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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다음 30년의 상상 Part 2: 연약함이 길이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 - 고린도후서 11:29~30

 

드물긴 하지만 평신도교회 혹은 평신도 주도 교회를 목표하며 생긴 교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지속되지 못하고 목회자 중심 교회로 되돌아가거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삼십여 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새길교회는 매우 강인한 평신도들의 공동체일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안에서 일어나는 물음이 하나 있습니다.

 

새길을 지속시킨 것은 강인함일까요 연약함일까요 ?

 

우리는 강함을 자랑스러워하고 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화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일차원적 힘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강함이 선인 세상에서 약함은 죄입니다. 강함과 약함의 대조도 극단적입니다. 이제는 '20 80'도 아닌 ‘1 99’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크리스티아 프리랜드는 ‘0.1  99.9’의 세계라고 주장하기조차 합니다. 교회는 어떤가요? 오늘의 한국 교회는 두 종류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힘 있는 교회와 힘 있는 교회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힘 없는 교회’. 현실의 덩치는 다르지만 강함에 대한 욕망의 크기에서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오늘 읽은 바울의 고백은 전복적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속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헐뜯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자부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 ) 모두 강한 사람, 혹은 강해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의 강함 대신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문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바울이 강했을 때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박해했습니다. 그가 약해졌을 때 비로소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연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총이 바울과 초대교회 공동체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기원에는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연약함이 그리스도교의 길입니다.


저는 새길을 지난 28년 동안 지속시킨 것도 강인함이 아니라 연약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약함은 무엇일까요? 많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제 2의 창립, 다음 30년을 위해 함께 성찰하고 싶은 두 가지 연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새길은 종교의 외적인 면에서 연약한 공동체입니다 .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상징, 교리, 제도, 의례 같은 것을 종교의 외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축적적 전통이라고도 부릅니다. 스미스는 이 외적인 축적적 전통을 내적인 인격적 신앙과 대비시킵니다. 그리고 내적 신앙보다 외적 전통이 중심이 되는 것을 종교의 물상화라고 합니다. 이때의 종교는 사물과 같은 것입니다 .


스미스는 종교의 외적 전통에 집착하는 물상화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외적 전통이 강해야 신앙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통의 형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신앙을 이야기해주고, 해석해주고, 의례를 통해 재체험하게 해 주는 외적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외적 전통은 내적 신앙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저는 전통과 신앙은 벽난로와 장작불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장작불은 한편으로는 뜨겁고 강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연약합니다. 비 내리고 바람 불면 쉽게 꺼집니다. 장작불은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벽이 있을 때 꺼지지 않고 계속 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벽난로의 목적은 장작불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전통은 신앙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심장은 외적 전통이 아니라 내적 신앙입니다. 그 어떤 종교도 교리나 제도 같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내적인 신앙에서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삼위일체 교리가 매력적이어서, 장로나 집사 직분과 같은 제도가 마음에 들어서, 성만찬이 좋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셨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감격해서, 요새 말로 심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셨나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외적 전통 때문이 아니라 내적 신앙 때문입니다.


문제는 본말의 전도입니다. 전통의 벽이 너무 견고해져서 그만 내적 신앙의 불을 꺼뜨려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가르침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교리가 더 중요해집니다. ‘예수보다도 예수를 믿는 이들의 교회가 더 중심이 됩니다. 1442년 플로렌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아무리 자선을 베푼다 해도,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를 흘린다 해도, 교회 안에 있지 않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선한 삶을 살아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질지라도, 교회라는 제도 안에 없으면 구원으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가 구원자가 됩니다. 이는 물상화된 종교의 극단적 사례입니다 .


벽난로와 같은 외적 전통이 강해야만 신앙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종교사는 종교의 외적 전통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종교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지원을 받았던 불교나 무굴 제국의 힘을 등에 업은 이슬람은 그 외적 전통의 강고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의 쇠락과 함께 인도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현저히 약화되었습니다. 반면, 통일된 교리, 제도, 조직이 없었던 힌두 신앙은 민중의 삶 속에 깊고 넓게 스며들어 지금껏 역동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장작불이 없으면 벽난로는 쓸모없는 빈 구석일 뿐입니다. 벽난로가 장작불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존재 이유를 잃듯이, 교회도 신앙이 아니라 교회 전통을 지키려고 할 때 의미를 잃습니다.


