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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

(마가복음 6:30-34)

 

2015830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바쁜 삶

 

지난여름, 세계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북에서 남으로 DMZ를 넘어 내려왔습니다. 여성들이 앞장서서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내겠다는 Women Cross DMZ행동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뉴욕에서 어머니처럼 저를 아껴 주시던 분도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을 서울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에서 반갑게 재회했습니다. 그런데 분단 극복의 염원으로 칠십 노구를 이끌고 그 먼 뉴욕에서 출발해 베이징을 거쳐 평양을 방문하고 DMZ 를 넘어 오신 그분이 저를 뜨겁게 안아주며 하신 첫마디가 무엇이었을까요? “Are you still busy?” 일 년 전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제 바쁜 생활을 보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저를 잘 아는 분들이 제게 주는 인사말이 달라졌습니다. “바쁘죠?” 흔하고 편한 인사말인 잘 지내죠?”가 아니라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마음 불편한 바쁘죠?”라는 인사말을 더 듣게 된 것은 제 삶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제 웹 캘린더부터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것에는 교회 일, 문화원 일, 연대사업, 연구과제, 가정사 등 제 삶의 여러 영역이 각기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거의 빈틈없이 꽉 차 있는 색상배열은 제가 시간을 쪼개어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제 생활이 그러니 바쁘죠?”라는 말을 인사말로 듣게 된 것이겠지요.


저도 일을 줄이고 싶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들은 대부분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하기 위한 노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더 열심히 하지 못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저 혼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만큼, 아니 저보다 바쁜 분들이 선한 의지로 함께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홀로 평안하자고 일을 거절하거나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일이 많은 것이 고단하긴 하지만, 선한 벗들과 함께이니 고맙기도 합니다.


그렇게 제가 하는 일들이 대부분 의미 있는 일들이고, 또 저 홀로 짐을 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저를 힘겹게 하는 것은 일 자체인가, 아니면 일을 바라보는 내 의식인가? 이 의문은 제 공부와 수행의 스승인 폴 니터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명료해졌습니다.

 

활동적 삶

 

2년 전 귀국 후 니터 교수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영상통화를 합니다. 학문적 토론도 하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논의하지만, 주로 제 삶에서 겪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지난달에는 너무 바빠 죽겠다고, 제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저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국 생활에 비하면 뉴욕 생활은 한가로운 것이었다고 엄살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다 들은 니터 교수는 우연의 일치라며 마침 그 주일에 성당에서 당신이 할 강론 주제가 예수님의 관상적 삶(contemplative life)’활동적 삶(active life)’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강론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의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의 조화였습니다. 관상은 내적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 안에 가만히 머무는 것, 나 자신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니터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가 활동적 삶이라는 표현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바쁜 것(being busy)’활동적인 것(being active)’을 혼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우선 비슷한 점은 두 삶 모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제가 바쁘다고 할 때의 마음상태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바쁘다고, 바빠 죽겠다고 느끼거나 표현할 때는 대개 염려, 불안, 조급함, 두려움 같은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에 휩쓸려 있습니다. 그런 부정적 마음 상태에서 일을 하면 힘이 빠지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는 일은 비슷해도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이 없을 때는 오히려 일을 하면서 힘이 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활동적 삶은 신체적 운동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활동할수록 삶의 근육이 튼튼해지고 건강해집니다. 또한 활동적 삶에는 신명도 있어 힘든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선한 벗들과 함께라면 신바람이 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 그 사실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군중을 가르치고 돌보고 먹이느라 정작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바빠 죽겠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조금 쉬려고 떠난 외딴 곳으로까지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도 아몰랑하며 자신들만의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더 고단해졌지만, 그것은 신체적 운동 후에 느끼는 기분 좋은 피로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은 바쁜 삶이 아니라 활동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왜 어떤 사람은 힘이 빠지고 왜 어떤 사람은 힘을 얻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해줍니다. 결국 의식의 상태가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의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식의 변화일 것입니다. 물론 의식을 바꾸는 것은 자기최면이 아니어야 합니다. “나는 바쁜 게 아니야... 나는 활동적인 거야...” 그렇게 주문처럼 왼다고 해서 바쁜 삶이 저절로 활동적 삶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의식의 변화를 위해서는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고요히 머물고, 나 자신과 깊이 만나는 관상적 삶입니다.

