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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십자가를 거쳐 생명의 나무로"

(성서본문: 요한계시록 22:1∼5)

 

1998.10.04

 권진관 형제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

- 요한계시록 22:1∼5


 


  본문에는 생명나무와 생명의 강이 나오고 있는데, 오늘은 생명나무에 관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부분이자 종말의 일을 기록한 계시록은 생명나무와 생명의 강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따지고 보면 성경 첫 부분에 나오는 에덴 동산의 모습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야훼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에 두 가지 종류의 나무가 돋아나게 했는데, 그것은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생명의 나무에 대해서는 그 이후 성서가 함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 어느 구석을 찾아보아도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 맨 끝장인 22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자주 언급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선악과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주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이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사실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계시록 22장의 이야기는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계시록은 새로운 도시인 새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는 대신, 창세기 2장은 목가적인 풍경인 에덴동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도시는 오늘날 서울이나 뉴욕과 같은 도시가 아니라, 전원도시에 가깝습니다. 생명나무가 우거지고, 생명수를 공급하는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도 생명나무와 강이 있습니다.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시었고, 그 강은 다시 네 줄기로 갈라져서, 첫째 강줄기는 금과 은이 많이 나는 땅을 지나는 비손이라는 강이고, 두 번째의 강은 기혼이라고 하고, 셋째 강은 오늘날에도 있는 티그리스 강이고, 넷째의 강은 유프라데스 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네 개의 강은 에덴동산 바깥의 세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에덴동산과 매우 흡사합니다. 양쪽 모두 생명나무가 있었고, 또 그곳을 적시며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다른 점은 새 예루살렘에는 선악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선악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선악과는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좋고 도움이 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나쁜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그것을 따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미래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새 예루살렘에는 왜 선악과의 나무가 제거되었을까요?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오히려 찬양하면서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한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깊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은 문제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뱀이 있습니다만, 그 뱀을 영어로 말할 때 일반적인 뱀인 snake가 아니라 크고 강하고 독이 있는 용에 가까운 뱀을 의미하는 serpent라고 성서에는 나오고 있습니다. 원래 써펜트라고 불리는 뱀은 독성이 강하고 크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능력 즉 독이나 힘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예사일텐데 여기에서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머리를 써서 인간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도 그것이 두려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써펜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희랍신화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나무를 얻기 위해서 모험하는 영웅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은 이러한 강대한 뱀을 만나서 싸웠습니다.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은 많은 괴물들과 싸워서 결국 생명의 나무가 있는 헤스페리테스의 정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는 생명나무에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뱀이나 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이러한 희랍적인 영웅의 이야기들과는 아주 다르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써펜트가 나오지만 그것과 대화하고 있는 인류의 조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힘보다는 정신력, 또는 의지가 더 큰 문제이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희랍사람들은 써펜트와 싸우는 영웅의 힘과 기예와 용기에 관심을 가졌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의 다른 측면 즉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정신적인 면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발견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정신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인류의 문명이 좌우된다는 경고의 가르침이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습니다. 영웅의 신체적인 힘이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정신이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생명의 나무의 열매까지 따먹는다면 인류는 모두 신적인 존재가 된다고 보는 것인데, 그 신이 선한 신이면 좋은데 악신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이 이야기 속에 깔려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변화나 정신의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속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거치도록 하기 위해서 또 다른 나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입니다. 십자가는 생명나무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서 마른나무입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나무인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종말의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그 새로운 나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생명나무에의 접근은 금지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나님은 동쪽에 거릅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생명의 나무가 있는 약속과 종말의 나라, 새 예루살렘은 인류가 들어가야 할 목표요, 이상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찬송가 471장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기독교의 역설은 십자가 속에서 생명을 찾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십자가를 거쳐야만 된다는 역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려야 우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씀, 우리가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의 나라인 종말을 미리 보여주는 계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설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다음은 1986년 군사독재 하에서 학도군사훈련을 반대해 농성 시위하던 중에 경찰의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몸에 신나를 뿌리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분신사한 서울대학 4학년생이며 자연과학 학생회장이었던 김세진군의 어머니 김순정씨의 글입니다. 이 글은 당시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이 분신한 것을 '죽음의 세력'에 영합한 자살 충동적 행위라고 사회각계와 언론에서 비난하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여 어머니가 아들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내가 죽나요?"하고 묻던 그 얼굴이 지금도 내 눈에 뚜렷하다. 남들이 '투사'라고 말하는 내 아들은 죽음을 바라지 않고 있음을 이 어머니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세진이는 "나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요"하고 말했다. 세진이는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죽어도 좋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 헤어나 보려는 생존의 욕구와 죽어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이상의 욕구, 이 둘 사이의 무자비한 충돌,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아들 세진이었다. 만신창이로 불타버린 몸으로도 강렬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나는 내 아들의 목소리로 생생히 들었다. 그러나 내 아들의 뜨거운 의지도 '후회하지 않을' 그 무엇 앞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무엇이었을까? 내 아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목숨과 맞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진이는 제 몸에 불을 붙였다. 죽기 위해 제 몸에 불을 붙인 게 아니다! 내 아들은 '살기 위하여, 올바르게 살기 위하여' 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진이 어머니 김순정씨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맺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처절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마리아와 같이 돌무덤에서 부활을 믿고 기다린 마리아와 같이 확신의 신념을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겸허하게 안고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동학의 지도자 해월 최시형 선생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도를 깨닫는 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신학자가 죽음과 십자가의 진실에 대해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김순정씨 만큼 바르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을까 묵상해 봅니다. 아들을 낳았고 또 젊은 아들의 죽음을 겪은 어머니는 이미 성서의 가르침의 중심을 꿰뚫었고, 십자가 신앙의 신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과 같이 좋은 날에 어려운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러한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낙관적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조심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야고보4:9)


