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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015.09.11 12:00

[2015.09.06] 거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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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장윤재 교수


거위의 꿈

(예레미야 20:7-9, 고린도전서 11:17-26, 요한복음 8:31-32)

 

 

201596일 주일예배

장윤재 교수(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 예레미야 20:7-9 -

 

[다음에 지시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1:17-26 -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요한복음 8:31-32 -

 

 

 

 

어느 시대나 교회는 타락합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부패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자기 시대 러시아교회의 타락상을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속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셨는데 러시아교회의 최고지도자는 그를 체포해 감금합니다. 그리고 깊은 밤에 감방을 찾아가 당신이 정말 예수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이 지도자는 지금 자기가 교권을 잡고 온갖 영화를 누리는데 왜 벌써 와서 방해하느냐며 따집니다. 그러고 보면 1917년 러시아혁명은 - 그리고 그 앞의 1789년 프랑스혁명도 - 타락한 기독교와 기독교국가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최후의 사제의 창자와 최후의 왕의 목을 매달라고 외치던 군중들의 아우성 속에는 자신의 본질을 잃고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타락합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부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아름다운 사람을 들어 당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십니다.

 

올해 2015년의 76일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화형당해 순교한 지 정확히 60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을 앞서 공개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 매매, 그리고 교회의 부패에 맞선 인물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칭송 받고 있지만 루터나 칼뱅보다 우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 2천 년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순교로 손꼽히는 후스의 순교와 그의 종교개혁에 대해 이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최초의 종교개혁자는 루터가 아니라 후스입니다. 후스가 있었기에 루터가 있었고 칼뱅이 있었고 츠빙글리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후스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루터의 종교개혁의 전야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우리는 1차 종교개혁혹은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체코의 종교개혁에 대해 이제 깊이 알아야 합니다.

 

얀 후스는 1371년 체코의 남부 보헤미아 후시네츠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후스’(Hus)라는 이름은 거위’(Goose)라는 뜻이고 후시네츠는 거위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했고 부모는 검소했습니다. 후스는 어머니에 의해 사무엘처럼 소년시절부터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빨리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체코인들은 흘레바라는 호밀 식빵으로 숟가락을 만들어 콩 수프를 떠먹었는데 수프를 다 먹으면 그 숟가락까지 먹어치울 정도로 굶주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스도 빨리 사제가 되어 좋은 집에 살면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을 꿈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거위의 꿈입니다.

 

