오신 예수를 내가 알아 볼 수 있을까? 만약 지금 재림하신 예수가 나타나면 나는(우리는) 그분을 환호하며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성탄절에 대한  이전에 가졌던 저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마냥 앉아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맞을 성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재림하는 예수를 생각하는 성탄은 제게는 훨씬 다른 느낌으로 다가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에게는 예수의 재림신앙에 대한 비판적 감정이 있습니다. 이 재림 사상으로 인해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추태와 재림신앙에 몰두한 사람들의 왜곡된 삶의 모습 때문에 정말 재림사상을 비판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다미선교회를 비롯한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일그러진 신앙행태는 기독교 재림신앙을 결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혹자는 기독교에서 묵시문학적사상과 재림사상이 없어야 온전한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재림신앙에 거부반응을 가지는 것은 이 신앙을 신앙의 절대 5대 강령중의 하나로 무지막지하게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는 근본주의적 강요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 연례행사 치르듯 치러지는 성탄절, 이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우리가 새로 맞아야 하는 예수는 아기 예수가 아닌 재림의 예수라는 생각을 하면서 재림 신앙적으로 성탄을 맞는 것에 대하여 깊이 명상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가득해 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참으로 종말론적인 이야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에 계신 김영봉 목사께서 레슬리 뉴비긴의 재림사상에 대한 재고를 인용한 글을 보았습니다. 뉴비긴은 말하기를 “재림 신앙은 우리 세계에 전혀 새로운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믿는 신앙이다. 재림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현재 우리 세계에 단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진지하게 대하고 있고,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역사의 최선의 진행 경로를 예측해내는 미래학의 필요성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예상하는 전혀 다른 근거가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뭔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상이 단지 꿈이 아니라 현실이며, 그 현실이 지금 동네 어귀에 와 있다고, 그리고 이제 곧 우리 세계로 뚫고 들어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재림신앙이다.”


이 글을 대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재림신앙을 많이 오해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된 재림신앙은 믿는 이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무가치하게 만들지만, 참된 재림신앙은 지금 현재의 새로워짐에 초점을 두며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서 역사에 더 깊이 참여하게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절망과 고통의 세상에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예수의 재림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올 성탄에 바로 이런 새 역사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바로 성탄을 종말론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본문은 최후의 심판 혹은 세계 심판이라는 제목이 붙는 비유 해석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32절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라는 비유적 표현 때문에 사실적 내용이라기보다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봅니다. 우리가 성탄을 종말론적으로 맞는다면 이 성탄의 계절에 바로 이 본문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적절할 것 같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두 부류의 사람 곧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구원받는 사람과 멸망 받는 사람을 가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최후의 심판대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분류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날에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불러 모으고 그들을 가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성서본문의 해석을 최후의 심판이야기로서 보다는 예수가 목마른 자, 헐벗은 자, 주린 자 등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철저히 동일화시키고 있다는 기독론적 해석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민중이 곧 예수다’라는 민중신학의 한 주장에 대한 논란이 일게 한 근거가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김창락 교수의 이 비유에 대한 해석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려 합니다. 김 교수는 대체로 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혹은 종말에 대한 비유들은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집중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의 최후의 심판 비유는 그것들과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라지 비유나 그물 비유 등은 밀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르는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는 데 역점을 두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은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역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기준이 당시의 청중의 모든 예상을 뒤엎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나 왼쪽에 서있는 사람이나 구별 없이 모두 자기들에게 내린 판결을 두고 심판자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서 잘 드러납니다.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도 비신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악행이나 의식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서 멸망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주린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등 이런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김 교수가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인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삶 자체로 작은 자에 대한 보살핌의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합니다. 곧 기독론적 인식보다 실천의 중요성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림에 대하여 종말의 때에만 관심을 두거나 심판자체에만 역점을 두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 혹은 종말론이 왜곡되어짐에 틀림없겠습니다. 오늘의 본문해석처럼 일상적 삶에서의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바로 종말의 최후의 심판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삶이 결국은 잘못된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힘이 된다는 종말론의 이야기를 새롭게 한다면 예수의 재림사상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을 종말론적으로 맞이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질 듯합니다. 나중에 일어날 이상적인 새로운 날을 지금 앞당겨 현실화시켜 지금 현재를 새롭게 만드는 사건으로서의 종말, 그리고 그 사건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를 맞는 성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뉴비긴의 재림신앙 이해와 김창락 교수의 본문 해석에 의존하여 이 성탄절의 종말론적 의미를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그 하나는 종말론적 관심은 현재의 왜곡된 세상을 새로이 하는, 새 세상이 현재 일어 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절망적이고 다른 희망이 없다고 하여도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삶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벼랑에 서서 더 나갈 길이 없다고 할 때 우리가 전혀 생각지 아니한 방법으로 새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오늘 본문의 해석에 의한 종말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에 의미를 두고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림의 마지막 때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사실은 종말사상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삶이 전적으로 종말론적 삶을 사는 것이어야 하겠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자신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며 이웃사랑을 체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종말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일상적으로 선한 삶,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삶을 하는 것이 종말론적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12월은 성탄의 기쁨을 생각함과 함께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도 참으로 다사다난 하였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2004년의 끝자락에 서서 그동안 빚어온 우리사회를 돌아봅니다. 온갖 정치적 갈등과 대립, 끝 모르고 때 모르는 색깔논쟁의 비극, 경제적 불황 속의 고통, 불평등의 심화와 가난한 자들의 절망,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 테러의 증가, 미국 패권주의의 횡행, 수많은 죽음과 굶주림에 내몰린 이라크의 비참함, 힘없는 자들의 죽임과 억압당함 등의 사건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새 질서, 새 세상이 오기를 갈망합니다. 새길공동체도 참 다사다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서문자, 우명미 두 자매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환송해야 했고, 이명섭 형제, 이옥순 자매, 그리고 홍현심 자매는 오늘도 투병하며 새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질병과 죽음, 생명, 이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무능함 등에 대하여 올 한해만큼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편 우리 공동체는 우리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신구 세대 혹은 교우들 간의 갈등, 그리고 교회운영방식에 대한 갈등 등으로 서로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 우리 각 개인의 삶을 되돌아보면 얼마나 숱한 사연들이 절절하겠습니까?


