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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2004.07.29 10:17

[2004. 7.25] "쉼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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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의 저항

새길교회 말씀증거













2004. 7. 25.





 

쉼의
저항
[창세기
2:1-3, 출애굽기 20:8]
 
 


최만자 자매 


 
   우리 삶에 만약 ‘쉼’이 없다면 얼마나 고단하고 괴로운 삶이 되겠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을 제정한 인간의 문화 속에 담긴 이 제도는 참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이미 다른 나라들에서는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여 쉼의 시간을 더하여 왔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주 오일 근무제를 확정하여 나가는 과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쉬는 시간을 더하여 가는 것은 그만큼 과중한 일을 감당해야하는 사회구조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전보다 더 큰 부담을 가지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요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집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이 생존과 소유를 위한 노동에만 소모되는 것이 결코 잘사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커진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지금 휴가철을 맞아 우리는 모처럼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쉼을 즐기고 있는 계절입니다만, 이미 주 5일 근무제가 서서히 확장되면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것이 레져 산업이라 하겠습니다. 여기 저기 팬션하우스가 넘치게 건설되고 곳곳에 즐기기 위한 시설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요즈음은 웰빙 시대라 하면서 ‘잘살기’를 보장해 준다는 온갖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인데도 잘못 산다면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무능 탓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쉬는 시간도 많아지고 잘살기 상품과 정보도 풍성하니 이제 걱정할 것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여유로와지고 세상은 더 평화스러우며 조화를 이루어나갈 것 같은데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복잡하고 삭막하기만 합니다.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한 고전평론가는 서점가에 불고 있는 웰빙 바람의 철학적 기반이 에피쿠로스라는 말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직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질주하다 이제야 비로소 지금, 여기를 적극 향유하게  되었나 보다하는 기대감이 앞섰답니다. 그래서 서점의 홈페이지에 뜬 웰빙페스티발이라는 이벤트를 클릭해 보았더니 거기에 나온 웰빙 전략 네가지는 1. 마음의 평안, 2. 돈을 쉽게 빨리 버는 법, 3. 날씬하고 건강한 몸, 4. 해외여행 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요가와 명상, 유기농 야채를 먹고 해외여행을 즐기면서 행복을 구가하려는 것이 오늘의 휴식법이고 잘살기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상업화된 웰빙은 자신을 위하여 자기 몸에 이로운 것은 다 해서 얻게 되는 지극히 개인의 소유욕과 이기적 건강유지 방법으로 치장되어 나온 상품이 되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일반적으로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는 천박한 쾌락주의자로 취급되어 오해받기도 했습니다만 그 철학의 내용은 그의 아타락시아(평정) 개념은 덜 채워진 상태에서의 기쁨의 향유를 추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소유의 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무소유를 더 행복으로 지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증식을 위해 집착하는 웰빙 산업에 그의 철학을 기반으로 운운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지금 그에게 웰빙 전략을 묻는다면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삶을 최대한 향유하라.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그다음 벗들을 불러 모아 우정의 연대를 실천하라. 비움과 열림이 행복의 크기를 결정해 줄 것 이라고 말 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사회에 파도치는 휴식이나 잘살기 물결은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을 모두 가질 것입니다. 저는 외국에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제가 1967년에 일본을 간 적이 있는데 하꼬네라는 유명한 온천 지역이었습니다. 그 후 33년을 지나 2000년에 또 같은 곳을 방문했는데 그 지역이 전혀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요란한 호텔도 없고 숲 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모텔들이 조용히 여행객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금만 경관이 좋다고 생각되는 곳은 방방곡곡 버젓이 어찌 그리도 수많은 러브호텔이 지어지며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주위자연환경은 계속 황폐화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웬만큼 알려진 유원지 들은 쉼을 위한 곳이 아니라 아귀다툼을 하는 전쟁터 같이 됩니다. 해마다 휴식을 위한 휴가철은 부도덕한 상혼과의 전쟁이고 온 국토는 신음하게 되는 고통의 시간이 됩니다. 진정한 쉼은 없고 쉬기 위한 전쟁을 하는 듯합니다. 어디 여행 못가면 죽을 사람들 같이 다녀야 하고 여행을 가서는 혼신을 다해 놀이를 합니다.


