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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원진 목사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가복음 1:21-28)

 

 

2015920일 주일예배

정원진 목사(명지병원 원목실장)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 마가복음 1:21-28 -

 

 

 

악한 귀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오늘 복음 말씀은 가버나움이란 동네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서 사탄에게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혹을 물리치신 후에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선포 내용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15)였습니다. 이 선포를 듣고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1:16-20). 이 네 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란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동네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고, 어떤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치유사건으로 인해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서 예수님은 졸지에 유명 인사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안식일 회당 예배에 어떻게 악한 귀신들린 사람이 참석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에 따르면 거룩한 날, 거룩한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의식이 거행되는 안식일 회당 예배에 결코 악한 귀신들린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안식일 회당 예배에 악한 귀신들린 사람이 참석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멀쩡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다른 질문 하나는 악한 귀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정신에 장악되어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다른 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 두 질문을 품고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의 복음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탄=지배체제라는 구조악의 내면에 있는 영적 실재

 

그런데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악한 귀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귀신이나 악령이 진짜 있다고 믿으시냐는 말입니다. 학교교육을 통해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많은 현대인들은 귀신이나 악령을 우리의 관념속에만 존재하는 허깨비정도로 생각합니다. , 실제로는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신이나 악령을 미신이나 과거의 유물정도로 취급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나 악령을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생각합니다. 귀신 들렸다.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미쳤다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귀신(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현대에는 정신병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귀신이나 악령의 존재를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기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서, 특히 미국에 유학 가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약성서학자 가운데 월터 윙크(Walter Wink)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3년 전인 지난 2012년에 77세의 나이로 작고하셨는데, 성서학자요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사회변혁운동가였습니다. 주요 경력은 뉴욕시에 있는 Aubur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친 것인데, 이 신학교는 사회변혁운동가를 길러내는 곳입니다.

이 분은 두 가지 탁월한 업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비폭력 저항을 주장하고 실천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30년이 넘도록 성서에 나타난 사탄의 세력들’(the Powers)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시리즈로 책을 펴낸 것입니다. 1984Naming the Powers, 1986Unmasking the Powers, 1992Engaging the Powers, 1998When the Powers Fall, 그리고 1999The Powers that Be가 그것들입니다. 이 중 두 권은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중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란 책은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세계 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귀신이나 악마를 이 세상의 악한 세력들, 특히 정치·경제·문화적인 지배체제(dominant system)라는 구조 악(systemic evil)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실재라고 해석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외에 실제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엄청난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탄이나 악마혹은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악의 힘이 통합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지배체제이고, 그 지배체제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악한 영(정신)이 바로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는 지배체제입니다. 그리고 그 나치 독일을 지배하던 악한 영(정신)인 파시즘은 사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구조의 문제나 체제의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배체제를 지배하는 악한 영은 그 지배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각 개인의 내면 또한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문자 그대로 자()를 본()으로 삼는 사회체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자()는 재물, 즉 돈을 뜻하니까, 자본주의란 결국 돈이 근본이 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체제 속에서는 국가도 사람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월터 윙크의 말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가 구조악이라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정신은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악의 힘인 사탄은 제도나 체제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세계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는 것은 옳고 바르게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옳고 바르게 사는 가난한사람을 보고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산다고 하지요. 우리는 돈 많은 부자를 보고 산다고 합니다. 사실 살고 사는 것은 경제적인 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는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우리는 살고 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구조악이 사회체제뿐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의 내면까지도 지배하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악한 영은 우리에게 보다 더라는 소유욕을 부추깁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암살><베테랑>이라는 천만 관객의 한국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 올 여름 극장가에서, 신인감독이 2억 원의 제작비로 만든 독립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4만 관객을 동원한 굉장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한 여인의 수난사를 통해 탐욕에 찬 세상을 풍자하고, 인간사의 부조리를 꼬집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 홍보 카피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성실이 너희를 실성케 하리라!” 저는 이 한 줄의 카피가 1960년대 이후에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과 1인당 국민소득이 엄청나게 상승했는데도,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왜 점점 낮아지고, 자살률은 왜 점점 높아져 세계 최고가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살았는데, 그 결과는 실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돈에 실성’(환장)하게 되었고 돈에 몸도 마음도 장악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의 세력의 실체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악의 세력을 극복하고자 싸우고 있는 사람까지도, 그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한 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악을 점점 닮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전에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책이 출판되어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한 바는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남이 가진 파시즘은 보면서 자기 안의 파시즘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독재자가 물러나고 그 독재자에 반대하던 사람이 정권을 잡아도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 칼 융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장 싫어해서 대항해 싸우는 바로 그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파시즘과 싸우다가 파시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저는 그 사실을 미국에서 논문 심사를 받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제 논문 지도교수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가장 senior였습니다. 그분께 제 학위 논문을 제출했더니, 그분이 고칠 곳이 없다며 그냥 심사받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맘 편히 학교로 갔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한 junior 교수가 제 논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도 집요하게 몰아붙여서 1주일동안 고생하면서 논문을 수정하고 다시 제출했습니다.

