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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차옥숭


이웃 생명들과 함께 하기

(창세기 8:21a, 9:9-15)

 

 

20151115일 주일예배

차옥숭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 창세기 8:21a -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 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나는 너희와 숨 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 창세기 9:9-15 -

 

 

 

 

오늘은 인간이 이웃생명들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둠 속에 승용차 하나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뭔가 슬쩍 던져놓고는

바람같이 사라진다

 

섬뜩하게 꿈틀대는 검은 물체

비척이며 일어선 그것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왔다갔다

어쩔 줄 모르고 허청거린다

 

잠시 후

어두운 골목길로 허둥허둥 사라지던

유기견 한 마리

 

사랑에 흠뻑 길들여 놓고는

영하 10도의 강추위 어둠 속에

사정없이 던져버리고 간

얼굴을 감춘 저것은, 분명

사람이다

 

- 김애자의 시, ‘유기견'에서

 

 

저희 동네 고양이들은 울지 않습니다. 언젠가 고양이들을 일망타진을 하고 난 후, 위험을 감지했는지 울음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딱 한 마리 야옹거리는 녀석이 있는데 이 녀석은 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야옹거리고 나타납니다. 새끼를 낳고 나면, 저를 따라오라고 뒤를 돌아보면서 앞장서서 안내를 합니다. 낳을 때마다 장소가 다릅니다. 아파트 지하로 들어가는 낮은 창문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그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나를 바라봅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먹이를 갔다가 그 창문 앞에 물그릇과 함께 가져다주고 조금 떨어져 지켜보면 아주 고운 목소리로 새끼들을 부릅니다.

 

저는 동네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줍니다. 언젠가 TV에서 죽은 엄마 고양이 곁을 떠나지 않는 새끼 고양이를 보고 난 뒤부터 하게 된 일입니다. 사람들이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갈 때에도, 하염없이 엄마 고양이만 바라보던 그 슬픈 눈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엄마 고양이가 죽은 원인이 밝혀졌는데 위속에 비닐이 꽉 차있었다고 합니다. 새끼는 돌보아야 하고 배는 고프고 먹이는 없고.

 

실험실에서, 구제역 참사 현장에서, 학대당하고, 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산채로 매장당하는 등, 인간들이 행하는 이웃생명들에 대한 잔학한 행위들은 말로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이웃생명들과 인간이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요?

 

동양 종교전통에서는 그 희망의 단초를 찾아내기가 비교적 수월합니다. 인도에서 나온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은 불살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힌두교의 중심사상인 Upanischad의 일원론적인 실재관에 의하면, 모든 만물은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비롯되어졌습니다. 겉모습만 가지고 분별지를 통해서 보면 너는 너, 나는 나로 분별되지만, 분별지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근원지가 같은 너와 나, 그가 브라흐만과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까지 포함이 됩니다.


유교적 생명관에서도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생명은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이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2002년에 독일 마부륵 대학 초청으로 서울대 종교학과에 계시던 금장태 선생님과 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의 산책길에서 금장태 선생님께서 삼강오륜의 오륜을 견공(犬公)에 적용시켜 들려주셔서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다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모색이 상세하니 부자유친(父子有親)이요. 작은개가 큰개에 달려들지 않으니 군신유의(君臣有義). 어미가 새끼를 가지면 수캐를 가까이 하지 않으니 부부유별(夫婦有別)이요, 한 개가 짖으면 동네개가 다 짖으니 붕우유신(朋友有信)이요, 하는 이야기인데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생각나지 않아 확인 차 전화 드렸더니 그 이야기보다 유교의 생명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글귀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래는 해주에 있던 율곡사당이 남쪽에 세워져 한 때 서대문 홍파동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당은 없어지고 율곡선생이 쓰셨다는 글씨 탁본이 그곳 석벽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이 성동인우애지산학(性同鱗羽愛止山壑)입니다. 이 뜻은 깊은 물속에 있는 물고기부터 하늘을 나는 깃털 달린 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의 성품은 같은 것이어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이 깃드는 곳 깊은 산골짜기까지 사랑이 머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유교의 생명관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선생님은 모든 만물을 유기체적인 생명공동체로 인식하셨습니다. 땅을 대하기를 어머님 가슴처럼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침도 함부로 뱉지 말고 걸음걸이도 함부로 하지 말고, 풀 한포기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의 삼경사상에서는 하늘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은 인간을 공경할 줄 알고 인간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은 뭇 생명을 공경할 줄 알아야 된다고 강조하지요.