 

관상적 삶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은 관상적 삶과의 관계에서 차이를 더 잘 드러냅니다. 바쁜 삶은 관상적 삶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바쁨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꽉 차있으면 하나님 안에 고요히 머물 수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바쁨은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이 머무실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활동적인 삶은 관상적인 삶과 조화될 수 있습니다. 두 삶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활동적 삶 없는 관상적 삶은 무책임한 삶이 되기 쉽고 관상적 삶 없는 활동적 삶은 바쁜 삶이 되기 쉽습니다. 제가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니터 교수는 바빠 죽겠다는 제게 일을 좀 줄이라는 조언 대신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더 늘리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시간을 더하는것이지만 영적으로는 부정적 생각과 감정을 빼는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니터 교수는 예수님을 관상적 활동가가 아니라 활동적 관상가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활동적 관상가에서 앞의 형용사 활동적보다 뒤의 명사 관상가에 의미적 강세를 둡니다. 즉 관상가인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수행하며 하나님과 하나 되셨기에, 고통의 땅 갈릴리로, 세상으로 돌아와 활동가로 사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니터 교수는 광야에서의 영적 침묵광장에서의 정치적 외침으로 이어진다고 표현합니다.


신학적으로는 토론할 것이 많았지만, 예수님은 활동적 관상가였다는 니터 교수의 이야기는 저의 일과 수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주었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줄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일은 그만 둘 수는 있어도 줄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던데, 십분 동감합니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하나입니다. 바쁜 삶이 아니라 활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관상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하루에 한 시간이든 삼십 분이든 구별된 시간 동안 홀로 하나님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고된 사역을 마치시고 산으로 올라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 6:46) 하지만 활동가들이 그런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일을 하면서 활동가들을 만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에게는 수행보다 수면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쉼 없이 활동하면서 소진되어가는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제가 갖게 된 꿈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에게 영적 쉼과 성찰의 기회를 갖도록 돕는 사회적 영성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입니다. 시민운동단체의 활동가들을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초대해, 명상, 심리상담, 마사지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합니다. 정갈하며 영양가 있고 마음을 달래 주는 음식을 대접합니다. 아무런 의무도 없습니다. 유일한 의무가 있다면 자신을 쉬게 하는 것, 비우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밀린 잠을 자도 좋고, ‘멍 때리는시간을 가져도 좋고, 자연 속을 한가로이 산책해도 좋고, 음악을 들어도 좋고, 독서를 해도 좋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입니다. 종교의 울타리도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누구나 와서 쉬면서 사회와 자신을 함께 변혁할 수 있는 내적 힘을 기릅니다. 활동가들에게 이런 꿈을 이야기하면 언제 시작할 거냐고, 빨리 시작하라고 저를 다그칩니다. 그러면 저는 나에게 새 일을 하나 더 맡기겠다는 거냐고, 웃는 소리를 합니다. 그만큼 내적 삶에 목마른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영성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의식을 바꾸면 지금 당장 관상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관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한 송이 꽃에서 아름다움의 세계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짧은 순간은 심지어 몇 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뉴욕에서 매 주 일요일 저녁 작은 채플에서 친구들과 명상을 했습니다. 하루는 가톨릭 신부님이 오셔서 우리의 명상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같은 시간에 채플 건너편 홀에서 흑인 신앙공동체의 찬양집회가 있었습니다. 흑인 특유의 뜨거운 찬양과 연신 터져 나오는 할렐루야!”, “아멘!” 소리 때문에 우리는 도무지 명상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신부님이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은 찬양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은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호흡을 세며 명상에 집중하는데, 희한하게도 마음이 고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찬양집회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 불과 몇 초 동안의 완전한 정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경험한 침묵은 보통 때 한 시간 동안 경험했던 침묵보다 더 깊고 짙었습니다. 이렇게 몇 초의 관상적 순간도 삶을 깊고 고요하게 하여주는데, 하루에 최소한 몇 분만이라도 하나님과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우리의 바쁜 삶은 활동적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성찰은 제가 바쁜 사람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관상적 삶에서 게을렀기 때문에 활동적 삶이 아니라 바쁜 삶을 힘겹게 살았던 것입니다. 관상적 삶을 잘 살아야 활동적 삶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일이, 우리의 활동이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활동가의 공동체

 

새길교회는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해 일하는 평신도 활동가의 공동체입니다. ‘사회문제가 되어 있는 교회와 문제를 문제로 돌려 막고 있는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평신도 스스로 주체적, 주도적으로 실천해야 하니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바쁜 삶이 아니라 활동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관상적 삶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관상적 삶의 신비는 우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여름이 끝났습니다.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이 시작합니다. 오늘의 말씀증거 주제에 맞게 고쳐 말하면 부지깽이도 활동적인가을입니다. 이 가을, 관상적 삶을 통해 생긴 내적 힘으로 공동체 자매형제들과, 우리 사회의 작은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확산하는 활동적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다짐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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