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79.128.177) 조회 수 275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정경일

"다음 30년의 상상 Part 1: 처음마음"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지혜가 넘쳤다. 모세가 그에게 손을 얹어주었던 것이다. 그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이미 모세에게 분부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 - 신명기349

  

새길은 새로운

  

요즘 우리는 2의 창립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면서 새길교회 창립 30주년인 2017년을 다시 창립하는 마음으로 맞아 공동체의 다음 30년을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지금 이대로 편안하게 지내다 30주년, 60주년, 100주년을 맞으면 되는 것 아닐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담을 안고 왜 우리는 제2의 창립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새길의 신앙과 삶의 방식이 늘 새로운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은 처음엔 새 길입니다. 그렇다면 새 길은 언제 옛길이 될까요? 새로움을 잃을 때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고 가고 또 가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새길이 발견하고 받아들인 소명이며 존재방식입니다. 오늘도 길 위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 길을 걷고 있는가? 이런 자기성찰적 물음이 피로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생적으로 길 위의 순례 공동체입니다. 무엇을 향한 순례일까요?


지난 창립 28주년 기념주일 토크콘서트 [처음마음]에서 창립 당시 말씀증거자 중 한 분인 김창락 선생님의 창립주일(198738) 말씀증거를 다시 읽었습니다. 새길의 의미와 목적을 밝힌 첫 말씀증거에서 김창락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세계내적인 하나의 제도나 기관으로 화석화 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세상과 관계없는 영혼들의 결사로 둔갑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친목단체도, 이익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역사변혁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속에 있으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늘 기존 사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사회로서 빛과 누룩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기존 사회의 변혁을 지향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끊임없이 기존 사회를 탈출해서 전진하는 도상의 교회를 세움으로써 하나님나라의 기적을 역사 속에 사건화 하는 종말적 구원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요약하면, 새길교회는 대안사회가 되기 위한 길 위의 탈()/()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신명기본문의 상황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1세대인 모세와 2세대인 여호수아 사이에 이루어진 계승과 혁신을 보여줍니다. 모세 세대는 -이집트라는 새 길을 시작했고 여호수아 세대는 -가나안이라는 새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새길도 1세대의 결단으로 제도교회에서 탈출했고, 2세대의 헌신을 통해 대안교회, 대안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탈/향의 과정에 있습니다. 중단 없이 탈/향의 새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숙명입니다. 새로움을 잃으면 우리는 더 이상 새길이 아닙니다.

  

새 길을 걷는 괴로움과 즐거움

  

토크콘서트 [처음마음]에서 길희성 선생님께 지난 28년 동안 가장 기쁘고 보람 있었던 경험을 물었을 때, 선생님은 화두처럼 괴로움을 말씀하셨습니다. 1세대는 무엇이 괴로웠던 걸까요? ‘직업적 목회자의 돌봄이 없는 것, 그것이 괴로웠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길이 시작될 때 이미 그 정도 수준은 넘었다고 믿습니다. ‘목회자 없는 교회모든 신자가 사제인 새길에서는 자랑이 아니라 기본입니다. 목회자의 돌봄을 받는 대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일 수는 있지만 괴로울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새길의 괴로움은 새로운 지적, 영적 모험을 멈추지 않는 고단함,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탈 하여야 하는 결연함, 언제나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고통 받는 이웃의 이 되는 행동의 부족함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최선이 우리의 한계라면 스스로를 인정하고 자족할 수 있지만, 우리의 한계가 정말 우리의 최선이었을까 하는 물음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길희성 선생님이 우리가 주일 말씀증거를 통해 나눈 정신과 우리 삶 사이의 괴리를 안타깝게 말씀하신 것도 새길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그런데 탈/향 공동체의 괴로움은 즐거움과 짝해 있었습니다. 새길의 1세대는 창립취지문에서 괴롭지만 즐겁게새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즐거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괴롭고 힘들더라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대안교회, 대안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스스로에게 성찰적 물음을 계속 던져야 하는 것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1세대는 교권주의와 교리주의와 교회주의의 종교적 이집트에 정주하며 안전하지만 노예로 사는 작은 즐거움보다,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유목민으로 살며 사막을 건너는 큰 즐거움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탈/향은 두려운 일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도 두렵지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두렵습니다. 가나안이 가까워 올수록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실제로 민수기를 보면 가나안을 다녀온 열 두 정탐꾼 중에 열 명은 가나안의 장대 같은거인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나 마찬가지라며 탈/향을 그만두자고 선동합니다. 그들의 사실 판단은 타당합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주장하던 다른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갈렙도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료 히브리인들에게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은 담대히 외칩니다. “야훼께서 우리의 편이시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민수기13, 14)


