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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강기철 / 류홍렬

2015 이소회 주관 추수감사주일 예배

공동 말씀증거: 강기철 형제, 류홍렬 형제

 

 

 

겉사람, 속사람

(고린도후서 4:16)

 

 

20151011일 추수감사주일 예배

강기철 형제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고린도후서 4:16 -

 

 

 

추석 전에 호텔에 잠시 들를 일이 있었어요. 마침 젊은이 둘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되었는데요, 그 중 한 친구가 옆 친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베트남에도 추석이 있니?’ 그런데, 그 친구 대답이 참 걸작입디다. ‘, 임마! 베트남은 삼모작이야. 언제를 추석으로 하냐?’ 괜한 걸 다 물어본다는 듯, 툭 던지는 말이 참 싱겁기는 했어도, 그 친구의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서 그냥 웃어넘기고자 순간 임기응변으로 재치를 부리는 것만도 아닌 듯싶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추석이란 일단 이런 정도의 날로 인식되고 있던 것 아닐까요?

 

이 젊은이 둘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오늘 저희도 이렇게 탐스럽고 풍성한 한 해의 수확물로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추석이 한낱 수확에 대한 감사를 담는 그런 정도의 날로 그친다면, 요즘같이 사시사철 전천후로 먹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때에, 예전과 같은 추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요. 더욱이, 모든 것이 상업화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요즘 세태 속에서 말이지요. 미국은 그 다음날이 Black Friday라고, 파격적인 세일가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고 북새통을 이룬다지요. 이를 빗대어, 추수감사절을 쇼핑감사절이라고도 한다나요?

 

그러나, 아무리 그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되어 간다고 해도, 이런 날이라도 있어서 오랜만에 친척이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억하고, 한 해의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며, 서로 정을 나누고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다면, 갈수록 핵가족화 되고, 가족이 분산되어, 개별적 삶 중심으로 옮아가는 요즈음 세태 속에서, 이 하나 만으로도 이 날이 가지는 감사의 의미는 특별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이 축일을 이소회(二笑會) 헌신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달 뜬금없이 추수감사절 예배를 이소회(二笑會)에서 주관해 주십사 하는 요청이 있다기에, 왜 하필 우리 같은 뒷전 사람들이에 이렇게 중요한 예배를 맡기나 의아스러웠지요. 이유인즉슨, ‘그래도 오래 살아 온 분들이 이런 저런 감사의 얘기가 제일 많을 것 같아서였다지요.

일단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라고 하셨으니, 살아온 날들, 삶 하나하나가 어찌 감사한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은혜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내가 있음에 대하여 감사할 일이 어디 한 두가지일 수 있겠습니까?

 

어느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감사노트라는 것을 나누어주고, 3주일 동안 매일매일 삶 속에서의 감사의 제목들을 10개씩 적어서 제출하라 했다더군요. 이것을 감사타임캡술에 보관하였다가 내년 추수감사절에 되돌려 주겠다, , 괜찮은 발상이다 싶었어요.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린다 하심은 어떤 특정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이 그 자체로 은혜요, 축복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하니, ‘살아온 세월만큼 감사할 일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 듯싶지요.

 

그런데, 감사한다는 것이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 드리는 것으로만 그칠 일만은 아니지요. 여기에는 보은의 그 무엇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잖아요. 그냥 인사말만 건네고 말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감사의 편지도 쓰고, 소중한 의미를 담아 선물도 준비하고, 식사 초대도 하고, 그렇게들 하지요? 그렇다면, 제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로, 지금의 내가 있다 할 것인데, 그 값진 은혜에 대한 보답을 무엇으로 할 수 있어야 하나요? 바로 내 삶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할 때, 내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 살고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 진한 아쉬움만 남는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난 과거는 다시 손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인 것이고, 지금부터야 말로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주님의 말씀 따라 좀 제대로 살아 볼 수 있는 그런 삶의 시간들이 아닌가 생각하며, 여기에 오늘 읽은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희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갑니다.’ (고린도후서 4:16)

 

겉사람, 속사람왜 이렇게 어려운 말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다른 해석과 의미, 좀 더 깊은 뜻을 헤아려 볼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겉은 쇠약해지나, 우리의 내면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이 정도로 이해해도 될 말씀 아니던가요? , ‘나이 먹는다고 낙담하지 마라. 오히려, 그만큼 내면은 날로 더 성숙해 질 것이니로 해석한다면, 해석이 너무 자의적인가요? ‘내면이 성숙해진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흔 여섯의 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대담 내용, 여러분 잘 아시지요.

