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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현식 교수


하나님 나라와 마치 아닌 듯한 태도

(마가복음 4:1-20 ; 고린도전서 7:20, 29-31)

 

 

20151115일 주일예배

전현식 교수(연세대학교 조직신학·문화신학)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바다 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바닷가 뭍에 있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 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 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왔지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길가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말씀이 뿌려질 때에 그들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 돌짝 밭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 마가복음 4:1-20 -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 고린도전서 7:20, 29-31 -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새길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씩 교회로부터 설교 초청을 받곤 하지만, 특히 오늘 평신도의 열린 공동체로 한국교회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새길교회에서 말씀의 나눔은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완상 교수님, 최만자 선생님, 권진관 교수님 등 한국 사회 및 교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시는 귀한 선생님들을 이곳에서 만나 뵙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또한 몇 주 전, 제가 일하는 저희 연세대학교 생태문화 융복합 센터 주최로 교회 생태계의 변화와 작은교회 운동이라는 주제로 이정배 교수님의 특강이 있었는데, 그 때 새길교회의 정경일 박사님이 논평을 해주셨습니다. 정경일 박사님의 논평 중, 종교개혁을 넘어 종교폐지를 통한 교회변혁이라는 평신도 관점의 전복적 진리를 깨닫고, 대형교회를 넘어 작은교회를 지향하는 한국교회의 생태계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탈주하여 작은교회를 지향하는 탈/향의 패러다임(관점) 전환 안에서 작은교회 운동은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을 통해 질적인 성숙과 평신도, 여성적 가치를 향하는 언더그라운드 공동체운동으로 정의하면서, 특히 성직자주의를 탈피하여 평신도의 열린 공동체로서 작은교회의 모범으로 새길교회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평신도 리더십과 열린 신앙공동체를 통해 한국교회의 생태계 변혁에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새길교회가 한국의 작은교회 운동의 모델이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초청해주신 교우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 나라와 마치 아닌듯한 태도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상업화와 사유화를 벗어나 어떻게 교회의 복음화와 공공성에 이를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교회의 공적 본성과 사명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즈음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세상의 복음화 이전에 교회의 복음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회의 복음화의 우선성 및 필연성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복음화란 교회의 공공성, 즉 교회의 공적 본성 및 사명의 회복 및 실천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교회의 복음화, 교회의 공공성의 내용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서 찾으며, 그 방법론을 바울의 마치 아닌듯한 태도에서 발견합니다.

 

우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이틀 전,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는 전 세계를 또 다시 공포와 슬픔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 어제 노동개악 및 국정화 반대를 위한 광화문 민중총궐기대회는 한국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 지구적 경쟁체제의 구조적 늪에 빠져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그리고 세계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은 한국사회 전체의 총체적 균열을 극명히 보여줍니다. 연애, 결혼 및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를 넘어, 대다수 많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계획과 꿈을 포기하는 다포(多抛) 세대의 증가의 현상을 소위 헬조선과 N포 세대라고 부릅니다. 지젝의 말을 빌리면, ‘자기-재귀적인 올가미(self-reflective loop)’에 걸려있는 제조된 위험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과학기술을 통한 한 가지 위험의 제거는 또 다른 더 큰 위험으로 되돌아오는 위험의 불투명성 및 증폭성, 그래서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질 수도 없는 대타자(사회의 법과 제도)의 붕괴의 현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거대한 늪으로 더 빠져 들어가는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현실세계의 위험사회의 모습, 우리는 헬조선과 N포세대의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근본적 이유는 인간 삶의 공적 토대가 되는 교회, 대학, 기업 및 국가라는 대표적 공적영역에서 공공성(公共性)의 결핍 및 상실에 있다고 봅니다. 한국사회 안에서 공공성의 상실의 뿌리는 효율성과 과도한 경쟁에 기초하여 개인이익의 극대화를 자기실현으로 포장하는 신자유주적 글로벌 정치경제체제의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개인의 삶은 본성적으로 타자의 삶에 근거한 공적인 삶(public life)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개인이 터하고 살아가는 모든 영역은 공적 영역이기 마련입니다. 한 마디로,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교회, 대학, 기업 및 국가라는 공공적 공간 안에서 공공성의 상실의 핵심은 공적영역의 개인화 내지는 사유화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공적영역 중에서 교회의 개인화 내지 사유화는 사회적 악인 동시에 종교적 죄입니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급격한 불신과 쇠퇴의 근원은 교회의 공적 본성과 사명을 상실한데 있습니다.