 

 

그러면 그리스도교 신학과 성서 안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 성서(구약성서)는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지배권(dominion)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창세기 1:28). 중세교회와 신학의 기초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고 중세신학의 정점을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의 선()을 위해 동물을 사용하는 것은 옳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을 가지지 못한 동물에게 자애로울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13세기 이래 서구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서구의 이런 이성 중심적이고 이분법적 신학과 철학에서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교리가 나오고, 이것은 동물을 하등 동물고등 동물로 분류하고 이 위계적 질서의 맨 꼭대기에 인간이 자리 잡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종()우월주의 혹은 종()차별주의(species-ism)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동물학대의 뿌리는 서구의 이성 중심적이고 이분법적 신학과 철학의 결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1988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신은 인간에게 지배권을 부여했으나 절대적 권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며 인간은 다른 생물을 임의로 죽일 자유가 없다고 선언합니다생태여성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인간이 가진 수학적 이성과 동물이 가진 실천적 이성을 구분하면서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고 할 필연적 근거는 없다고 논박했습니다. 이런 인간중심적 주장은 이성/감정, 정신/, 인간/다른 동물 사이의 위계적 이원론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맥페이그는 동물, 특히 고등동물에게서 감정에 기초한 실천적 이성(친절, 용감, 우정, 인내, 관대함 등)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인간의 수학적 이성보다 더 열등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보자고 제안하면서, 하나님의 창조(creation)를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으로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육신이 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인간과 똑 같이 하나님의 몸의 일부인 동식물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이 됩니다.

 

하지만,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동물이 인간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을 수는 없으며, 따라서 동물과 인간의 이해가 상충할 때에는 인간에게 우선성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동물은 구원의 대상은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동물에게는 영성과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조차도 아직 온정주의적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는 기독교의 뿌리 깊은 인간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 그리고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성서로 돌아가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홍수 심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파괴나 파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 새로운 희망, 그리고 새로운 비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7:11에 의하면,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큰 홍수가 일어났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큰 깊음의 샘들그리고 하늘의 창문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구절은 마른 땅이 창조되고 그 땅이 자신의 위와 아래에 있는 두 궁창에 의해 거대한 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홍수란 이와 같은 물의 분리를 취소하고 다시 하나로 합친 상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원래의 상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물로 가득 찼던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 죄에 물든 창조의 세계를 새로 시작하는 것, 그러기 위해 그것을 초기상태로 되돌리려는(“reset”)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큰 깊음의 샘들하늘의 창문들을 여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노아의 이야기는 심판이나 파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사야 65:17)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새로운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창세기 8:13)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그 위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8:21)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며 이전처럼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확고하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홍수 이전 첫 번째 창조세계 속에서 인간과 땅은 평화와 조화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짓자 땅도 저주를 받아 전에 없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습니다(창세기 3:18). 하지만 홍수 이후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지금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 때문에 다시는 땅을 저주하거나 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태신학에 관심이 많은 장윤재 교수는 우리가 홍수 이전에 하나님이 첫 번째 남자와 여자에게 내리셨던 명령과,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내리셨던 명령 사이의 중대한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닫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오랫동안 인간 중심주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9:1)고 하십니다. 여기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들에게 땅을 정복하라거나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또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창세기 9:9-10)고 말씀하십니다. 912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비슷한 내용이 13, 15, 16, 17절에 나옵니다. 이 짧은 창세기 9장 안에 무려 6번이나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누구와 새로운 생명의 언약을 맺고 있는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언약은 단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땅의 모든 동물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홍수 이후에 땅과 또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은 더 이상 인간의 지배권(dominion)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21)

 

하나님의 새 언약의 요지는 하나님이 다시는 인간을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시는 사람 때문에땅을 저주하거나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성서는 지금 하나님이 단지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생물, 모든 생명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이기심과 무지로 인해 결국 자기 파멸과 파국으로 치닫는 우리 인간의 해악에도 불구하고 땅 위에서 생명의 역사를 지속하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곧 생명의 역사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서는 언제나 인간을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성속에서 이해합니다. , 창조세계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지독한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에 의한 도구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새 하늘 새 땅의 아름다운 광경을 묵상하며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사야 65:17-25)

 

우리 새길 형제자매들은 고통 받는 인간의 곁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제 고통 받는 이웃생명들의 곁이 되었으면 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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