새길은 그 동안 벽난로를 꾸미는 것보다 장작불을 지피는 것을 더 애써왔습니다. 물론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새길은 전통의 유지를 위해서는 최소주의적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그것을 잘 표현해 주는 새길의 정신 중 하나는 깊은 신앙 넓은 신학입니다. 그것은 내적 신앙은 깊게 하되 신학은 교리적 전통에 갇히지 않고 현대성과 대화하며 넓히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새길의 제도와 운영 규약도 최소적입니다. 최근 교회의 민주적 운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길교회의 제도에 대해 문의해 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새길의 사는 방식을 말씀드리면 생각했던 것보다 특별한 것이 없어 실망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외적 교리, 제도, 조직의 면에서 보면 새길은 분명히 연약하고 불안정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새길은 외적 전통이 주는 안정보다 내적 신앙의 자유를 더 기뻐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새길은 전통이 신앙을 위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외적 전통의 연약함은 새길의 자랑입니다. 길희성 형제님은 종교는 신자들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길의 첫 세대는 그들의 가슴 속에서 타오른 신앙을 평신도교회라는 새로운 전통에 담았습니다. 이제 제 2의 창립을 위해 오늘 우리가 애써야 할 것은 외적 전통을 계승하고 혁신하면서 내적 신앙의 장작불을 계속 지필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이들의 공동체

 

공동체 라는 명사는 참 듣기에도 좋고 말하기에도 좋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공동체라는 표현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과문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조폭 공동체’, ‘악인 공동체’, 이런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인간이 공동체를 말할 때 선함을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공동체는 평화로운 낙원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도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 제가 생각하는 새길의 두 번째 연약함은, 새길이 상처 입은 이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상처를 입고 새길에 찾아왔습니다. 상처가 없었다면 편안한 교회를 떠나 낯선 새길로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상처는 다양합니다. 교리주의, 교권주의, 정치적 입장, 관계적 갈등 등을 이유로 차별 받거나 배제된 경험에서 생긴 상처들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개인들의 상처가 너무 다양해서 단일한 치유 방식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있어 책임지고 상처를 치유해 주지도 않습니다. 먼저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치유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나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그것이 갈등을 일으켜 새로운 상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이런 갈등과 상처를 경험하게 되면 속상하고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렇잖아도 고단한 인생인데 교회에서까지 이런 갈등과 상처에 시달려야 하나 생각하면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힘들 때면, 저는 레너드 코언의 “Anthem”이라는 노래의 가사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There‘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모든 것에는 깨어진 틈이 있지. 바로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거야.” 깨어진 틈 같은 우리의 상처, 우리의 연약함이 바로 은총의 빛이 우리 삶으로 들어오는 조건이며 통로라는 것입니다 .


적지도 많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제가 배운 것은, 상처 입고 갈등을 겪을 때마다 제 마음의 키가 조금씩 자랐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성숙한다는 것은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각은 우리에게 새로운 물음을 던져 줍니다. 만약 우리에게 상처가 없었다면, 공동체가 함께 겪은 갈등이 없었다면, 우리는 성숙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우리는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갈등은, 어쩌면 상처 입은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성숙하게 하는 은총인지도 모릅니다.


공동체의 갈등을 생각하면 저는 바닷가의 자갈들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매끈하고 둥글둥글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모나고 날카롭고 울퉁불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백 년, 수 천, 수 만년 동안 달과 바람과 바디가 보내 준 은총의 파도를 받으면서, 서로 부딪치고, 함께 깨어지면서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공동체의 갈등도 우리를 더 단단하고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는지요.


물론 갈등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상처를 자매형제에게 보여주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연약함을 서로 나누려면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입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가장 강한 사랑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성령이 주는 선물입니다. 사랑하려면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연약한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6)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파도처럼 움직여 서로 마찰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그렇게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과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게 되면, 우리는 헨리 나웬이 말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도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제가 느끼는 새길의 두 가지 연약함을 말씀 드렸습니다. 외적인 것의 연약함과 관계적 연약함입니다.2의 창립, 다음 30년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을 말씀 드린 것은, 아무리 훌륭한 비전과 계획이 있어도 우리가 바닷가의 자갈들 같은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드린 연약함 외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연약함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우리를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을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연약함을 은총으로 고백하며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함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9b) 연약함이 우리의 힘입니다. 연약함이 우리의 길입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라면 지겠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버틸 수 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도서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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