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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윤옥 선생님(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다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아모스5:24, 갈라디아서6:2)

 

 

20162283.1. 기념주일 예배

김윤옥 선생님(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 524-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62-

 

 

새길교회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늘 대안교회의 모본이 되어있는 새길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었습니다만, 개인 사정으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말씀증언을 하라는 부탁을 받고 여기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여성운동과 일본군위안부대책운동에 깊이 관여해 왔기 때문입니다.

 

지난 1228, 한국과 일본정부는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합의를 보았다고 선언했습니다. 피해자들과 의논도 없이, 25년간 이 문제로 투쟁해온 시민단체들과도 대화 없이 외교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후유증은 전 세계로 번지고 있습니다.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철거하는 조건으로 일본정부가 100억 원을 내서 피해자를 위한 재단을 세우겠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 수요시위 1000회 기념으로 세운 소녀상의 제거라는 조건은 위안부문제를 알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강압적 파쇼(fascist)로 비추게 되었습니다. 이 엉터리 같은 굴욕적인 한일협정 발표이후 엄동설한에 대학생들은 소녀상의 철거를 막으려고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지키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새로 소녀상을 설치하겠다는 도시들이 늘고 있습니다. 부산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의자를 놓고 인간소녀가 소녀상이 되어 앉아서 항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요시위 24주년을 기해 13개국 41개 도시에서 위안부 합의 무효집회가 열렸습니다. 왜일까요?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양국 정부의 외교적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 위안부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정의와 명예회복의 문제이며 65년도 한일협정 시, 국가배상 속에 개인배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판결이 이미 법적으로 내려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위안부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1930년대 초부터 일본 육해군이 점령지에 파견된 부대 전체에 위안소'를 설치하여 식민지나 점령지에서 강제적으로 여성을 연행하여 병사들의 성노예로 삼고 종전 후에는 현지에 방치하거나 학살한 것을 말합니다. 연구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약 20만 명의 위안부들이 피해자입니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 빨리 서구화하여 자본주의체제로 자리를 잡았고 아시아에서 식민지지배를 지속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932년 만주국 건설이나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미국 진주만 공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대만이나 조선 등 식민지에서 총독부와 친일세력을 이용해서 여성들을 동원하고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에도 군사침공해서 현지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명목은 일본군 점령지의 일반여성에 대한 강간방지나 병사들의 성병방지 사기고양 등이었지요.

 

일본군의 위안소'는 일본, 조선, 대만, 중국, 싱가폴, 말레시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이 출병했던 모든 곳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조선이나 대만의 식민지여성들은 군수물자와 함께 트럭이나 기차나 배로 전선의 위안소'로 연행되어 성노예가 되었습니다. 군이 직영하던 위안소'는 황금주 할머니나 김은례 할머니의 증언에 자세하게 나오고 있고, 김순덕 할머니나 하순덕 할머니의 증언을 보면 군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경영은 민간업자가 한 위안소'도 있었습니다. 아베총리가 이 점을 이용해서 민간업자가 했다고 발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위안소' 제도란 명치유신 이후의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전쟁의 개시라는 특수한 사회상황에서 여성을 남성의 성적대상물로 간주하는 여성멸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식민지나 점령지의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용인되었다는 점에서 문제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의 경우 피해자들은 취업사기나 경찰과 군의 개입, 납치 등의 방법으로 연행되었습니다. 조선 위안부'들은 초기에 동원되었는데 일본군의 요청을 받아 조선총독부가 이장이나 경찰이나 헌병의 행정력을 행사해서 여성을 모으고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사령부가 민간업자를 시켜 각 지방에서 여성들을 모아오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료는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고 할머니들의 증언에서도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위안부' 동원계획의 책임자였던 육군중좌 하라젠시로는 80만 명의 작전부대 병사들의 성적욕구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감안해서 필요한 위안부는 2만 명이라는 숫자를 산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병사 40명당 위안부 한 명의 계산입니다. 하라는 즉시 당시 경성에 가서 조선총독부에 여자 2만 명의 동원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경찰과 헌병을 동원해서 8월까지 약 8천명을 모아놓았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에 일본병정 40명에서 50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차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잔학행위를 당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방치하거나 국가의 수치라고 생각해서 집단학살했습니다. 피해있던 방공호 입구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70여명의 위안부가 살해되었다고 니시구치의 책에 쓰여 있습니다. 일본군이 전멸한 경우 무참히도 함께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패전 후에 버려진 위안부' 중에 일부는 주변의 조선인이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상하이의 유지로 조직되었던 한국부녀공제회'를 통해서 194511월에서 12월까지 1210명이 귀국했다고 중앙신문에 보도되고 있고 서울신문에는 대부분이 악질적인 성병이나 피부병을 앓고 있고 보기에 비참한 상태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측한 20만 명의 위안부 피해자 중에서 몇 명이 살아남았고 귀국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위안부 범죄 후 50년이 지난 90년도에 한국에서 피해자라고 신고한 숫자는 겨우 201명입니다. 신고하지 않는 숫자가 아마도 더 많으리라 짐작은 합니다. 이들은 집안망신의 존재라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타지에서 고독하고 가난하게 살아왔고 순결을 잃었다는 죄의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출산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북한에서 신고한 피해자도 2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병사들의 폭행이나 협박, 전쟁터라는 특수상황하의 극도의 불안과 공포의 경험으로 육체적 후유증이나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정신적 후유증으로 대표적인 것은 대인공포증, 정신불안증, 공포심, 우울증, 무력감, 남성기피증, 증오 등입니다. 이러한 건강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혼자서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들이 귀국하고도 50년의 침묵을 강요당했던 것은 해방 후에도 한국사회가 가부장제사회로 유지되며 여성의 순결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698개교단의 여신도조직이 연합한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조직되었고 당시의 세계적인 흐름인 하나님의 선교신학(missio Dei)’의 영향으로 사회의 약자의 짐을 함께 지는 일에 나섰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일하신다는 믿음으로 일어났던 평신도운동의 영향을 받아 마침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일으킨 기독교지도자들의 가족돕기, 철거민지원운동, 조선동아 해직기자돕기, 기생관광반대운동, 원폭피해자지원 등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나는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문제의 짐을 함께 졌습니다.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가 말했듯이 우리는 사회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이였습니다. 당시 한국사회의 유일한 여성단체였다고 사회학자 이효재 교수가 증언하며 인정하는 교회여성운동이었습니다.

