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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은선 교수

 

“‘산 돌(살아있는 돌)’의 비유와                                                

                              산티아고 카미노(the way of Santiago)

(베드로전서 2:1~5)

 

 

2016612일 주일예배

이은선 교수(세종대   교수)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주님께 나나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있는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과 같이 되었으니, 신령한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 베드로전서 2:1~5 -

 

 

1.

저는 지난 418, 세월호 2주기를 막 보내고 프랑스 파리로 가서 약 한 달여의 시간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Santiago Camino)을 걷다가 돌아왔습니다. 한국 분들도 많이 다녀오셨고, 언론에도 자주 소개된 길이라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소위 프랑스길(The French Way)’을 통해서 그곳을 다녀왔습니다. 즉 프랑스 서남부의 생장피에드포르(St. Jean Pied de Port)라는 곳에서 출발해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서 스페인 서북부 갈리시아(Galicia) 주의 수도 산티아고 데 콤뽀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약 800 킬로가 되는 길을 말합니다. 이번에 이 길을 모두 걸은 것은 아니고, 500킬로는 걸었고, 나머지는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2.

갈리시아어로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성 야고보의 길(the way of St. James)을 말하는데, 즉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더불어 동향 출신인 야고보는 그의 동생 요한과 더불어 어부로 살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았고, 예수 사후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신약성서에는 모두 세 명의 야고보가 나오는데, 이 산티아고의 야고보는 예수가 가장 가까이 두었던 세 명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 한 사람으로서 예수의 변화산에서의 경험도 함께 했고,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현장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보통 신약성서 <야고보서>의 저자로 여겨지고 있고, 예수 사후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졌다고 하며, 마지막 다른 한 사람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중의 하나인 야고보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을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 한 명은 오른쪽에, 다른 한 명은 왼쪽에 앉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고,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는데, 그 예수가 돌아가시자 형인 야고보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는 스승의 말씀대로 당시 사람들에게 땅 끝으로 여겨졌던 이베리아 반도 갈리시아 지방까지 복음 전도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A.D.44년경에 순교를 당했고, 그러나 오묘하게도 그의 시신은 다시 그들 고향인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해안가로 옮겨져서 그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9세기(814)에 들어와서 그곳(Iria Flavia)의 주교인 테오도미르(Theodomir)가 별의 인도로 그 남겨진 유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산티아고로 옮겨서 그 위에 성당을 지으며 오늘의 산티아고 대성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3.

18세기 독일의 괴테는 유럽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 위에서 만들어졌다(Europe was made on a pilgrimage to santiago.)”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은 당시 유럽 문명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Finisterre)’으로 가는 고난의 길로서 그 먼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회개와 참회를 통해서 다시 새로운 기독교적 삶으로 거듭났고, 기독교의 정신이 되살아났으며, 그 거듭난 삶이 유럽을 일구는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단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부터 거기에 이르는 길이 개척되어져 왔습니다. 이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은 하루아침에, 어느 누군가 한 두 사람에 의해서 열려진 길이 아니라 천 년 이상의 시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동, 기도와 수고로 다듬어진 길입니다. 서구 중세시대에는 죄를 지은 왕이나 성직자들이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 길 중에서 죄과로 주어진 길을 걸어야 했고, 어떤 경우는 벌거벗거나 흰 옷을 입고, 또는 쇠사슬을 달고 걷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승 속에서 지난 1982년 교황 요한바울 2(John Paul II)20세기에 들어서 점점 더 쇠락해 가는 유럽 기독교 문명을 바라보면서 나 로마교회의 주교와 보편교회(the Universal Church)’의 목자로서 외치는 사랑의 외침을 들으시오. 지금 새천년의 문턱 앞에 서있는 유럽이여! 그리스도를 향한 문을 여시오. 너 자신이 되시오. 너 본래의 기원들을 회복하고 그 뿌리들을 기억하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을 문명과 진보(civilization and progress)”의 표지 탑과 전 세계를 위한 자극으로 지목하고, 다른 대륙이 유럽을 바라보고 있으며, 유럽이 예전에 야고보가 그리스도에게 했던 대답 나는 할 수 있습니다(I can)"라는 대답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4.