하지만 그는 카렐 대학, 즉 오늘의 프라하 대학에 들어가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카렐 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렐 4세가 설립한 대학으로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입니다. 거기서 그는 성서와 신학을 공부하면서 부유한 사제가 되고자 했던 자신의 꿈이 얼마나 헛된 인간의 욕망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이후 이 대학의 교수가 되어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던 후스는 이 대학의 총장까지 됩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은 바로 이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은 체코의 종교개혁이 비판적 기독교 지성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라는 뜻입니다. 실로 카렐 대학은 전폭적으로 후스를 지원했습니다. 많은 책들을 체코어로 출간하면서 보헤미아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교권으로부터 비판적 자유의 거리를 상실한 한국의 신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은 카렐 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특히 이 개혁의 진앙지는 카렐 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입니다. 얀 후스는 이 대학교회의 목사로 12년간 목회했습니다. 그리고 그 베들레헴 채플 안에서 그는 작지만 두 가지 의미있는 혁명을 이루어냈습니다. 하나는 공간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혁명입니다. 후스의 적대자들에 의해 창고라고 불린, 이 볼품없는 강당과 같은 베들레헴 채플은 교회 건축사에서 이단아에 속합니다. 이 건물은 전통적인 성당 건물처럼 긴 직사각형의 모습이 아니라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습니다. 직사각형의 전통적 성당에서는 제단 앞쪽에서 뒤쪽으로 위계적인 질서가 만들어집니다. 맨 뒤에 있는 비천한사람들은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예배를 멀찍이서 구경하다 돌아갑니다. 그런데 후스는 이 건물 안에 성화나 조각상을 다 치우고 대신 건물 한 면의 정 가운데에 덩그러니 설교단 하나만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 어디에 앉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위계질서가 없어진 것입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은 바로 이러한 공간혁명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후스는 바로 이런 혁명적인 공간 안에서 체코어로 체코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당시 예배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인 체코어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청중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는 12년간 설교하면서 주옥같은 설교 3000편을 남겼습니다. 그의 설교는 배우지 못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내용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적인 설교는 말재주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의 힘은 성경의 본문 자체에 있었습니다. 그는 해박한 성경지식을 바탕으로 성경본문의 본뜻을 재발견하여 단순하고 명쾌하게 개혁의 메시지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후스는 이렇게 체코어로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또한 체코어로 번역된 성경을 계속 수정해 나가면서 체코어의 철자법을 개발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오늘날 프란츠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와 같은 천재적인 체코의 작가들은 모두 후스의 체코어 철자법 연구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언어혁명속에서 체코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스가 대중적 설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찬송가 작사자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베들레헴 채플은 체코어로 설교가 선포되었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회중찬송이 크게 울려 퍼졌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후스는 체코인들의 정서에 잘 맞는 찬송 가사를 지어서 적극적인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주후 360년 라오디게아 공의회 이후 예배시간에 일반 회중이 직접 부르는 찬송, 즉 회중찬송(congregational hymn)이 완전히 금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훈련된 성가대만이 찬송(chanting)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후스 당시의 교회음악도 사제들과 사제에 준하는 찬양대원들만의 음악이었습니다. 당연히 회중은 참여할 수 없고 듣기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음악의 언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위법으로 복잡하게 가사가 교차되는 바람에 회중은 가사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중세시대 예배에서 회중은 배제되었습니다. 예배인도자를 제외한 모든 회중은 방관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의 1천 년 동안이나 금지되었던 회중찬송을 다시 복구시킨 이가 바로 후스입니다. 그는 특히 시편찬송을 교회 안에 다시 소개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시간에 자기 입으로 직접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후스 덕분입니다.

 

보통 교회역사가들은 후스를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실제로 위클리프는 후스보다 한 세대 앞서 1382년에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입니다. 라틴어로만 성경을 읽던 1천 년 동안의 전통을 깨고 위클리프는 신구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자신의 백성들이 읽게 했습니다. 교회역사가들은 이러한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부릅니다. 후스도 이 위클리프를 따라 성서는 백성들의 언어로 씌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이후 지병으로 사망했으나, 그가 죽은 지 44년 후에 교황은 칙령을 내려 위클리프의 사체를 발굴하여 화형에 처해 버립니다. 우리말로 하면 부관참시를 한 것입니다.

 