 

대타자의 붕괴, 즉 정치-경제, 종교-교육제도의 공공성의 상실은 우리를 사적 주체로, 우리의 삶을 사적인 원자적인 삶으로 만듭니다. 잘 아시는 대로, 공공성은 공적권력 및 권위, 공동이익 및 공동선, 개방성 및 투명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오늘 포스트모던 시대는 공적권위, 공동선, 개방성이 상실된 각자도생의 사적인 상호자멸적 상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를 냉소의 시대라고 흔히 말합니다. 근대시대는 사람들이 모르면서 행했다고 한다면, 오늘의 탈근대시대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하는 냉소적 시대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대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냉소의 시대, 냉소적 인간의 특징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로 사고의 상실입니다. 그 결과, 생각하기 싫어하고, 그래서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타자의 말과 요청을 외면합니다. 아주 냉소적입니다. 아렌트는 사고를 상실한 평범한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악을 저지르는 현실을 두고 악의 평범성이라고 질타했습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커다란 악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잡아놓고 그들을 평소에 알던 사람들이 하는 반응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그런 융악한 범죄를 저지를 줄 몰랐다는 겁니다. 예컨대, 참 조용하고 착한 사람 같았는데, 등과 같은 반응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악의 평범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정의와 공평에 대한 사고의 상실로 인하여 저지르는 악의 상황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니체가 비판한 약자의 도덕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니체는 인간을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고결한 자의 수치심선한자의 연민을 대립시키며, 후자의 도덕주의자를 약자의 도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고, 무기력한 앞발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는 자, 그들의 시혜의 에토스를 약자의 도덕이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선량하게만 살다 떠나지 말고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라고 일갈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 삶의 목표를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 더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는 것에 두었습니다.


저는 니체가 말한 더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는 삶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 안에서 발견합니다. 잠언의 지혜의 하나님이 외치는 정의와 공평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잠언 13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시장 골목에서 군중들에게 올바르고, 공평하고, 정직하게말하고 행동하라고 외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지혜의 하나님이 정의를 외치는 장소(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정의를 외치십니까? 권능의 하나님은 그 높은 보좌에서 정의를 호명 내지 명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하나님은 길거리, 광장, 시장 골목 등과 같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직접 내려오셔서 사람들 앞에, 사람들과 대면하여, 정의와 공평을 외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이 직접 군중들 앞에 내려오셨다는 것은 바로 그 외침의 긴급성, 중요성, 직접성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을 깨닫지 못하고,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자기를 따르는 군중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몰려 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그 비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동일한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만, 전달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들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박해가 생기면, 곧 넘어지는 자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옥토와 같은 사람들은 말씀을 받아들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의 밭(돌밭, 가시덤불, 옥토)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의 열매는 얼마나 될까요?

 

어떤 사람이 100점짜리 보람 있는 행복한 삶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고 합니다. 알파벳 A1, B2, Z26이라는 숫자를 부여하고 단어를 숫자로 환산했다고 합니다. 100점짜리 보람 있는 삶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노력(Hard-work)은 어떤 결실의 삶을 만들까요? 98점이었다고 합니다. 지식(knowledge)이 많으면 어떤 열매를 맺을 까요? 지식은 96점입니다. (money)은 어떨까요? 72점이었다고 합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가장 보람 있는 100점짜리 결실의 삶은 무엇일까요? attitude(태도)의 환산점수가 100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은 복음에 대한 태도가 아닙니까?