이 성탄의 계절에 한해를 돌아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가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이 성탄에 우리 이런 믿음으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하나 ―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날들이었어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가 함께 하였음에 감사하고 그리고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하나님이 새 날을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가지기, 둘 ―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도 그리고 종말을 생각하는 것도 어느 것이든 그 중심은 현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오늘을 어떻게 얼마나 의미있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지난날에 매임도 아니고 불투명한 미래만 바라봄도 아닌 오늘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를 하면서 살기, 그리고 셋 ― 종말론적 삶을 살기 곧 자기성찰과 이웃사랑을 일상적으로 체현하며 살기, 이런 마음으로 이런 삶을 실천한다면 재림하는 예수를 맞는 성탄을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칼 라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라고들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시’라는 말이 우리를 오도합니다. 재림은 ‘또 한 번’ 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희 곁에서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존을 영원한 거처로 삼으셨기 때문에 저희와 늘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그 사실이 거듭하여 더 분명하게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어 모든 것을 품에 안으심으로 만사의 중심이 이미 변화되었음이 더 분명하게 세상에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유난히 힘들었던 올 한해 우리사회를, 우리 공동체를, 그리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맞는 이번 성탄절은 오늘 본문의 비유에 대한 해석과 같은 종말론적으로 이야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이렇게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이 성탄절에 우리 곁에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을 새로운 질서로,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만드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오늘 하루를 소중히 생각하고 이 날을 의미 있게 만드는 삶을 살게 하소서. 작은 이웃을 돌아보며 섬기는 삶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새로운 시간을 가지고 오시는 당신을 기다리는 믿음을 주소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사회의 벼랑 끝에서도 우리가 예기치 않은 전혀 새로운 사건으로 오시는 재림의 예수를 기다리고 만나게 하소서. 내 삶의 지극한 고통과 고독 속에서도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당신의 새로운 날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당신을 기다리게 하소서.


임마누엘 예수님 우리의 거처에 늘 함께 하소서.


다시 오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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