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90.156.150) 조회 수 323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자 구미정 교수


이 매임에서 풀어주라

(누가복음 13:10-17)

 

 

2015913일 주일예배

구미정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 누가복음 13:10-17 -

 

 

 

 

1.


잘 아시다시피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은 축귀와 치유로 요약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더러운 영의 횡포를 물리쳐, 사람에게 온전한 삶을 되돌려주는 일, 예수 사건의 요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 이를 소개하는 것이 복음서의 주요 콘텐츠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복음서를 읽는 일은 예수 사건을 현재화하는 일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한 효력이 없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활동을 어떻게 증언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있던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만나 비로소 그 여인의 굽은 허리가 펴지게 된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과거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성서 안의 일로만 제한한다면, 우리는 예수와 무관한 사람들이 됩니다. 이 이야기가 읽혀지는 현장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마다 동일한 경험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일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이 대목에서 저는 지난 413일 세상을 떠난 귄터 그라스(1927-2015)를 떠올립니다. 그는 양철북(1959)이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20세기의 위대한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197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지요.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축시 낭송을 부탁 받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판문점부터 들렀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을 통해 자기 나라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신랄하게 고발하는 데 앞장섰던 그라스는 자신이 10대 시절에 SS(나치 친위대)에서 활동한 사실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했다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를 잘 아는 그라스는 2002년 한국 방문 당시 일본을 향해 매서운 비판을 날렸습니다. “일본은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인도적, 인간적으로 되돌아보고 밝히지 못한다. 일본의 커다란 핸디캡이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 못할뿐더러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 않는다.”

 

제가 제자들과 함께 꾸리고 있는 계간지 이제 여기 그 너머6호에 동경외대 하시모토 유이치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우리 쪽이 시작한 전쟁과 식민지 안에 서 있는 타자라는 제목의 글에서 하시모토 교수는 아베 수상의 ‘20158·15 담화를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집단 자위권운운하며 평화헌법에 손을 대려는 속내를 볼 때, 일본이 전후 70을 기념한다는 지금 이 시간까지 한번이라도 진정으로 전후였던 적이 있냐는 겁니다. 동아시아 서민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야만적인 전쟁의 가해자로서 책임을 느끼고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한, 일본은 언제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전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지, ‘전후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고 고발합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라고, 여기저기서 행사가 많습니다. 69에서 고작 하나 더했을 뿐인데, 70의 의미는 남다른가 봅니다. 71, 72, 73, , 이런 숫자들은 밋밋하게 지나가겠지요. 아니 815를 기점으로 벌써부터 흐지부지해지는 분위기입니다. 더러는 영화 <암살>을 관람한 것으로, 광복 70주년 의식을 다 치렀다고 자조하며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즈음에 저는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가 자꾸 떠오릅니다. 오스카는 세 살 생일이 되던 날, 고의로 사다리에서 추락해 성장이 멈춥니다. 그 해는 귄터 그라스가 태어난 해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독일 소시민 계층에 의해 급격히 그 세를 불려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난쟁이가 된 오스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비로소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데, 이 성장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등에 커다란 혹이 자라난 것입니다. 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런가하면 소설가 조세희씨의 작품, 1972년 당시 출간 6개월 만에 무려 10만부가 팔려나가고, 현재까지 누적 판매 100만부를 넘어선, 독재개발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려낸 책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주인공은 또 왜 난쟁이여야 할까요?

 

난쟁이는 성장 지체로 키가 자라지 못한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입니다. 오스카의 성장이 멈추었던 시기가 1927년부터 45년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18년입니다. 귄터 그라스는 그 18년을 독일 역사에서 독일인의 성장이 멈춘 시기로 읽어냅니다.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다시 성장을 시작했다지만, 그렇다고 과거사가 아예 면죄부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지요. 그래서 귄터 그라스는 오스카의 등에 혹을 남겨둡니다. 이 혹은 독일인으로 태어난 이상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사의 부채, 역사의 짐을 상징합니다.