후스는 특히 위클리프의 교회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1412년부터 후스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 그리고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2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는 생애 가운데 가장 풍성한 집필 활동을 합니다. 이 때 쓰인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가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입니다. 1413년에 라틴어로 완성된 이 책은 체코 종교개혁의 기념비적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훗날 후스의 적대자들이 그를 이단으로 정죄할 때 후스의 전집에서 약 30쪽 분량의 글을 뽑아냈는데 이중 20쪽이 교회에 대한 것일 정도로 이 책은 중요합니다. 이 책에서 후스도 위클리프를 따라 교회를 지상의 교회하나님의 교회로 구별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후스는 놀랍게도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도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에서 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는 자신을 심판자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스는 교회도 심판의 대상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후스는 계급화된 제도교회가 곧 하나님의 교회는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교황이든 주교든 어느 누구도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를 세울 수 없으며 만약 그 가르침이 거짓이 분명할 경우에 신자는 교황이나 주교의 명령에 불복종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후스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평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교회에 대하여에서 특별히 후스는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입니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한 말씀은 잘 기억하면서도, “너희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기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라는 말씀은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회피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에서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좋아하지만 가난, 침묵, 겸손, 관용, 덕행, 인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릴 때 친구들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체코의 친구들에게”)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교활한 사람들, 특별히 선하지 않은 사제들, 즉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구세주가 말씀하신 사제들을 주의하십시오.” 사실 모든 교회의 문제는 정확히 성직자들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루터에게 전달해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교회사가들은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사람으로, 후스는 혁명 전야에 시끄럽게 운 거위, 그리고 결국 루터는 종교개혁을 완성한 사람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는 얀 후스와 체코의 종교개혁의 독창성을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후스는 독자적인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위클리프를 표절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후기 체코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을 얻게 됩니다. 후스가 교회를 위클리프의 개념적 언어로 표현한 것은 맞지만, 후스의 뿌리는 위클리프가 아니라 체코의 토착적 종교개혁 사상가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자신의 고향인 영국이나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특별히 보헤미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후스는 체코에서 새로운 대중적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후스는 오랜 체코의 토착적 개혁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헤미아가 위클리프라는 외래전통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만든 요인은 다름 아닌 체코의 토착적 개혁전통이었던 것입니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얀 밀리치입니다. 그는 개혁의 중점을 성만찬에 두었습니다. 밀리치는 교회나 수도원 담장 밖에서의 영적 개혁을 주장했고 그것을 과감히 실천했습니다. 그는 특히 프라하 중심 홍등가에서 창녀들에게 체코어로 성만찬을 베풀며 체코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그 때가 후스가 갓 태어나 한 살이던 1372년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던 창녀들이 복음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마셨습니다. 그 결과, 프라하에서 악명 높았던 창녀촌이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2백 명의 창녀들이 여기서 옛 직업을 버리고 밀리치의 열정적인 지지자로 변신했습니다. 그것이 체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밀리치는 거기서 수시로성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을 선포하고 성만찬을 베풀었는데 한 시간 쯤 후에 이 가난하고 배고픈 창녀들이 밀리치에게 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배고파요.’ 밀리치는 다시 말씀을 선포하고 성만찬을 베풉니다. 잠시 후 가난하고 굶주린 창녀들이 다시 밀리치에게 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또 배고파요.’ 밀리치는 다시 말씀을 선포하고 성만찬을 베풉니다. 보십시오! 가난하고 배고픈 창녀들에게 떡과 포도주는 단지 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영적인 양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6:51)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만찬이 체코 종교개혁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단지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사회저변의 열린 식탁 운동이었습니다. D. 크로산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가장 밑바닥 민중들 사이에서 영적인 치유(spiritual healing)와 물질적 음식(material eating)을 나누는 나눔의 평등주의였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예수의 이 식탁(밥상)공동체를 그들의 삶 속에서 재해석해 실천했으며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연결시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의 식탁교회의 식탁으로 흡수되었고 주의 만찬제의적 의식으로 바뀌면서 그 종말론적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주의 만찬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위한 기본적 질서라기보다 교회의 예전적 질서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돌려놓은 이가 바로 밀리치입니다.

 