junior 교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저더러 제국주의자’(imperialist)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시각으로 한국교회를 바라보고 비판한 후, 제 시각에 따라 한국교회의 문제를 도려내고자 칼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맞고, 한국교회는 틀렸다. 그러니 내 생각대로 이렇게 바꿔야 한다는 제 태도가 제국주의적’(imperialistic)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제 생각이나 제안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도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현하는 방법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put-in’ 하려고 하지 말고 ‘draw-out’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로 하여금 자기 잘못을 스스로 끌어내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의하고 그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논문을 수정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젊었을 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하면서 파시즘을 비판하고 싸웠는데, “욕하면서 배운다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그토록 증오하며 싸우던 파시즘을 닮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에 대한 생각의 변화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진보와 보수를 그 사람이 가진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에 관한 입장에 따라 구분했었습니다. , 그 사람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가서 진보와 보수는 입장이 아니라 태도에 따라 갈라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inclusive한가 아니면 exclusive한가, 즉 포용적인가 배타적인가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려있는 사람은 진보요, 닫혀있는 사람은 보수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요, 남도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입니다. 그래서 보수는 이것 아니면 저것,” “either-or”이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진보는 이것도 저것도,” “both-and”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둘 다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처럼 보이는 이 태도는 입장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도 끄덕, 저것도 끄덕하는 사람은 결코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라면 확실한 자기 입장은 있어야지지요. 하지만 그 입장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속에서 자기 입장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짜 진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파시즘과 싸우면서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파시즘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닌지,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데로 만사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파시스트나 제국주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 사람은 벽을 허무는 사람이 아니라 벽을 쌓는 사람이고, 예수를 믿는사람일지는 몰라도 예수를 사는사람은 아닙니다. 새길 공동체가 지나간 30년을 회고하고 다가올 30년을 전망하고자 할 때, 이점에 대해서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악령 추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가르침과 악령 추방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본문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에 대한 악령의 반응은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24절에서 악령은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그냥 그대로 살고 싶은데, 현재의 상태와 지금까지 살던 방식이 좋은데, 익숙하고 편한데,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악령이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하고 반응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익숙하고 편하고 좋아도 이제까지 살던 방식으로 살아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실재하고 있는 악령을 내 보내야만, 우리 안의 파시즘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만 비로소 우리 밖에 있는 악과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셨다면 청중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 나라 지식을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는 하루하루 아는 것을 쌓아가야 합니다. 새 지식을 차곡차곡 늘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학문이란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이와 다릅니다. 진리는 쌓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비로소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에서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고 한 것입니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버려야 얻습니다. 악령을 내보내야 성령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버려야 새 삶의 방식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을 내보내야 비로소 우리 밖의 파시즘과 싸워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28년 전 새길을 시작했습니다. 새길은 분명 열린 길이었고, 포용적인 길이었고, 각종 문턱과 담을 허무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여 년 동안 여러분은 혹시 새로운 문턱 만들고 담을 쌓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걷고 있는 길은 아직도 진정 새길입니까?

 

교회는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가 아니라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여야 합니다. 한번 개혁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아니라 늘 개혁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새길의 정신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옛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를 장악하고 있던 온갖 익숙한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그 사람처럼, 여러분도 스스로를 새길로 나서지 못하게 막는 온갖 악령들로부터 벗어나서 첫 마음 잃지 않고 늘 새길을 걸으시기를 축원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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