차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의 거인들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컸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길을 대안교회, 대안사회로 만드는 것은 두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가슴 설레고 즐거운 일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갑니다.


헌신: “누가 할 것인가?”

   

토크콘서트 [처음마음]에서 새길의 모세 세대인 1세대에게 제2의 창립을 위해 여호수아 세대인 2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한완상 선생님은 우리 모두 성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고, 길희성 선생님도 같은 맥락에서 신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김창락 선생님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라고 하셨고, 이삼열 선생님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는 에큐메니컬 마당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다 중요하고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물음은 누가 할 것인가?” 라는 물음을 수반하지 않으면 공허해집니다. 과제가 아무리 중요하고 좋아도 그것을 해낼 주체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해야 할까요? 모두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해야 한다는 모범답안은 자칫하면 아무도 하지 않는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에 속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체적 참여가 필요합니다.


토크콘서트 [처음마음]은 여러 의미와 의도를 담아 기획/구성되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 디테일만 말씀드리면, 첫째, 낭독자들을 창립 당시 네 말씀증거자들의 나이와 같거나 비슷하게 함으로써 2의 창립을 이끌 세대로 중장년 세대를 제시했고, 둘째, 김용분 선생님 가족 3대의 공연을 통해 공동체의 세대적 연속성과 조화를 나타냈습니다.


우선, 그날 토크콘서트에 참가한 네 말씀증거자는 창립 당시 모두 사십대 후반 혹은 오십대 초반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새길에서도 이 중장년 세대층이 두텁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최근에 더 강화된 현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야를 넓혀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그 답이 보입니다. 새길에 오시는 중장년 자매형제 대부분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청년 시절부터 열정적으로 헌신하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중장년이 되도록 열심히 헌신하면서 점차 교회 조직의 핵심에 접근하게 되고, 그 결과 교회의 인적, 구조적 모순을 목격하거나 경험할 기회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아직 교회권력 바깥에 있는 청년들이나, 헌신 없이 예배 때만 교회를 오는 선데이-크리스천은 경험할 수 없는 교회의 어둠을 보고 상처입고 실망하여 새 길로 온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중장년층의 세대적 특성입니다. 영적, 인격적, 사회적 발달 단계에서 볼 때, 이 세대에게는 꿈을 현실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전의 제도교회에 있을 때의 열정적 헌신만큼 오늘의 새길운동을 위해 헌신한다면 새길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아니,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1세대의 경험을 들으면서 2세대로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분들이 실현한 자유헌신의 균형 때문입니다. 창립 당시 공동체를 이끈 자매형제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왕성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신도 공동체의 예배, 사역, 생활을 위해 제도교회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시간을 쪼개어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돌보고, 사귀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발적 헌신 없이는 자신들이 얻은 자유를 계속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제도교회에 있을 때만큼 헌신할 수 있을까? 1세대만큼 헌신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응답에 따라 새길의 다음 30년이 결정될 것입니다.

  

모세 세대와 여호수아 세대의 협력

   

오늘의 본문은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의 협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여호수아도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없이는 가나안으로의 도 없는 것이지요. 또한 여호수아가 지혜가 넘치고 헌신적이었던 것은 모세가 그에게 손을 얹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의 개인적 계승이 아니라 1세대인 모세 세대와 2세대인 여호수아 세대 사이의 공동체적 협력입니다.