결국 밀리치는 아비뇽으로 소환되어 이단선고를 받았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 마테이가 스승의 생각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역시 성만찬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오직 진정한 성만찬을 통해서만 고쳐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체코의 종교개혁자들은 화체설이라는 가톨릭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사제가 기도할 때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교리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적은 제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동일한 기적이 사회 안에서도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도 주인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대안적인 교회는 곧 대안적인 사회를 의미해야 했습니다. 그 둘이 불이(不二)여야 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체코 종교개혁이 루터의 종교개혁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때문에 마테이는 끊임없이 평신도들이 성만찬에 참여한다고 강조했고 그 역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대안적인 교회는 실제로 대안적인 사회를 의미했습니다. 후스주의 운동으로 인한 혜택이 실제로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후스주의 개혁운동 중에 교회가 소유했던 토지의 75% 이상과 수도원 건물 170개가 사회로 환원되었습니다. 15세기에 전 유럽을 걸쳐 이렇게 봉건적 권력과 질서가 파괴된 곳은 체코 말고는 없었습니다. 체코의 가난한 농민들이 후스주의 운동을 광범위하게 지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체코 종교개혁 운동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여성들이 높은 영적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후스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장에서 그들은 남성들과 함께 전사로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프라하에는 많은 여성 설교자들이 활약했습니다. 후스주의는 여성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허용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후스주의 운동의 핵심적 성격을 가히 철저한 기독교 평등주의’(radical Christian egalitarianism)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성찬에 대해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애찬 때 각자가 음식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요즘 포트락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것이 한 곳에 모아 진 다음 모두에게 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각 가족이나 각 그룹이 자기네들이 가져온 음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자기네끼리 먹었습니다. 당연히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이것이 교회에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성찬의 본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어서 형제자매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의 근본의미를 설명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자가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체험하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밥상)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나라는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 열린 식탁 공동체였습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자들과도 함께 먹고 마시는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낯선 광경이었던지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를 가리켜 먹보’, ‘술꾼’,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주님의 식탁이 고린도교회에서 왜곡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식탁(밥상)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것은 곧 고린도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세교회에서도 주님의 식탁이 왜곡되었습니다. 심지어 사제들은 성만찬을 베풀고 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체코 종교개혁자들에게 성찬을 바로 세우는 것은 곧 교회개혁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찬의 빵과 잔을 받음으로써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고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와 계층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중세교회는 성직자들에게만 떡과 포도주를 다 주고 평신도들에게는 빵만 주며 차별했습니다. 그래서 체코의 종교개혁자들이 이종성찬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종성이란 평신도들에게 떡과 함께 포도주도 주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 가톨릭의 경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 평신도들도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양형영성체’, 즉 포도주까지 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직도 가톨릭교회는 후스 때와 마찬가지로 사제는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지만 신자는 떡만 받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크리스천들은 교회에서 가끔 베푸는 성찬예식 때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종성찬이 베풀어지기 위해서는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가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평신도들에게 성찬잔을 베푸는 것을 이단이라 공격했습니다. 당시 성만찬에서 사제는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았지만 일반 신자는 떡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성혈, 즉 포도주는 실수로라도 흘리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우둔한 평신도들이그리스도의 피를 소홀히 하여 흘러넘치게 할지 모른다며 포도주는 사제들에게만 주었습니다. 하지만 체코의 종교개혁자들은 일반 신자들도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아야 하고 그래야 온전한 성만찬(full communion)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들에게 주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차별이 철폐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곧 교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이 먼 훗날 묵시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내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잔의 개혁이 이렇게 체코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찬잔이 그렇게 교회와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찬잔이 교회 안에서의 평등주의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회 안에서도 같은 것을 의미해야 했습니다. 