만약에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나이로 가고 싶은가요?’ 하고 묻자, ‘60세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고 답합니다. 그래서 예상 밖입니다. 젊음을 갖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요.’ 하자, ‘젊은 날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때는 생각이 얕았고, 행복이 뭔지 몰랐어요.’ 하고 대답합니다. , 이렇게 말씀을 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노른자의 시기는 65세에서 75세까지예요.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라고요.

제게 이 말씀이 얼마나 반가왔던지요. 꼭 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 같았습니다. 지금부터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깨달을 나이랍니다. 지금부터 10년이 제 인생의 노른자 시기라네요. 생각이 깊어지고, 깊어지는 만큼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고요. 그래서 논어에서도 ‘70’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하여 종심(從心)이라 했다던가요. 여기에 또 이렇게 답하고 계십니다.

나이 들어 보니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지고, 남을 위해 살았던 것만 보람으로 남아요.’ 어쩌면, 내면이 성숙되어진다는 것,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고나 할까요?

나를 위한 삶을 좇지 말고, 남을 위해서 살아라!” 이 지극히 평범한 듯 보이지만, 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자세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나님께서도 저희에게 말씀하셨지요.

 

얼마 전,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정말 오랜만에 제 손으로 구입한 책이었지요. 지적 장애인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이 삶을 나누는 라르슈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 <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기관의 간행물에 실린 소개 글을 보는 순간, 이 책에 바로 마음이 끌렸어요. 머리가 아닌 몸으로, 논리가 아닌 삶으로 그린 예수, 그런 예수가 어떻게 단순한 말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통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알게 되었다고 역자는 서평에서 쓰고 있습니다.

, 한 책머리에서 저자는 이 책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 기록한 네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 이야기다. 이 책이 독자들을 예수의 말씀과 행동으로 인도하기를 희망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분의 말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살아가는 방식에 의하여, 그에게서 피어나는 사랑과 밝은 빛에 의하여, 그들은 더욱 크게 감동되었다. 그 분은 말씀대로 사셨다. 그의 말은 머리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몸으로 사신 예수의 삶을 찾아보려고, 몇 번을 살피며 읽고 또 읽어도 제가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예수님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찌 이 성자와 같은 삶의 깊이에서 예수님 삶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보다도, ‘남을 위해 살았던 일만 남아요라던 노 철학자의 말씀이 계속 내 마음을 붙잡습니다. 앞만 바라보고 달려 왔던 시간들, 나만 바라보고, 나를 위해 살아왔던 지난 날들을 뒤로 하고, 몸은 비록 예전 같지 않으나, 이젠 앞과 뒤, 옆을 함께 살피며, 내가 아닌 그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살필 나이가 되었다는 것, 이 깨달음만으로도 이번 추수 감사절은 제게 너무나 뜻 깊은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 <Bucket List>의 대사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너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는가?’ 제 스스로에게도 이런 물음을 던져 보게 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이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다면, 제가 살아온 시간의 길이 만큼이나 많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저의 작은 보답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제 말씀을 마칩니다새길로고.JPG

 

 

 

 

 

 



상호 의존하는 관계성

(요한14:16)

 

 

20151011일 추수감사주일 예배

류홍렬 형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 요한14:16 -

 

 

 