   진정한 쉼, 잘 쉬는 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은 우리사회 의식을 한층 높여 제대로 살게 하는 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많은 쉼의 시간들이 주어질 가능성이 열린 시점에 우리가 쉼, 잘살기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내일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쉼이 보다 차원 높은 방향으로 구조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천박한 쾌락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며 온 사회는 이로 인해 피폐해질 것입니다. 성서에는 안식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쉼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서 오늘 우리의 쉼의 방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안식일 제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쉼의 사상이 중요하게 담겨있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들에 안식일에 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사업의 완성으로 안식일이 제정되고 있고,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해방사건 후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갈 지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십계명 중의 한 계명으로 제도화되고 있습니다.  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하나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계명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서가 이렇게 안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있어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해가 신학적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안식일 제정의 기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학자들은 정확한 기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말의 유사함에서 바빌론의 ‘샤밭 투’라는 날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도 보는데 그러나 바빌론의 샤밭 투는 만월의 날 월신과 관련된 신들에게 예배드리는 날이었고 이날들을 불운의 날로 간주하여 금식하며 슬퍼하였고 즐거워하거나 기뻐하는 일을 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의 안식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의 안식일은 히브리 고유한 신학적 특징을 가지고 발전된 사상이요 제도라고 보면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로 창조를 하신 후 칠일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창세기 이 구절에서는 인간도 쉬어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가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쉬셨고 일주일 가운데 한 날을 쉬는 날로 제정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쉼이 강조되고 있는데 히브리어 샤바트는 쉰다(rest)는 의미가 아니라 ‘일을 중단한다’(to cease from)는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에릭 프롬은 안식일은 소유를 위한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직 우리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날이라 하였는데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라 생각하지만 소유를 위한 욕망을 단절하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쉴 줄 모르고 일에 몰두한 인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여 생명력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날을 말합니다. 인간의 탐욕적 욕망을 단하는 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는 바로 중단을 모르고 발전, 성장을 향하여 질주하는 탱크 같은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중단할 수 있는 영성과 실천이 절대 요청되고 있습니다. 소유를 위한 삶을 중단하는 안식일의 의미를 현대인의 삶에 적극 확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거나 불꽃놀이를 하고 기분전환을 하는 그런 날이 아니라 흐트러진 우리 삶을 수선하는 날입니다. 정신이 없는 휴식은 타락의 원천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날을 구별하여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거룩성과 축복 그리고 안식의 기쁨은 안식일의 제정이 두 가지 사건에 기초하고 있는데서 찾게 됩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행하신 히브리민족의 출애굽 해방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을 창조한 후 첫날에 하나님은 안식을 선포하시고 그 날을 구별합니다. 그래서 안식은 창조질서가 됩니다. 창조질서 속에 있는 안식의 날은 창조의 근원, 내 생명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 삶의 초월적 차원을 말해 줍니다. 일상적 다른 날들과 구별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숙고하는 날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이날을 철저히 지킵니다. 이날은 생활도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속된 것에서 이탈하고 일상의무에서 벗어나 오직 생명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합니다. 이 날은 모든 인간 삶의 도구를 초월하고 그것들을 넘어선 세계를 명상하고 대화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일주일 내내 죄짓고 이날만 거룩하여 죄사함 받는 것인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날은 모든 속된 것들의 성화를 위하여 노력하며, 모든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추구하며, 영원한 존재와 영원의 시간에 잇대기 위한 삶의 차원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이 초월의 차원이 상실된 데서 고향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이 된 것 같아 보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경악케 하는 20명  이상의 살인사건도 바로 이러한 초월적 차원을  상실한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성서의 안식일은 영원의 시간을 교류하는 쉼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출애굽 사건에 기초한 안식일의 의미는 신명기 5:15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안식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여 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노예경험과 파라오의 억압으로부터 탈출시킨 하나님의 해방 행위에 근거한 쉼을 말합니다. 노예생활은 쉼이 없는 것이었고 생명을 앗아가는 상태를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쓰러져 가는 동료들을 옆에서 수없이 보면서 쉼이 생명의 존엄을 지켜주는 힘인 것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에 기초한 쉼은 보다 사회적 사건에 포함되는 쉼의 문제입니다. 최소한 제7일조차도 휴식할 수 없는 자는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자 이며, 인간이 창조된 첫날에 하나님이 휴식을 선포하셨다는 안식일 선언은 인간생명의 존엄과 인간의 기본권리를 보장하고 인간을 얽어 맨 모든 매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인간 해방과 인권 수호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쉴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쉼의 제도입니다. 주인은 아무 때나 쉴 수 있지만 노예는 그럴 수 없습니다. 피고용인들의 쉼을 위한 투쟁은 성서적이며 인간생명의 존중과 인간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임을 성서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곧 이날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 하여 쉬는 쉼의 날입니다. 끝날 줄 모르는 고된 수고로부터 한 숨을 돌리게 해 주는 생명유지의 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제정은 인간 생명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은총의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시대 유대사회는 안식일을 율법화하고 지나친 세부 규정들로 사람을 얽매여 오히려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한 유대인 신학자는 말하기를 ‘토라에 의하면 사람이 생명을 보존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사람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매우 경미한 가능성만 보인다 해도 그 생명을 위하여 우리는 안식일 율법의 모든 금지 조항을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현대의 유대교도 안식일에 대한 이해에 변화를 가지고 있음을 반영해 줍니다.