대안적인 교회는 곧 대안적인 사회와 한 가지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다시 강조하지만, 체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가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루터는 독일농민들이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원하자 제후 및 지주들과 결탁하여 농민들을 유혈로 탄압했습니다.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은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근본적인 변혁과 봉건체제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는 루터의 개혁보다 후스의 개혁을 거의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후스의 개혁이 실패한 개혁이어서라기보다는 그 개혁이 보다 근본적이고 철저한 개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후스를 소홀히 한 이유는, 후스의 개혁이 실패한 개혁이어서라기보다 교회개혁의 진정한 의미가 그 안에 담겨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과연 어느 목사가 자신들의 교권을 흔들 후스의 개혁정신을 성도들에게 소상히, , 그리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후스는 단지 루터의 개혁을 위한 나팔수 정도로 격하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후스의 개혁이 루터의 개혁보다 오히려 진정 한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스의 개혁정신이야말로 이 시대와 교회가 계승해야 할 참된 종교개혁정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밀리치와 마테이가 후스의 뿌리입니다. 후스는 단지 영국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위클리프의 사상을 독일의 루터에서 전해준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밀리치와 마테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체코 토착적 종교개혁 운동의 독특한 성만찬 신학에 기초하여 체코 종교개혁의 꽃봉오리로 활짝 피어올랐던 사람입니다. 체코 종교개혁은 위클리프의 복제품이 아닙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단순한 전야가 아닙니다. 체코 종교개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100년 전, 체코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종실 체코 선교사가 말하다시피, 힘없는 소수민족의 이 실패한 종교개혁은 한국교회로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만 바라보고 다양한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선 후스의 종교개혁부터 기념되어야 합니다.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한 한국 개신교회는 2015년 후스 600주년 2017년 루터 500주년 20193.1운동 100주년으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일정 속에서 혁신의 동력과 계기를 찾아야 합니다.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1414-1418)에서 이단으로 선고를 받고 141576일에 전격적으로 화형 당했습니다. 원래 콘스탄츠 공의회의 목적은 3명의 교황으로 분열되어 있는 가톨릭교회를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공의회는 마르티노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해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교회개혁의 화두가 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기로 하고 후스에게 소환장을 발부합니다. 내적 통일을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변안전 보장을 믿고 콘스탄츠로 갔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3주 후, 그는 전격적으로 체포됩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신조화하고, 변호하고, 설교하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 받습니다. 화형 당일 감독들은 후스에 대한 정죄의식을 진행합니다. 그의 사제복을 벗기고 그의 머리에는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모자를 씌웠습니다. 거기에는 이단들의 주동자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후스는 이 때 나의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가시관을 쓰셨는데, 그렇다면 그를 위하여 내가 이 가벼운 관 하나 쓰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스는 사슬에 묶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주께서는 나를 위해 이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이셨는데, 그렇다면 내가 왜 이 녹슨 사슬을 부끄러워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화형 기둥에 묶인 후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순간의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며,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주님의 팔에 던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여,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나의 대적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장작이 그의 목까지 쌓였을 때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이렇게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당신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 하고 있지만 백년 후에는 불태울 수도 끓일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자 후스는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마침내 심한 불길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부른 찬송은 시편 31편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의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후스가 최후를 기다리며 감옥에서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 서신은 기독교 문학에서도 최고봉으로 치는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그리스도여, 저는 비록 약하오나 당신의 뒤를 좇도록 이끌어 주소서. 당신이 직접 이끌지 아니하시면 우리들은 당신을 좋을 수 없나이다. 나의 영혼을 강건케 하셔서 기꺼이 감당하도록 하소서. 만약 육신이 약하거든 당신의 은혜로 앞장을 세우소서. 은혜가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고 제 뒤에 따르게 하소서. 당신이 아니시면 당신을 위하여 잔인한 죽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나에게 두려움 없는 심장과 올바른 신앙과 요동치 않는 소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어 당신을 위해 인내와 기쁨으로 저의 생명을 바치게 하옵소서, 아멘.”