우리말에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이라는 말은 사물과 사물 간에 간격을 말하며, 그 간격을 연결하는 그 무엇이 관계성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들 간에 관계를 중요시 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중심적이지 않고 가족 중심, 또는 마을 중심, 고향 중심, 씨족 중심적인 것을 알 수 있지요. 옛 농촌 마을에서 농사일을 서로 돌아가며 도와주는 품앗이 라는 것이 있었으며, 결혼이나 장례식 등 큰일이 있을 때 감주, 막걸리, 떡등 음식을 만들어 보내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좋은 풍습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상부상조하는 정신은 퇴색하고 부조라는 명목으로 금전이 오고가는 상부상조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이 나이 들도록 살아오면서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모든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유와, 명예와, 권력과, 심지어 학식보다도, 사람들 간에 좋은 관계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마음에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원만치 못할 때,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고 심하면 우울증에 빠지고 정신적인 병적 증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 현직에서 물러나고 사회적인 관계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가족 간에도 소원해 질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 때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도 사람들 사이에 관계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관계가 사랑, 용서, 감사, 섬김이고 역관계가 미움, 갈등, 다툼, 지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 관계의 삶을 살도록 권유하십니다. 관계가 원만치 못할 때 갈등과 고통이 생기고 불행이 움트기 시작하지요. 우리는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간에 또 친한 친구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할 때 생기는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우리나라 교육이 이러한 삶의 기본이 되는 관계성, 사회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시험위주와 성적위주, 학벌위주로 가기 때문에 평생을 살면서 필요한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의 관계성을 잘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교육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능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으로 교육시키기 때문에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고 잘 살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살 율, 특히 젊은 사람들의 자살율이 세계에서 으뜸이고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관계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뻔히 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성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 자연과, 생명 현상의 근저에 얽혀 있는 관계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 보고자 함입니다. 관계성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권진관 형제께서 이야기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은 없습니다. 상호 의존하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관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물망처럼 서로 얼기설기 관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가 지은 생명의 그물이라는 책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얽히고 설킨 그물망처람 상호 의존하는 관계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가 생명체의 먹이 사슬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식물을 양식으로 먹고 살고 있으며 그 배설물은 식물에게 필요한 영양을 공급합니다. 동물이 죽은 시체는 미생물의 먹이가 되고 이것은 다시 식물의 영양소가 됩니다. 동물의 호흡으로 나온 탄산가스는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의 원료가 되고 그때 나오는 산소는 동물에게 열과 에너지를 생산하는데 유용하게 쓰입니다. 숲속에 들어가면 상쾌한 것은 나무가 내 놓은 산소 덕분이지요. 인체의 장기관은 박테리아와 많은 세균이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이 세균은 음식물이 들어오면 이를 소화시켜 인체에 흡수 될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켜주어 인체에 유익을 줍니다. 박테리아와 세균은 인간에게 병을 유발시키는 해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이와 같이 이로움을 주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 많은 박테리아와 균류는 지구상에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박테리아가 없으면 한순간도 우리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생태계는 순환의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생물이 배설하는 오염물이 지구를 오염 시키지도 않고 죽은 시체도 타 생물의 먹이로 이용되어 지구를 오염시켜 생물이 살아가기에 어려운 환경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는 상호 의존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면서 살아갑니다. 그와는 반대로 인류가 개발한 과학문명에 의한 산업 생산물은 순환적이지 않고 직선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사용한 자원은 재생되지 않고 싸여서 지구 한경을 오염시키고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힘든 환경을 만들 뿐입니다. 인류가 개발한 과학문명의 생산물은 자원을 고갈시키고 폐기물을 양산시켜 지구를 오염시킬 뿐, 이를 재생시키거나 지구환경을 정화시키지 못합니다. 화학비료와 농약과 그외 많은 화학제품들은 지구상에 많은 생물체 곤충은 물론 박테리아와 세균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파괴 시킵니다. 다량의 탄산가스 배출은 지구 온도를 매년 상승시켜 빙하가 소멸되고 생태계가 바뀌고 있으며, 인근 연해와 강물에 녹조류가 발생하여 수 많은 물고기가 죽어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 후손에게 어려운 환경을 물려주게 될 것이 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가 개발한 과학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살지만 그 피해도 비례해서 커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 피해는 지구 환경을 회복하기 힘든 상태로 바꾸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생태계 뿐 아니라 물질계도 이러한 관계성의 기초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원자크기 이하의 미시 세계를 탐구하는 양자론에서 소립자들은 여러가지 관찰과 측정결과 입자라기보다는 상호연관성 또는 상호관계로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자론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하이젠베르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사건들이 엇갈리고, 중첩되고, 또는 결합되며, 그 결과로 전체의 성질을 결정짓는 사건들의 복잡한 그물처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양자 역학의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로서의 작용이 아니라 확률에 의해서만 해석될 뿐입니다. 