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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새길교회 말씀증거













2004. 8. 29.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출애굽기
3:1~12]
 


김경호 목사 



  
 

오늘 본문은 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히브리민족을 구원하여 내라는 소명을 받는 말씀입니다. 이 장면은 야훼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처음 계시되고 새역사가 시작되는 매우 중요한 컷트입니다. 이 본문 중에도 특히 하나님께서 구원 의지를 밝히시는 7-8절은 특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과정이 6개의 동사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동사는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7절)에 나오는 "본다(ra'ah)"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단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나 광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하나님께서 보시는 행위로 시작됩니다. 관심있게 우리의 아픔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내게 와 닿고 그분이 나를 보시기 시작할 때 새로운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주목하고 응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시고 우리들이 가진 그 문제 속으로 새로운 해결을 향해 들어오시는 첫 행위가 우리를 보시는 것입니다.


다윈은 “어떤 꽃도 그것을 보는 눈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꽃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는 곤충, 동물, 인간의 눈으로 인해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화해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꽃은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과 영향을 받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시각대로 세상은 변화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로 구성된 새길 공동체의 사명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동사는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7절)"에 "듣다(shama')"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어떤 때 들으십니까?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교회를 통해서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괴로워서 부르짖을 때(tsa'aq)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표현은 교회의 전통이 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서를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통로로 기도보다는 이 "부르짖는다(tsa'aq)"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히브리 사람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늘 하나님은 그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반응하십니다. 출22장 22절에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tsa'aq),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나는 분노를 터뜨려서 너희를 칼로 죽이겠다. 그렇게 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며, 너희 자식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야훼 하나님은 고아나 과부가 부르짖으면 듣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은 계속해서 성서에서 나오는 주제입니다.


아마 교회의 전통은 이 부르짖음을 음성적 부르짖음으로 이해하고 기도라는 종교적 행위로 제한시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르짖음은 음성적, 언어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당하는 억압과 고통, 그 눈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라는 종교적 행위만으로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그 자체를 들으십니다. 고통 자체가 기도이며 인간이 고통당하는 그것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오는 소리이고 우리들의 생활 속에 나오는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동사는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yada')"에서 동사 "안다"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동사는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말이 남녀간에 쓰이면 이것은 성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정도의 깊은 앎을 말합니다. 몸으로 비비고 부딪혀서 속속들이 안다. 낮낮이 체험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피상적으로 알지 않으십니다. 남녀가 깊은 성적관계를 맺고 서로를 낱낱이 알듯이 그렇게 우리를 아신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 동사는 이제 내가 "내려가서"입니다. 세 번째 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들으시고 낱낱이 아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행동은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내려오십니다. 이렇게 오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면 그다음 새로운 관계가 열립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가 서로 통할 수 있는 마음의 근본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사물과 통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웃과도 통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도 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웃과 통하는 창구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가 남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남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를 또한 불쌍히 여기고 그를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완벽하고 너무 똑똑하고 너무 철저한 사람에게는 그리 정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인간은 이 sympathy를 통해서 연대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형제, 자매와 연대하고 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은 이 sympathy의 구조에서 찾아야합니다. 이 sympathy, compassion은 함께 느끼는 마음이고, 함께 느끼는 정서입니다.


고대 로마는 엄격한 계급제에 근거한 사회이고 철저한 노예들의 노동과 희생위에 서있는 사회이므로 이 sympathy의 마음을 차단해야 했습니다. sympathy는 저급한 정서이고 천박한 정서라고 했습니다. 반면 그 반대인 apathy를 찬양하고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정서로 여겼습니다.


희랍철학에 의하면 최고의 신은 apathy한 신, 즉 무격정 무감각의 신입니다. 그는 절대자유, 불편부당(不偏不黨), 인간의 삶과 사회에 초탈하고 초월한 신입니다. 이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죽음으로 비로소 해방을 얻는다고 여기기에 인간의 출생, 육체, 감각, 감정, 삶 등은 사실상 부정됩니다.


이들은 육체/영혼, 그림자/이데아, 이세상/저세상, 세속/거룩 등등 모든 것을 이원화시키고 대립시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이것의 속셈은 진리가 나의 현실생활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불합리한 모순구조 속에 이미 누릴 것을 누리는 기득권자 들이 현재의 모순구조를 영구화하고 그들의 것에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지배자들은 변혁과 변화, 진리에 의한 양심의 울림을 저세상의 울타리 넘어로 몰아내는 논리를 계속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희랍철학에 의해 영향을 받은 기독교 최초의 이단인 영지주의 자들은 기독교인이면서도 구약의 야훼신은 최고의 신에서 12단계 낮은 단계로 분화해온 한 여신의 사생아를 Demiurgos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천박한 물질의 세상인 천지를 창조하였고 인간의 천박한 정서에 함께 울고 웃으며 동조했습니다. 야훼는 때로는 질투하기도하고, 신이 질투한다는 것은 그만큼 단계가 낮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영역이 분명하다는 한계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듣고 그에 초연하지 못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개입하여 신의 초월하고 도인다운 경지를 파괴하고 스스로 격정 가운데 거하는 천박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지주의는 희랍의 개념을 따라 격정없는 순수 지적, 영적인 영역을 최고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영지주의를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이단으로 정죄하였지만 결국에는 희랍철학에 바탕을 둔 서양인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또한 기독교가 최고의 권력의 자리를 누리다 보니 결국은 희랍철학의 형이상학적 논리를 따라 기독교를 명상의 종교, 세상과 초월하여 도 닦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역사적 현장과는 동떨어진 ‘예수를 유배시키고 팔아먹은 기독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내려간다’는 주제는 구약에서는 ‘임마누엘 신앙’으로, 신약시대에는 ‘성육신 신앙’으로 발전하는 성서신학의 중요한 맥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라 합니다. 이 신앙은 하늘보고 신을 섬기며 모든 것을 종교화 하는 세상의 종교에 일대 획을 그어놓은 혁명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이 되셨으니 이제는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들 주변에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끊임없이 기독교를 종교화시키고 예수는 다시 하늘로 쫒아버렸으며 그를 구름에 뜬 도깨비 예수, 종교의 진열장 안에 박제하여 가두어 놓은 존재로 변질 시켜버렸습니다. 교회는 계속 내려오신 그분을 다시 하늘로 쫒아 버리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