 

이 교회여성연합회가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되자 9011월 여성운동단체들 37개 단체를 모아 자기 사무실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조직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사무실에 신고전화를 설치하자 다음 해 김학순 할머니가 첫 신고자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국제적 문제로 떠오른 이 문제를 위해 정대협은 일곱 가지 요구사항을 일본정부와 한국정부에 보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것이 위안부문제 해결의 기본이 되어있습니다.

 

일본정부를 향해서는,

1) 조선인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서 강제 연행한 사실을 인정할 것.

2)그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3)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힐 것.

4)희생자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울 것.

5)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보상할 것.

6)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교육을 통해 가르칠 것.

7) 책임자를 처벌할 것.

 

그리고 한국정부에 대해서는,

1) 한국 여성들을 위안부로 하여 짓밟은 일본정부로부터 사죄를 받을 것.

2)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할 것.

3) 한국에 위령비를 세워서 일본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아 생존자가 있는 경우 그 피해자에게 배상을 할 것.

4)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한일외교관계를 자주평등외교로 전환할 것.

5)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역사왜곡을 정정시키고 한국스스로도 '위안부'피해를

역사교육에 명기할 것, 등을 요구했습니다.

 

19921월에는 일본 미야자와 수상의 방한을 기해 정대협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일 12시에 수요시위를 시작했고 금년까지 24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224일은 1219회 수요시위였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처음 7개월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와서는 얼굴을 감추고 뒤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드니 차츰 의식화 되어가며 일본대사관을 향해 주먹도 쥐고 부끄러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 변화는 자신의 권리를 찾고 인간존엄의 가치를 깨닫고 얼마나 기막힌 삶을 살았는지를 인식하며 명예회복과 정의가 서기를 바라게 된 과정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대협을 따라 유엔 인권위원회, 세계노동기구, 세계법률가협의회, 일본국회의원실 등을 누비며 증언하고 정의를 요구하는 투사가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부인하려는 일본정부를 향하여 위안부할머니들과 정대협의 정의와 명예회복을 찾으려는 25년의 노력은 참으로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 것이었습니다. 수요시위는 1000번을 넘었고 유엔 인권위원회와 세계노동기구가 조사하여 내린 일본정부에 대한 권고안은 묵살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매일 매달 유명을 달리해서 이젠 40여명이 남았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폭력과 불의가 가득한 사회를 향해 외쳤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원하는 정의를 강처럼 흐르게 하는 일은 참으로 요원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일본국민들의 모금으로 소위 [국민기금]을 만들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돈으로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100억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그 돈은 한국정부가 운영하며 할머니들 개인의 복지에 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운영비는 한국이 담당해야 하는 판입니다. 이 국민기금과의 싸움에 끝을 내기위해 1998년도 아시아 피해자 연대회의에서는 200012월 도쿄에서 [여성국제전범법정]을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가 하지 않으면 여성들이 정의를 세우는 법정을 여는 것입니다. 그 모델은 영국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 법정이었는데 월남전에서 일어났던 미국의 불의한 전쟁범죄를 재판한 민중법정이었습니다.