2세대의 등장과 함께 1세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이 바뀔 뿐입니다. 1세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본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2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적 지혜의 세대간 전승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시키넨센구’(式年遷宮, 식년천궁)입니다. 시키넨센구란 매 이십년마다 신궁을 옮겨 새로 짓는 의례입니다. 이는 이천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전통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천궁 과정을 통해 신궁을 짓는 기술과 방법이 선배 목수 세대에서 후배 목수 세대로 전수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길 2기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우리 2세대도 1세대의 경험적 지혜를 배워야 덜 위험하고 덜 혼란하게 탈/향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2세대를 중장년 세대로 국한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1987년 새길이 시작할 때 많은 청년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 청년으로 공동체에 참여했던 분들이 새길의 역사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왔고, 지금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새길의 매력 중 하나는 세대간 평등과 협력입니다. 돌아보면 세대간 긴장도 가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대간 평등과 협력이 잘 문화화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소모임 Beyond-새길의 독서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발제 및 토론 진행을 맡은 분은 모임의 가장 젊은 이십대 청년이었고, 토론에 참여한 분들의 연령층은 삼십대에서 육십대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토론에서 나이에 따른 차이나 차별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친구나 동료들의 토론처럼 평등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소요-숲과 길, 렉시오 디비나, 말씀과 명상, 고난함께-과 같은 소모임들, 운영위원회, 성가대등 각종 교회 모임에서도 여러 세대 자매형제가 소통하며 협력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노인에게서 배우고 새로운 것은 청년에게서 배웁니다. 새길의 모세 세대와 여호수아 세대는 서로 배우고 협력하며 탈/향의 여행을 함께 계속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45 2015 [2015.12.27] 다양성과 통합 file 2015.12.30 김이수
44 2015 [2015.11.29] 무엇을 희망하며, 무엇으로 살까 file 2015.12.23 권진관
43 2015 [2015.12.20] 나의 크리스마스 file 2015.12.23 강보미, 조성희
42 2015 [2015.12.13] 기다리시는 하나님, 되어가는 인간 file 2015.12.18 정경일
41 2015 [2015.12.06] 처음처럼, 더 예수답게: 반성과 새 결단을 위하여 file 2015.12.15 한완상
40 2015 [2015.11.15] 하나님 나라와 마치 아닌 듯한 태도 file 2015.11.20 전현식 교수
39 2015 [2015.11.08] 이웃 생명들과 함께 하기 file 2015.11.11 차옥숭
38 2015 [2015.11.01] 기억의 힘: 역사의 구원 file 2015.11.04 최만자
37 2015 [2015.10.18] 선 곁의 악 file 2015.10.23 정경일
36 2015 [2015.10.04] 원칙의 사람, 원만한 사람 file 2015.10.20 정수복 형제(사회학자/작가)
35 2015 [2015.10.11] 겉사람, 속사람 / 상호 의존하는 관계성 file 2015.10.16 강기철 / 류홍렬
34 2015 [2015.09.20]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file 2015.10.06 정원진 목사
33 2015 [2015.09.13] 이 매임에서 풀어주라 file 2015.09.23 구미정 교수
32 2015 [2015.09.06] 거위의 꿈 file 2015.09.11 장윤재 교수
31 2015 [2015.08.30] 바쁜 삶과 활동적인 삶 file 2015.09.03 정경일
30 2015 [2015.08.16] 예수 그리스도, 자유케 하사 섬기게 하신다 file 2015.08.26 변상욱 기자
29 2015 [2015.07.12] 다음 30년의 상상 Part 2: 연약함이 길이다 2015.08.20 정경일
» 2015 [2015.04.26] 다음 30년의 상상 Part 1: 처음마음 2015.08.20 정경일
27 2015 [2015.08.09]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 file 2015.08.11 이재정 신부
26 2015 [2015.08.02] Follow Up 하시는 예수님 file 2015.08.06 전인백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