 

후스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어 후에 칼뱅주의와 합류하였고 한 부류는 기독교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모라비아 형제단이라 불리는 독립교회로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리의 일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가 1735년에 영국에서 미국 선교사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횡단할 때의 일입니다. 배가 뒤집힐 정도의 폭풍 속에서 그는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 한편에 너무도 고요하고 평안한 목소리로 찬송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웨슬리는 대체 저들이 누구기에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전혀 요동함 없이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 궁금해 다가가 물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후스의 후예들인 그들의 믿음을 보고 웨슬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담대하게 주의 일을 담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도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감명을 받아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우리가 부르는 많은 감동적인 찬송가의 작사자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늘로써 내리사,’ ‘천부여 의지 없어서’, 그리고 만 입이 내게 있으면등 현재 교회에서 많이 부르는 은혜로운 찬송가 가사들을 모두 그가 작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만 입이 내게 있으면은 웨슬리 형제들과 많은 교류를 하던 모라비안 신도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어느 날 찰스 웨슬리는 모라비안 평신도와 저녁식사를 하던 중 그 사람이 만약 자신에게 천 개의 입이 있다면 자신은 그 입을 모두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찬양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작사한 것이 바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이라는 찬송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며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다 찬송하겠네.” 그런데 왜 그 모라비안 평신도는 만약 자신에게 천 개의 입이 있다면 그 입 다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찬양할 것이라는 소원을 말하게 된 것일까요? 저는 그 뿌리가 후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혹한 사실이지만, 후스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가들이 화형을 당할 때 모두 찬송을 부르면서 죽자 사형집행관들은 먼저 철사로 그들의 입을 꿰매고 나서 사형을 집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거기서부터 후스의 후예들에게는 만약 자신들에게 입이 천 개가 있다면, 그 입을 다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겠다는 간증이 만들어 진 것은 아니었겠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이 찬송 부를 때에는 적어도 이런 의미를 알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루터가 작사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잘 압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크리스천들은 루터의 찬송가뿐만이 아니라 만 입이 내게 있으면을 후스의 찬송가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후스에 대한 화형은 체코에서 전 민족적인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귀족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로마교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습니다. 프라하대학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은 이 결의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물론 로마교회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우선 모든 성직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후스의 사상을 채택했거나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모든 사람을 파문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박해가 극도로 심해지자, 보헤미아 개혁가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의사당을 공격해 12명의 의원들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밑에서는 뾰족한 창을 든 사람들이 빽빽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위 ‘1차 창문 투척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후스주의자들이 보헤미아를 장악했습니다. 격분한 교황은 십자군을 모집해 1420년부터 1431년까지 5차례나 보헤미아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후스주의자들은 얀 지쉬카 장군의 지휘 아래 똘똘 뭉쳤습니다. 맹인으로도 알려진 이 장군의 지휘 아래 후스주의자들은 교황이 보낸 다섯 번의 십자군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를 기회로 후스주의는 오히려 유럽 전역으로 확대돼 나갔습니다. 다급해진 로마교회는 1433년에 바젤공의회에서 후스주의자와 협정을 체결합니다. 불행히도 이 협정을 놓고 후스주의자들은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었습니다. 결국 1434년 형제간의 전투로 후스주의는 급격히 약화되고 맙니다. 형제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온건파는 로마교회와 평신도의 성찬잔을 허락하는 문제만을 다루는 최종협상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급진적 후스주의자들은 체코형제단을 구성했습니다. 결국 보헤미아는 1620년 유명한 백산전투(Battle of White Mountain) 이후 가톨릭교도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이후 체코는 300년 동안 재()가톨릭화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후 체코의 종교개혁은 체코의 역사에서 거의 완전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약 8만 명의 비밀 개혁교도들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1백 년 이상 존재했습니다. 결국 제1차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설립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선포되자 비로소 모든 박해가 끝나게 됩니다. 그 때 서로 각기 따로 존재하던 루터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체코개혁교회가 1918년 하나로 연합하여 오늘의 체코형제복음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 교회가 중부유럽의 첫 연합교회입니다. 이 새 연합교회의 상징은 성경 위에 놓인 성찬잔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형제단의 상징이고, 성찬잔은 물론 후스의 상징입니다.

 

이 설교의 제목은 거위의 꿈입니다. 사실 이 제목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 난 꿈이 있었죠라고 시작하는 이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저도 이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단지 멋진 곡조와 가사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노래의 제목이 후스가 꾸었던 꿈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후스거위를 뜻합니다. 어린 후스는 빨리 사제가 되어 호의호식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거위의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한 후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스가 꾼 새로운 교회에 대한 꿈이 제2거위의 꿈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 난 꿈이 있었죠 /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 혹 때론 누군가가 /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 /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 그 꿈을 믿어요 / 나를 지켜봐요...” 후스의 화형 6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거위의 꿈을 함께 꿀 수는 없을까요.