 

이 법정의 공간에서 저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8개국 64명의 피해자들과 1000명의 방청인과 300명의 세계매스컴 기자들과 2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유죄”, “일본국가에 책임 있다.”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쁨의 표정에서 저는 정의를 실현시킨 여성법정의 의미를 읽었습니다. 제 옆에서 김은례 할머니는 말했지요. “나는 이제야 정의가 뭔지 명예회복이 뭔지 알겠어.” 그리고 두 명의 일본군 병사가 증언했을 때 할머니는 나는 이젠 저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김은례 할머니의 얼굴에서 저는 확실한 치유의 순간을 보았습니다.

 

이 국제여성법정은 온전히 형사재판의 형식을 취해서 위안부제도의 범죄성과 책임자를 국제법에 비추어 명백하게 드러낸 재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시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전쟁범죄로 인도에 반하는 죄로 규정지은 법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분쟁 시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불처벌로 일관해 온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도쿄 재판을 수정, 보완하는 재판이었습니다.

 

국제법은 원래 국가와 국가의 체결로 되어있었지만 20세기말에는 국제법을 제정하고 실행시키는 것은 민중의 힘이며 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국제법의 시민화 흐름이 급속히 높아졌습니다. 예를 들면 대인지뢰금지조약을 체결시켰던 것도 국제적인 시민사회운동의 성과였지요. 저는 한국대인지뢰대책운동의 공동대표도 맡아서 그 경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정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했던 이 여성국제법정에서는 한국과 북한의 검사단이 만나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남북공동기소장을 작성해서 통일의 경험을 선취했습니다. 이 법정이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세계적인 법조계에서 존경받는 판사들과 수석검사가 재판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법률고문이던 론다 코플론 뉴욕시립대학교수의 노력과 이 법정을 성사시키느라 피 말리게 노력하다가 끝내는 다음 해에 암으로 저세상 사람이 된 일본의 마츠이 야요리의 공이었습니다. 야요리는 목사의 딸이었고 아사히신문기자였습니다. 그는 가해국 여성으로서 이 법정에 목숨을 걸었다고 저에게 팩스를 넣고 암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잊을 수 없는 친구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눠졌던,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한 사람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명예회복과 정의를 이루는 법정을 실현시키고 세상을 떠난 순교자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25년간의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책운동은 이렇게 몇 십분 동안에 모두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며 해결의 끝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명예가 회복되어 정의가 바로 서야만 하는 이 문제는 아베정권이 아무리 부인해도 국제사회에서 계속 문제시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국제여성법정의 방대한 증거들, 증언들, 기소장, 판결문은 앞으로도 일본군성노예제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져서 국가주의자들이 아무리 이 범죄를 말살하려고 해도 역사의 기억에서 말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200112월 헤이그에서 발표되었던 법정의 판결문은 1094개의 항목에 이르는데, 참으로 감동적인 것입니다. “이 법정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희생된 자들이나 미래의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며, 결론에 가서는 이 판결을 통해서 모든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을 칭송한다. 파괴된 인생을 다시 세우고 두려움과 치욕을 참으며 전 세계에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한 피해자들의 강인한 정신과 위엄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정의를 요구하며 투쟁하기 위해서 나온 여성들이 증언대에서 자기 체험을 말하며 그것으로 적어도 나흘 동안은 불법을 단두대로 보내고 진실을 왕좌에 앉힌 피해자들의 이름을 명기할 것이다.”라는 감동적인 마지막 말로 맺고 있습니다. 근래 몇 년째 위안부 할머니들의 노벨평화상 후보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근거에서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그 시대의 아픔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의 불의를 정확하게 감별하며 시대의 아픔에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위안부문제는 성차별의 문제, 빈부격차의 계급의 문제, 그리고 민족자주의 문제로 지속적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곧 삼일절이 다가옵니다. 우리 민족의 평화를 이루는 일, 우리사회의 민주적 평등적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아직도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 시대의 아픔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손이 되어 소명을 다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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