 

난쏘공을 봅시다. 작가 조세희씨가 주인공, 이른바 하루 벌어 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도시빈민을 왜 난쟁이로 묘사했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 역사에서 도시빈민이라는 사회계층, 요컨대 도시화 바람에 휘말려 시골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허락된 것은 달동네 쪽방밖에 없던 사람들, 그마저도 도시재개발 붐에 의해 강제철거당하고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출현한 것은 독재개발 시기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돌진적 산업화 프로젝트가 전 국민의 욕망을 추동하던 시절이지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이 박정희 시절이 도합 18년이라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지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의 18년을, 귄터 그라스가 오스카를 통해 그리는 18, 그리고 조세희가 난쟁이를 통해 그리는 18년과 이어보려는 것입니다. 아니 오스카에 맞추려면 박정희 시절보다 더 위로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귄터 그라스가 주문한 대로, 이 땅의 문학이 분단과 통일을 담아내지 않는 한, 문학 본연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1차 좌우합작 운동이 무산된, 요컨대 신간회가 해산된 1927년부터 엉뚱하게 남의 손으로 해방을 맞아 기어코 분단에 이르게 된 1945년까지 그 잃어버린 18이 오스카의 경우와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억지춘향처럼 보이시나요? 옳습니다. 핵심은 숫자에 있지 않을 겁니다. 다만 본문의 여인 이야기를 과거 예수 시대의 이야기, 성서 안의 이야기, 장애인의 치유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강조하고 싶어 자꾸 이럽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 성서 바깥의 이야기, 겉보기에는 신체가 멀쩡한 비장애인의 이야기, 바로 나/우리의 이야기로 읽지 않는 한, 모든 성서 읽기는 유체이탈독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3.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열여덟 해 동안허리가 굽어 있었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늘과 담을 쌓고 살았다는 소리지요. 땅만 보고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본의 아니게 올려다봐야 했겠지요. 인간이, 마치 안테나 세우듯, 머리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우고 두 발은 굳건히 땅을 디딘 채 동료 인간과 눈과 눈을 마주보며 어깨 걸고 함께 살아야 대동세상이 열리는 법인데, 이 여인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잔뜩 웅크린 채 위축된 사람, 사람답게 사는 모든 권리가 박탈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 힘없는 민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눈치나 보며 겨우 연명하는 민족, 상호 대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꼭 주눅 들어 굽실거려야 하는, 외교주권이 명목뿐이지 실제로는 위태한 약소민족을 상징한다고 확대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때는 안식일이랍니다. 문맥상 그 회당에는 회당장도 있는데, 감히(?)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십니다. 안식일의 설교 주권이 회당장에게서 예수에게로 이동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문제의 여인을 보셨습니다. 허리가 굽어서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한 여인, 허리가 굽었으니 남 앞에서 본의 아니게 굽실대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 마음껏 자유롭게 활개 치며 운신하지 못하는 여인, 그 여인이 예수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가 여인을 가까이 부릅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났소.”

 

18년 동안 여인을 짓누르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남 앞에 굽실대는 자세로 지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곧 허리를 곧추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삶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 생명의 주체가 되는 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태도를 보십시오. 흥미롭지 않습니까? 분개했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식일 규례를 근거로 회당권력을 장악해온, 곧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고 대리해온 그의 권위가 예수에 의해 심각히 도전 받았기 때문이지요.

일제강점기 시절, 특히나 3·1운동의 거점이었던 교회마저 일제의 문화통치에 넘어가 점차 비정치화 노선으로 기울면서 사실상 적극적인 친일노선을 걷고 있을 때,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무교회 운동에 앞장선 김교신 선생을 기억하시지요? 성서조선19322월호에 이런 재미있는 글이 실렸습니다. 권위에 대해 우리가 꼭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을 담았기에 다소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오늘의 학자들이 교단에서 강의함에 근사하였을 것이다. 고래의 유명한 학설을 일일이 소개하여 지식의 진열을 할 뿐, 거기는 열정도 없고, 책임도 없는 것이 장기였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있었다 한다.

기독교에는 옛날 선지자 시대로부터 두 가지 종류의 권위가 흘러왔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인공적 권위니, 이를테면 신학교 졸업증서, 기타 학위, 안수례 등등으로써 권위를 붙이는 것이요,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친수하시는 권위니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세례 요한, 예수, 바울의 권위는 다 이 후자에 속한 것이었다.

예수는 권세 있는 자처럼말씀하셨다 한다. 대개 하나님 외에 최고, 무결한 권위를 가졌던 예수의 권세란 것은 어떤 모양의 것이었던가. 저는 필경 자기의 권위에 의탁하여 설교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요, 진리와 생명이 약동하여 유로하노라니까 자연히 권위가 첨가하여졌을 것이다.

아무 권세도 행사함이 없었으나, 그중에 권위가 있었다. 짐작컨대 예수가 오늘 우리 사이에 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인식하기 어려우리라. 유대 백성과 같이 쓸데없는 고집과 지나친 경건이 나중 예수를 불신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에 이른 것은 심히 두려운 일이다.”