그렇게 저는 오늘도 유럽 문명이 자신들의 기원을 살리려고 할 때 걷는 길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그곳에 가기 전에는 그러한 사실들과 의미들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산티아고가 기독교의 삼 대 성지 중 하나인 것도 몰랐고, 여행길을 준비할 시간도 거의 갖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오래 걸으면서 그동안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삶에서의 용기와 실천력을 다시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이었는데, 길을 걸으면서 제가 오랜 동안 몸담아오는 기독교 문명과 교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특히 앞으로 인류 문명에서 세계인들을 하나로 묶어줄 보편성이라는 물음과 관련해서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한국의 의미와 그 현재, 교회와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났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게 된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얻게 된 귀한 것 중 하나는 먼저 산티아고 순례길에 들어서기 전 5일 간을 파리에서 보내면서 하루 혼자 올랐던 몽마르트 언덕에서의 성심(聖心, le sacré coeur)’이라는 단어의 재발견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제가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고, 그래서 평소에는 식상하다고까지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언어가 저에게 새롭게 깊게 다가온 것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각자 날마다 일상에서 실행하는 생각하는 자아(the thinking ego)’로서, ‘보편적인 성찰력()’으로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생각하는 자아로서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과거와 사실과 관련하여서 그 사실(facts)’에 함몰되지 않고 거기서부터 (meaning)’을 찾아낼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이 우리 마음의 생각하는 힘이고, 그것이 바로 거룩한 마음(성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고,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으며, 매번의 새로운 경우를 맞이해서는 거기서 뜻을 찾는 생각하는 일로써 삶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하늘이 우리 내면에 놓아주신 거룩한 마음(성심)’이라는 통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성심(the sacred heart)’에 주목하게 됨으로써 저는 아주 일상적이고 실제적으로 다시 스스로의 천래적 존귀성은 물론이려니와 주변 타자들의 보편적인 존귀성을 다시 깨닫게 되었고, 그것으로써 앞으로 인류 생명적 삶이 나아갈 방향(靈化)에 대해서도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5.

이러한 첫 생각과 더불어 들어선 산티아고 길 위에서 팜플로나(Pamplona)나 부르고스(Burgos), 레온(Leon) 등과 같은 찬란한 중세도시들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저는 이번 길을 통해서 서구 문명이 어느 정도로 뼛속까지 기독교적인가를 잘 경험했습니다. 켈틱 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갈리시아 지역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가는 마을 곳곳마다 성당이 그 중심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많이 본 그림과 상이 예수의 십자가상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서구 문명을 이루어온 핵심에 예수의 십자가상이 있고, 그래서 앞에서 교황 요한바울2세도 외친대로 인류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유럽을 바라보며 그 유럽이 다시 기독교 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이 인류 문명의 치유책이라고 했다면, 그 십자가상의 핵심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고, 앞으로도 거기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일까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문명에서는 부족했던 개별성과 개체성의 뛰어난 발견인가, 또는 스스로가 자신의 어깨에 책임을 질줄 아는 자발적 인격성의 발달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기독교 덕분으로 그러한 것들을 심화시킨 서구 문명이 답이고, 오늘날 중국 등이 세계 헤게모니로 부상하고 있어도 한국도 포함해서 비서구국가들은 여전히 유럽을 지향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인데, 오늘 세계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을 드러내줍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저를 포함해서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학문에서는 우문이라고 여겨질 수 있고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유럽 한복판 산티아고 길의 실제에서는 그것이 결코 단순히 옆으로 제쳐놓을 수 없는 실천적인 질문인 것을 보았습니다.

 

6.