 

이것은 우리의 삶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옥토의 결실을 맺는 보람 있는 삶은 삶의 태도(관점), 즉 경청하는 태도, 타자에 주목하고, 자신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로 수용하는 것, 복음에 대한 경청입니다. 이 세상 안의 하나님의 나라는 선포되는 복음에 응답하는 인간의 마음의 밭(,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에 따라 다르게 실현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이 옥토와 같다면, 이 세상 안의 하나님 나라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진리는 관점이며, 진리의 자리는 관점의 변화라는 니체의 주장과 공명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리의 구체적 실천의 방법입니다. 저는 그 방법을 바울의 유보의 방법, 마치 아닌 듯한 태도에 주목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729절 이하에 보면, “우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마치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마치 아닌 듯한 유보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방법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구절은 상당히 오해되어 왔습니다. 마치 너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기존 권력의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라. 다시 말해, 타고 태어난 대로, 세상의 상징적 지위에 부름 받은 대로, 세상권력이 호명하는 대로 살아라. 세상이 너를 여자라고 말하면 여자로, 비정규직이라고 말하면 비정규직으로, 흙수저라고 말하면 흙수저로, 그대로 살아라. 교회가 평신도라고 말하면, 평신도로 그렇게 살아라. 그러나 다만 그 권력의 호명에 거리를 유지하라. 그래서 세상의 권력에 초연한 관찰자처럼 거리를 두고 무관심하게 살아라. 이렇게 말입니다. 바울의 유보의 태도는 이렇게 기존권력 및 위계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잘못 사용되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즈음 바울의 신학을 반복과 역설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급진적 사상가들(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은 바울신학의 급진성과 혁명성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바울의 마치 아닌 듯한 유보의 태도는 세상의 무익함으로부터 벗어난 초연한 관찰자의 세상 거리두기, ‘다 알고 있지만 마치 모르는 척 행동하는 냉소주의적 태도와 어떤 상관도 없으며, 오히려 이런 태도를 전복적으로 뒤집는 태도, 즉 내가 세상 안에서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살아가지만, 그 세상 안에서 그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 세상 안에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 세상자체를 변혁시키는 예언자적 저항적 태도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법을 준수하고 살지만, 그 법의 상징적 의무에 종속되지 않는 삶, 그런 태도를 바울은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의 법과 다르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정의에 응답하고 살아가는 그런 삶, 그래서 필요하다면 세상의 법에 저항하며 자기부정과 자기포기를 감수하며 살아가는 그런 수동성 안에 적극적 능동의 삶,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십자가의 삶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서 실현하는 바울의 유보적 태도의 대항적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목표를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 더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는 것에 두는 우리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지젝의 책(죽은 신을 위하여,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에 나오는 보스니아의 고전적 유머를 소개하며, 그 전복적 의미를 우리의 숙제로 남기면서 저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한 남자가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습니다. 친구는 뒷마당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었는데, 애거시, 샘 프러스 등 정상급 선수들이 그와 테니스를 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남자는 깜짝 놀라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너 테니스 별로 못 쳤잖아? 어떻게 이렇게 실력이 빨리 늘었어?”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 뒤에 있는 저 연못 보이지? 연못 안에 마법의 금붕어가 살고 있어. 금붕어에게 소원을 말하면, 금방 소원을 이룰 수 있어!” 이 남자는 곧장 연못으로 달려가 물고기에게 벽장을 돈으로 가득 채워달라고 빌고 나서는 집으로 달려가 벽장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벽장에서는 꿀이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남자는 친구에게 달려가 따졌습니다. “나는 돈(money)을 달라고 했지 꿀(honey)을 달라고 한 게 아니야!” 친구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 말해준다는 것을 깜빡했는데, 그 물고기는 귀가 잘 안 들려서 소원을 잘못 알아 들을 때가 있어. 내가 지금 이 바보 같은 시합을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얼마나 지겨워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진짜 소원이 아무렴 테니스(tennis) 실력이었겠어?”


이 농담은 상당한 전복적, 중층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에 제시된 것은 이렇습니다. “신은 있다. 신은 선하며 우리의 소원을 들어준다. 악의 근원, 우리의 불행의 근원은 다만 신이 귀가 잘 안 들려서 종종 우리의 기도를 오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 하나님의 욕망(하나님의 뜻)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욕망은 나의 욕망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타자의 욕망이다.” 나아가, 그것은 타자의 욕망의 불투명성과 나의 불안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중심테제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 농담의 전복적 역설적 의미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이 세상의 법의 폐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법의 성취라는 바울의 전복적 진리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 하나님께서 새길교회에 주신 소명(하나님의 욕망, )임을 깨닫고 그 일에 헌신하는 교우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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