  


   인간생명을 우선하고 쉼이 먼저라는 이러한 안식일 사상은 쉬지 않고 일해야만 생이 보장되며 발전되고 인간의 행복이 찾아온다는 일반적 이해와 적대적인 사고입니다. 사람은 쉴 권리를 가지고 세상에 나왔고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노예라도) 쉼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복되고 즐거운 날입니다.  제3 이사야는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 하느라 안식일을 짓밟지 말라, 안식일은 기쁜날, 야훼께 바친 귀한 날이라 불러라. 그 날을 존중하여 여행도 하지 말고 돈벌이도 하지 말고 빈말을 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는 야훼 앞에서 기쁨을 누리리라. (이사야 58:13-14)





   이렇게 이스라엘의 안식일 제도는 특수한 신학적 (출20:11), 사회적(신명 5:15) 배경을 갖고 있으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학기를 요구하는 의미는  쉼과 자유, 그리고 해방과 생의 즐거움을 갈구하는 우리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안식일 의미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에 이 안식일 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 졌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성공하고 더 많이 발전하기 위해서 그칠 줄 모르는 경쟁적 삶의 방식으로 중단 없이 질주하는 현대인의 삶에 안식일의 쉼의 정신이 정말 필요합니다.


   보다 많이 소유하려고 하고 보다 더 발전되려고 하고 보다 더 강해지려고 하는 삶에서는 오히려 삶의 여유도 쉼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율법주의 적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강조하면서 정작 안식일에 모인 무리에게 더 부해지고 더 발전하고 더 강해지는 것 곧 기독교 승리주의를 주입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현대사회의 발전과 성장논리에 의해 우리 삶을 지배당해 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승리주의는 여기에 딱 맞는 신앙을 제공하였습니다. 더 앞서야하고 더 빨라야하고 더 효율적이어야 하고, 더 커야 하고 더 강해야만 제대로 신의 축복받는 삶을 하는 것이라고 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안식일 사상은 그러한 발전의 논리와는 지극히 상반됩니다. 하나님은 발전을 중단하고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라고 쉼의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이 창조주와 교류되는 영성을 가지는 온전한 생명의 존재라고 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보다 느리게, 보다 게으르게, 보다 적게 소유하며 여유롭고 단순한 삶의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 적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는 성장논리의 삶에 저항하는 힘으로 생명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성장논리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생명 중심의 세상으로 전환하는 작용을 합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삶은 지금 쉼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그들과 연대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하여 조금도 쉴 수 없는 이들, 거대한 세력 앞에 쉼을 착취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안식일의 자유와 해방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예수 따르미의 길입니다. 이 또한 거대한 저항의 쉼입니다.