이러한 가운데 이번 여행에서 지금까지 개신교 신자로 살아온 제가 마주한 기독교는 가톨릭이었습니다. 앞에서 든 스페인 유명 도시들에서의 가톨릭 성당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고, 중세 천 년여를 유지해온 가톨릭교회의 힘과 권위가 어떠했을 것이었나를 잘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산티아고의 길 위에서 한국 가톨릭 신자들도 종종 만났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길 위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가톨릭 미사에 함께 참여했고, 그 참여를 통해서 가톨릭교회가 그 이름대로 가톨릭(catholic)’, 보편성을 한껏 강조하는 교회라는 것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순례를 마치고 온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미사에서 집전하는 신부들의 국적과 인종이 매우 다양한 것을 보았고, 그 모든 차이와 다름들을 가톨릭교회라는 보편성 속에 녹여내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앞으로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여전히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가톨릭교회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져왔던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지금까지 유지된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그 실행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러나 그 한계들도 분명히 보이는데, 그렇다면 앞으로의 개신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다시 배우고 갖추어야하는가 등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가운데서 다시 반추해 보면 그렇게 엄청난 가톨릭교회의 힘과 권위 앞에서 루터와 같은 한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프로테스트를 할 수 있었는가를 그려볼 수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한 창조적인 사람의 생각하는 힘의 위대성과 창발력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고, 특히 내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7.

전통의 서구 가톨릭교회가 제공해주는 보편성이 오늘 많은 갈등과 분쟁, 나뉨과 다툼 속에서 고통 받는 인류의 현재적 삶을 위해서 다시 좋은 가능성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 편 이번 산티아고 길 위에서 만난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모습에서는 짙은 역겨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미사를 드릴 때 이들의 모습은 서구 여느 가톨릭 신자들의 그것보다 서구 신부들 앞에서 더 복종적으로 보였고, 그래서 제 눈에는 굴종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으며, 이들에게 한국이라는 국적은 별 의미가 없고 자신들이 공통으로 가톨릭 신자라는 것만이 제일의 의미가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지구촌 시대에서도 여전히 뼛속까지 자기중심적이고, 기독교중심적인 길 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그곳의 가톨릭 신부나 신자들에게 한국 신자들의 국가 문화적 특수성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한국의 신자들은 그저 단순히 자신들과 똑 같은 가톨릭 신자들일 뿐일까요?

이렇게 민족적, 국가 문화적 정체성의 물음을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저로서는 이번 산티아고의 길이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비서구권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그들의 눈에도 아주 특이하게 보일 정도로 많은 수의 한국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있었고, 개신교인들의 경우는 단체별로 와서 크게 눈에 띄는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눈에 띄지 않게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 이 길 위에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야 하는가? 나를 포함해서 우리는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이 산티아고 길을 도보로 가거나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많은 건강한 서양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저렴한 비용으로 숙박시설과 음식이 마련될 수 있는 나름의 뜻의 길이 생겨나기를 간절히 바래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백범의 길을 생각했는데, 백범 김구(1876-1949)는 자신이 호심(好心, 좋은 마음)’의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 후 유학, 동학, 불교, 기독교, 서구 진화론과 사회주의 사상 등도 두루 섭렵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한반도를 주유했고, 중국의 내륙까지 발길을 옮기면서 세계 인류의 보편적 인간 문화를 위한 이상을 가졌었습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 의미를 새기고, 그 이상을 통일 한국의 이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지금 큰 한계를 보이고 있는 서구 문명을 위한 더 큰 보편성으로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 것 등입니다.

 

8.