양자 역학에서는 부분이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부분을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들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원자는 단단한 입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소프트한 관계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론 세상의 모든 물체는 그 밑바닥에 이러한 관계성의 기초에 위에 서 있는 것이지요. 우리 시야를 우주로 돌려 보면 어떨까요. 별들 간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은 별들 간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작든 크든 별들은 상호 인력을 주고받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며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요. 물질의 미세구조, 생태계, 자연현상, 우주에 이르기 까지 관계성에 기초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 자체의 생명체 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표상과 대기 그리고 해양과 거기에 살고 있는 각종 생명체들은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미세한 변화를 조절하고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환경, 즉 대기 중 산소와 질소의 비, 온도, 강수, 해수 등이 오늘과 같은 구성을 이루는데 20-30억년의 장구한 시간 속에 각종 생물 즉 박테리아와 미세 생물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각종 생명체들과 자연 현상은 상호 관계를 가지고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고 조절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작용을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경에서 나비의 팔랑거림이 뉴욕에 큰 폭풍울 불러 일으킨다는 비유로 자연 속에는 초기의 작은 변화가 큰 사건과 연관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상호 관계성 속에 움직이는 세계에 대해서 몸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생태계는 물론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원자의 세계 및 자연계와 전 우주의 세계까지도 서로 긴밀한 관계성 속에 상호 의존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 사상도 사물과 생명체의 바탕에 깔려 있는 관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기독교의 예수가 머리이고 우리는 지체라고 했을 때 유기적인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일체화된 관계성의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의 사랑과 용서, 섬김, 감사의 언어들은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생태계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순환 고리를 생각할 때 이 관계성은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넘어서 까지 확장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후의 부활과 영생을 이러한 상호 관계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발달한 기계문명은 생태계의 관계성, 인간의 고유한 모든 관계성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근원적 관계성의 고리를 사람이 변화시키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편리함을 추구한 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환경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성을 변화시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계문명이 가져온 영향을 인체가 느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문화와 기계문명은 인간이 걷고, 힘써서 일함으로서 근력을 활성화시켜 건강을 유지하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걷기 운동을 하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화 되면서 기억하고 판단하는 정신적인 기능까지 기계에 의존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내가 어릴 적 아주머니들은 온 동네의 제삿날부터 가족 친척의 생일 등을 다 기억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컴퓨터 스마트폰이 대신해주기 때문이지요. 머리로 기억하고 판단할 일을 기계가 대신해주기 때문에 육체 뿐 아니라, 뇌의 기능이 위축되어 앞으로 치매환자가 더 많아질 것을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과 생태계 인관과 자연 사이에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관계성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인간이 자신들의 단기적인 유익만을 위해 자연을 요리한다거나 나 혼자 무엇을 이루겠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요 누렇게 물들은 들판은 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이 풍성해 지는 계절입니다. 감사주일을 맞아 우리에게 풍성한 먹을거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뜨거운 뙤약볕에 땀 흘리며 가꾸어 주신 농부의 손길에도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햇빛과 자연, 그리고 많은 생명체들과 우리의 이웃 사이에 상호 의존하는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사할 대상은 하나 둘이 아닐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은 주위 모든 대상과 알게 모르게 상호 의존하는 관계,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것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항상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은 우리가 접하는 모든 대상과 상호 의존하는 관계성에 기초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복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의 이웃과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대상과 올바른 관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감사주일을 맞아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오늘 감사의 근간이 되는 관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상에 모든 살아있는 생물과 자연과 물질의 바탕에 그물망과 같은 관계성을 가지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어진 한계를 넘어 그 관계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악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사이, 생태계와, 자연과의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상호 간에 관계성을 해치고 생태께의 순환 고리를 끊는 일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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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15 [2015.09.20]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file 2015.10.06 정원진 목사
33 2015 [2015.09.13] 이 매임에서 풀어주라 file 2015.09.23 구미정 교수
32 2015 [2015.09.06] 거위의 꿈 file 2015.09.11 장윤재 교수
31 2015 [2015.08.30]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 file 2015.09.03 정경일
30 2015 [2015.08.16] 예수 그리스도, 자유케 하사 섬기게 하신다 file 2015.08.26 변상욱 기자
29 2015 [2015.07.12] 다음 30년의 상상 Part 2: 연약함이 길이다 2015.08.20 정경일
28 2015 [2015.04.26] 다음 30년의 상상 Part 1: 처음마음 2015.08.20 정경일
27 2015 [2015.08.09]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 file 2015.08.11 이재정 신부
26 2015 [2015.08.02] Follow Up 하시는 예수님 file 2015.08.06 전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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