  


   오염된 휴식이 난무하고 잘살기의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그리고 끝없이 소유에만 집착하여 쉼을 상실한 병에 걸린 사람들, 그리고 또 아직도 힘없고 약한 자  들이 고된 노동으로부터 혹은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쉼을 착취당하고 있는 모순된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서의 안식일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매우 소중한 치유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보다 덜 가지려 애쓰면서 내 생명의 근원과 대화하고 그 앞에서 나를 성찰하는 명상의 삶을 하는 것, 그리고 쉴 수 없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삶을 추구하는 데서 우리는 오늘의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소극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저항적인 삶을 사는 길이며 예수를 따르는 삶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현대의 삶에서 성서의 안식일 사상은 새롭게 조명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매우 의미 깊게 들은 한 미국인과 멕시코 어부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들 대화를 통해 단순한 삶을 다시 생각해 보며, 오늘의 우리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한 미국 사업가가 멕시코의 어느 마을 작은 해변 가 방파제에서 한 멕시코 어부가 그의 작은 배를 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작은 배안에는 제법 커다란 노란지느러미 연어가 여러 마리 잡혀있었다. 그 미국인은 좋은 생선을 잡았다고 칭찬을 널어놓으면서 그 고기들을 잡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가를 물었다. 멕시코인은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미국인은 왜 더 오래 더 많은 고기를 잡지 않느냐고 물었다. 멕시코 어부는 이 정도면 우리 가족의 하루 살기에 충분한 분량이라고 답했다. 미국인은 또 물었다. 그렇지만 남는 시간들은 무엇하고 지낼 것이냐? 멕시코 어부는 ‘늦잠자고, 고기 좀 잡고, 아이들과 같이 놀고, 아내와 낮잠을 자고, 매일저녁 마을에 어슬렁거리며 가서 와인 한잔하고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지내지요,’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는 생활이라고 했다. 미국인은 냉소를 보내면서 ’나는 하바드 MBA 출신이요, 당신을 도울 수 있소, 좀더 많은 시간 고기를 잡아 더 큰 배를 사고, 계속하여 여러 척 배를 산 다음에 커 다란 어선을 가지게 될 것이요, 당신이 잡은 고기를 중간 도매인에게 넘김 없이 직접 구매자에게 팔고 당신 자신의 통조림 공장도 가질 수 있고, 생산, 과정, 분배를 당신이 다 통제할 수 있소, 이 작은 해변의 어촌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가서 살게 될 거고 그 다음엔 LA로 그다음엔 당신의 기업이 확장되어 있는 NYC로 가게 될 것이요.‘





   멕시코 어부가 물었다. ‘이런 일들은 얼마나 걸릴까요?’ 미국인은 한 15-20년이 걸릴걸요 라고 답했다. 멕시코 어부는 되묻기를 ‘그 다음엔 뭘 하지요?’ 미국인이 웃으며 답하였다. ‘그것이 바로 최상의 것인데 그때에는 당신 회사 주식을 공개로 팔고 부자가 될 것이요, 아마 백만장자가.’  멕시코인은 ‘백만 장자요? 그다음엔 무엇이지요?’ 하고 물었다. 미국인은 답하기를 그다음엔 은퇴하여 어느 작은 해변 어촌에 와서 늦잠자고, 고기나 슬슬 잡고, 아이들과 놀고, 당신 아내와 낮잠을 즐기고, 저녁에 어슬렁거리며 마을에 가서 와인 한잔하고 당신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놀면 되지요. 




 

   새길 자매 형제 여러분, 성장논리에 빠져있고 참된 쉼을 모르고 살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의 삶의 스타일을 안식일적인 여유와 단순함, 생명의 근원과 대화하는 삶의 스타일로 바꾸는(쉼의 문화전환) 일을 적극 실천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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