이러한 생각들과 더불어 한 달여의 시간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와서 첫 번째로 맞닥친 것은 아주 때 이른, 낯선 폭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산티아고 카미노의 시간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그곳의 자연환경으로부터 받은 위로와 기쁨이 제일 큰 것이었음을 상기했습니다. 스페인의 맑디맑은 하늘과 평원들, 끝없이 이어졌던 유채꽃밭,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맞았던 거센 바람과 비, 그 가운데서 신비한 구름 속의 풍경들, 그 안에 살고 있는 순하고 유한 동물들, 각종 나무숲과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길들..., 이런 자연의 품속에서 저는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었고, 현재를 감사함으로 받게 되었으며, 미래의 일들을 소망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풍성히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어떤 문화나 문명보다도 지금 우리 모두를 더 큰 보편으로 감싸고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이고, 기후이며, 지구 공간과 우주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또한 연일 한국 언론에서 단골손님이 된 한국 교회들의 패행을 보면서 저는 그 근저에 그렇게 십자가상을 내세우며 큰 보편성을 외쳐도 그 보편성이란 결국 과거의 한 남성예수를 영원히 우상화 하려는 지독한 배타주의와 그리스도우상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우상주의가 한국 교회에서 특히 심하고, 서구 교회도 근본에서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러면서 제가 가야할 길이란 그 서구 기독교가 전해주고 산티아고가 가르쳐준 보편성을 넘어서 또 다른 보편성, 더 큰 보편성을 찾아나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제가 이번 산티아고 길에서 왼쪽 엄지발가락을 상해서 고통 받고 있을 때 처음 도움을 준 사람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가진 메어리(Mary)라는 미국여성이었고, 그 다음은 페터(Peter, 베드로)’라는 이름의 독일인 약사였으며,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들이 모두 가고 제가 한국에서 가져간 약과 마음 씀으로 치료를 해서 그 발로 산티아고 길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돌아와서 제가 읽은 성경이 베드로전서 2장의 살아있는 돌’, ‘산돌로서의 예수에 대한 비유였고, 이것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9.

지금까지 서구는, 특히 그 근대정신은 돌은 죽어있는 물질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물질과 정신, 자연과 인간, 몸과 마음, 여성과 남성, 세상과 교회, 일상과 예배 등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한 쪽으로 다른 한 쪽을 소외시키고 차별해왔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구절의 산 돌(살아있는 돌)’이라는 표현이 그러한 지금까지의 잘못된 나눔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오래된 아시아적 표현인 리기불이(理氣不二)’, 또는 리기묘합(理氣妙合)’이라는 언어가 그것을 더욱 생생하고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아시아적 언어는 또한 돌도 그 안에 포괄되는 자연(, the nature)’이라는 보편성(本性)이 특히 인간에게는 세상의 타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애()’의 힘으로 놓여져 있다고 이해해 온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의 베드로전서가 산 돌로서의 예수를 따르고, 우리 스스로도 살아있는 돌로서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하는 일로 악의와 기만, 위선과 시기, 비방을 버리는 일을 첫 번째로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일상과 예배의 하나 됨을 지시하는 것이고, 우리의 날마다의 도덕적 실천과 큰 보편을 이루어나가는 우주의 일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 안의 성심(聖心)’의 의미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생태사상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도 이제 인간 문명은 지금까지처럼 지구 자연과 그 안의 존재들을 단지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이 지구 공동체에서 공동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생태대(ecozonic era)”로 들어섰다고 선언하면서 인간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최고의 목적이 다양한 생명공동체들과 함께 경이를 경험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도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살아있는 돌로서 신령한 집을 짓고, 신령한 제사를 지내는 일로 초대하는 성서의 말씀과 제가 산티아고 길을 넘어서서 더 큰 보편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우리의 친밀성을 높이는 일에서 어떤 만남과 경험을 이루고 있는지요? 이 만물 중 어느 누구와 어떤 물()과 하나 됨을 이루고 있나요? 이 일을 위해서는 단지 서구 기독교의 배움만으로도 안 되고, 아시아의 지혜만으로도 아닌, 그 둘로부터 함께 배워서 더 큰 보편으로 향하는 우리 내면의 성찰의 힘, 친밀성을 깊게 체현하는 내적 능력이 참으로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저는 이렇게 우리 각자의 내면 속의 신비(聖心)에 깊이 끌리고 있습니다. 그 신비한 하늘의 공간에 여러분도 초대하고 싶습니다.saegil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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