  지난날 우리 나라는 근심하지 않고 미래를 장미 빛으로 낙관하다가 IMF 구제금융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웃음과 기쁨을 슬픔과 근심으로 바꾸어 보는 슬기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낙관적이었고, 너무나 자제하지 못하고 흥청거렸고, 긴장이 풀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긴장이 있을 때에만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십자가의 거듭남으로 새로운 생명이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낙관적인 세계관, 그것에 기초한 탐욕을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을 이끄는 화두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민중이라든가, 해방이라는 말이 화두였지만, 지금은 생명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는 새로운 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유토피아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사회를 우리는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생명을 가로막은 모든 질서가 사라지고 생명의 가능성을 극대화해 주는 새로운 사회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사회의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란 공해가 없는 아주 청정한 생명의 물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밀집된 도시 한 복판에 공해가 없는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요, 이상입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의 금지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마음놓고 생명의 열매를 먹을 수 있고, 또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된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나뭇잎의 용도는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으로 쓰여진다고 합니다. 이제 그 도시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생명의 열매를 먹어도 아무 저주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보며 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들을 다스리는 제사장이나 왕들이 없습니다. 그들이 직접 다스릴 것입니다. 평신자가 주인이 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교회와 세상을 말합니다. 성서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미래상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결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장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덴 동산입니다. 에덴 동산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세상을 여는 준비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새로운 도시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의 자연적인 동산입니다만, 예루살렘은 도시입니다. 도시는 인간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인간들 사이에 코이노니아, 친교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러한 코이노니아가 가지는 특징은 모든 사람이 함께 주인이 되어 함께 다스린다는 말씀에서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코이노니아는 함께 다스리는 데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그 밑에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명의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새길교회가 샛길로 빠지지 않는 것은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스리는 원리에 충실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에덴 동산에서 깨어진 인간들의 관계에서 이 새로운 주거공간인 새 예루살렘은 인간간의 코이노니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그런 전원도시와 같은 곳입니다. 이 두 개의 세계 사이에는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인류는 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도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상징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귀하게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의를 위한 고난과 가난, 자기 욕망에 대한 자제, 남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가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새로운 비전을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사모하고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실천할 때에만 우리가 새로운 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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