 

후스가 화형당해 순교당한 지 500주년이 되는 1915년에 체코인들은 제1차 대전의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프라하 광장 한가운데 얀 후스의 청동상을 세웠습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와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후스의 뒤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상이 있습니다. 이 아기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도 새 생명이 태어나 후스의 정신과 신앙을 이어갈 것을 상징합니다. 이 동상의 제작자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인했던 후스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화연 속에서 깨어났다. 그의 육체는 타버렸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남았다. 후스의 순교로 인류는 진리로 향하는 길로 인식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후스의 봉기는 위대한 혁명이었고 인류는 그 안에서 중세의 종교적 압제의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었다. 이는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선을 위한 작은 민족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이 청동상 주위에는 또한 진리가 아닌 것은 따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후스는 화형되기 전 남긴 글에서 그가 평생 무엇을 추구했는지 밝혔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왜냐하면 진리가 너희를 죄와 악마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요한복음 8:32의 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로 후스는 목숨을 위해 진리가 아닌 것과 일체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 후스의 문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만일 그런 성격의 후스에게 어울리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명자꽃일 것입니다. 엄청나게 크고 붉은 겹꽃의 명자꽃 말입니다. 꽃이 마치 불덩이와 같아서 한참 머물러 바라보게 만드는 이 꽃은 분명 진리의 복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거짓과 일체 타협하지 않으며 크게 찬송을 부르면서 함께 불덩이가 된 후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일 것입니다. 아마도 후스는 구약성서의 한 구절에서 훌륭하게 묘사한 다음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분명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7-9) 그는 정말이지 그 중심에 진리를 향한 뜨거운 불이 붙어 있던 사람이고 그 불이 너무 뜨거워서 육신을 불태우는 장작더미의 불길 정도는 전혀 두렵지 않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후스와 그의 후예들이 벌인 후스주의 운동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진리 안에서 자유를 향한 위대한 투쟁의 역사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후스는 타락한 교회에 맞서 근본적인 도전장을 던진 사람이었고, 그의 삶과 투쟁은 교회를 넘어 낡은 사회질서 전체와 맞선 것이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후스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지만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가 화형에 처해진지 무려 584년 만에 후스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하였고 그를 교회의 개혁자로 명명했습니다. 지금 후스는 단순히 교회개혁가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애국자로 지금까지 체코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실로 그는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했고 프라하 대학 안에서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체코어 철자법을 확립하였고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후스의 순교일인 76일은 체코에서 후스의 날로 지정되어 휴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후스가 얼마나 체코인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인지는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스메타나의 곡 <나의 조국>의 제5악장의 제목이 타보르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타보르란 도시는 보헤미아 남부에 있는데 후스파에 의해 세워졌고 후스전쟁 중 후스파들의 근거지였습니다. 이 이름은 성서의 다볼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타보르에서 후스의 후예들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살았던 것과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후스는 체코에서 민족정신과 저항정신을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스메타나는 후스의 종교개혁운동을 민족주의적인 자기 곡에 삽입했던 것입니다.

 

올해 201576일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화형당해 순교한지 정확히 60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매년 7월 첫 주일을 얀 후스의 종교개혁주일로 기념하고 지켜나가길 제안합니다. 한국교회는 후스와 루터라는 양 날개를 가지고 초대교회가 보여준 그 이상적 삶과 신앙의 자리로 힘껏 날아올라야 할 것입니다. 후스는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제2의 종교개혁의 꿈을 꾸게 합니다. 다시 그의 거위의 꿈을 꾸게 합니다. 그는 이 아름다운 꿈에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복음의 본래 정신으로, 신앙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부패합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타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아름다운 사람을 들어 당신의 교회를 친히 새롭게 갱신하십니다. 남미의 돔 헬더 까마라 주교가 이를 그의 시 종교개혁 주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 연약한 인간의 손에 위탁되어 있습니다 / 그래서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 교회는 늘 비틀거립니다 / 죄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 때로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도 합니다 /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 그러나 그러면서도 언제나 / 그리스도의 교회로 머물려 애쓰면서 / 신앙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 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 우리가 몰아넣었던 모든 잘못에서 건져낼 수 있는 / 충분한 용기와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영이 친히 / 교회를 해방시켰습니다 / 그러면 교회는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며 / 비록 온갖 죄와 허물로 얼룩져 있지만 / 전보다 더 아름답게 됩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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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015 [2015.08.09]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 file 2015.08.11 이재정 신부
26 2015 [2015.08.02] Follow Up 하시는 예수님 file 2015.08.06 전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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