 


다섯 번째 동사는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에 구한다는 동사입니다. 구원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큰 주제이고 교회를 통해 우리가 여러 번 강조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여섯번째 동사는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8절)"에 데려 간다는 동사입니다. 이것 역시 교회의 전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곳, 하늘나라, 내세, 천국.... 등등 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이며 기독교의 핵심적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국교회가 오해하듯이 저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변화된 세계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의 중심주제인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주기도에서 보듯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시며, 나라이(가) 임하옵시며”입니다.





여기 이 여섯 동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전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단계적 동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섯, 여섯 번째 동사는 제가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원의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구원의 과정이 동반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통속적 기독교는 이 세상 고통과 아픔에 참여하고 그들의 문제를 보고, 듣고, 알고, 그들 가운데 내려가는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이것이 sympathy를 구체화 시켜가는 중요한 과정인데 이것을 교회의 전통은 생략했습니다. 단지 다섯 여섯째의 구원과 천국만을 강조하다보니 복음은 하늘에 떠 있는 도깨비가 되었고 구원을 아무런 구체성 없는 말의 성찬, 지극히 추상적, 심리적 효과만을 가져오는 감상적인 기독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모세는 말합니다. 그건 알겠는데, 왜 하필 나냐?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11절)라고 반문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보장이나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후에 이사야에 의해 임마누엘 예언으로 반복됩니다.


'에이 편하게 살지, 내 앞가림도 힘든데, 나를 죽이려고 했던 땅에서 겨우 도망쳐 이제 이곳에서 새 가정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다시 그 살기가 가득한 땅으로 돌아가? 더군다나 그들에게 노예가 어떤 존재인데 그들을 그냥 내 놓으라고 외쳐? 어림도 없는 이야기...  사실 나는 운 좋게도 파라오의 딸에 의해 키워졌고 어쩌면 왕실에서 파라오의 권력의 그늘에서 그 버금가는 자리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평생 초호화판 생활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날따라 일진이 나빠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게 된 그 놈의 히브리 노예 편을 드는 바람에 이렇게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는데 한번이면 족하지 두 번씩이나 내 자리를 차버려?“라고 말하면서 모세가 모든 것을 묵살했다면 하나님도 안보고, 그의 명령도 안들은 것으로 했다면, 만약 모세가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그랬다면 우리역사에서 출애굽도 없고, 이스라엘도 없고, 야훼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없고, 성서도 존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도 없고 가나안의 새하늘 새 땅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도 없고, 교회도 없고, 여러분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번은 중국의 황제가 행차를 나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고 엎드려 있는데 한 염소가 감히 황제 앞에서 아주 큰 소리로 울어댔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아주 처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황제는 물었습니다.


“저 염소가 왜 이리 슬피 우는 거냐?”


“예, 폐하 저 염소는 지금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 끌려가는 길입니다”


“그래, 그럼 저 염소를 살려주어라, 불쌍하구나”


“그런데 폐하, 저 염소와 같이 하루에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이 수천마리에 해당합니다.” 이런 답변을 듣고 황제는 말합니다.


“그래, 그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저 염소는 다르다. 그는 지금 내 눈에 뜨였다.”





지식인들이 너무 많이 알기에 오히려 선뜻 일에 나서지 못합니다. 나 하나 나서야 무슨 도움이라도 되겠는가?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에 뜨인 것, 내 앞에 벌어지는 일들은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억울함과 고통이 있는 곳, 그들의 소리를 듣고, 가서 자세히 보고, 그들의 아픔을 샅샅이 알고, 함께 느끼며 그 자리에 내려가는 일들을 결코 생략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제한시키고, 부담을 주고, 힘들게 할지라도 그 구원의 전 과정을 결코 생략치 말기를 마랍니다. 앉은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쉽게 누릴 수 있는 싸구려 구원을 선포하는데 결코 만족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느 과정 하나라도 귀찮다고, 거절하지 말고 전 구원의 과정을 충실하게 따라 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망설이고 주저하고 한 없이 약하고 왜소해 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가라 바로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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