 

올해는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년이기도 하지요. 선생은 광복을 100여 일 앞두고 애석하게도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교회가 사실상 교회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삶의 자리가 곧 교회여야 한다는 교회였음을 생각하면, 새삼 마음이 숙연해지지요. 그의 신앙은 한 번도 관념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제 여기의 역사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그 너머의 눈에 잇대어 응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4.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질병이 역사의 뒤틀림으로 인한 한반도의 아픔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여인이 사탄에게 매여 허리를 펴지 못한 채로 고통 받았다는 증언을, 강대국에 의한 이 땅의 분단으로 해석하면 어떻겠습니까?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사탄은 분단이고 뭐고, 통일이고 뭐고, 그런 역사의 부채를 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몰아갑니다. 최저임금, 노인연금 따위에 목숨 걸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사안은 보지 못하게 가립니다. 인문학의 부흥을 외치지만, 그것도 책 읽을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사치지요. 시급 6,030원 알바 뛰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대학생들은 수업 교재 들춰볼 시간도 없다는 것 아닙니까?

 

광복 70, 아니 뒤틀린 해방 70. 이 세계사적·민족사적 모순이 집약된 땅에 사는 이상, 어느 개인도 난쟁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난쟁이의 대척점에는 누가 있습니까? 거인이 있습니다. 성서는 거인을 세상 질서에 속한 사람, 하늘의 질서에 대적하는 사람의 표상으로 그립니다. 이를테면 가나안 원주민이라 하는 네피림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거인족이더라는 말은 힘의 논리로 땅의 권력을 장악하려 드는 제국주의적인 속성을 지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질서는 거인을 욕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은 언제나 난쟁이를 향해 있습니다. 곁눈질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난쟁이가 되십니다. 본문 15-16절을 봅시다.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의 이 말씀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 날입니다. 만물이 땅의 질서로부터 풀려나 하늘의 질서에 귀의하는 날입니다. 하늘의 질서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에 위계와 서열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통용되는 땅의 질서가,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그렇게 속절없이 해체되고 맙니다.

 

17절에 보니까 예수의 이 말씀은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럽게만들고, “무리는 모두 기뻐하게만드는 효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리란 오클로스를 가리키지요. 땅의 질서에 매여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는 작은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익명의 다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새길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여러분의 말에도 동일한 효력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늘의 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끄럽게 만들고, 땅의 질서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축제의 날을 선물하는 힘이 여러분의 말과 실천에 있기를 바랍니다새길로고.JPG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45 2015 [2015.12.27] 다양성과 통합 file 2015.12.30 김이수
44 2015 [2015.11.29] 무엇을 희망하며, 무엇으로 살까 file 2015.12.23 권진관
43 2015 [2015.12.20] 나의 크리스마스 file 2015.12.23 강보미, 조성희
42 2015 [2015.12.13] 기다리시는 하나님, 되어가는 인간 file 2015.12.18 정경일
41 2015 [2015.12.06] 처음처럼, 더 예수답게: 반성과 새 결단을 위하여 file 2015.12.15 한완상
40 2015 [2015.11.15] 하나님 나라와 마치 아닌 듯한 태도 file 2015.11.20 전현식 교수
39 2015 [2015.11.08] 이웃 생명들과 함께 하기 file 2015.11.11 차옥숭
38 2015 [2015.11.01] 기억의 힘: 역사의 구원 file 2015.11.04 최만자
37 2015 [2015.10.18] 선 곁의 악 file 2015.10.23 정경일
36 2015 [2015.10.04] 원칙의 사람, 원만한 사람 file 2015.10.20 정수복 형제(사회학자/작가)
35 2015 [2015.10.11] 겉사람, 속사람 / 상호 의존하는 관계성 file 2015.10.16 강기철 / 류홍렬
34 2015 [2015.09.20]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file 2015.10.06 정원진 목사
» 2015 [2015.09.13] 이 매임에서 풀어주라 file 2015.09.23 구미정 교수
32 2015 [2015.09.06] 거위의 꿈 file 2015.09.11 장윤재 교수
31 2015 [2015.08.30]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 file 2015.09.03 정경일
30 2015 [2015.08.16] 예수 그리스도, 자유케 하사 섬기게 하신다 file 2015.08.26 변상욱 기자
29 2015 [2015.07.12] 다음 30년의 상상 Part 2: 연약함이 길이다 2015.08.20 정경일
28 2015 [2015.04.26] 다음 30년의 상상 Part 1: 처음마음 2015.08.20 정경일
27 2015 [2015.08.09]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 file 2015.08.11 이재정 신부
26 2015 [2015.08.02] Follow Up 하시는 예수님 file 2015.08.06 전인백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