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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사랑의 창조주 하나님

(요한14:7-17)

 

 

2016221일 주일예배

길희성 형제(새길교회 신학위원, 심도학사 원장)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 요한14:7-17 -

 

 

작년 크리스마스 오후에 어느 마음씨 좋은 산타 할아버지의 활동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제목도 모르고 중간부터 보았지만, 이야기인즉 이 산타 할아버지가 어느 백화점에서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그 백화점의 매상도 부쩍 오르게 되자, 이를 시샘한 근처 백화점에서 그 할아버지에게 테러를 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급기야 두 백화점 사이에 소송 전까지 벌어지고 변호사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데, 산타가 실재하는지, 아니면 허구를 팔아 아이들을 현혹해서 돈을 버는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논쟁으로 번졌다. 요즈음 똑똑한 아이들은 5-6살만 되어도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터에, 어른들이 변호사까지 동원해서 이런 논쟁을 벌이다니, 아이들조차 코웃음을 칠 이야기다. 요즘 애들은 산타를 믿지 않지만 선물을 많이 받기 위해서 순진하게 믿는 척 연기한다고 한다.

 

여하튼 이 우스꽝스러운 논쟁 중에 산타는 하나의 상징(symbol)이라는 말이 나와서 나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불현듯 우리 기독인들이 믿는 신이 산타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사실 무신론자들의 눈에는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산타를 믿는 순진한 어린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산타가 상징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산타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가이다. 아마도 어떤 크리스마스 정신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크리스마스 날 하루라도 어렵고 외롭게 사는 이웃들을 찾아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정신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이유다. 예수 자신의 탄생과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예수의 삶과 정신을 흉내내보자는 것이 산타로 상징되는 크리스마스의 정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타는 상징이지만, 사실 엄청난 의미와 진리를 담고 있는 대단한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산타가 상징이라고 우습게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산타 상징 론을 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신에 관한 우리의 모든 언어가 상징이라고 해서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문제는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서는 산타를 믿지 않는 똑똑한 어린아이들만도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이다. 신이 더 깊은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어라는 사실을 모르고 마구 떠들어대는 신자들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치 산타 할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믿는 신자들로 교회들이 차고 넘친다. 성경을 포함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온갖 개념과 표현들이 상징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성경 문자주의자들,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면서 우리의 온갖 욕심과 희망사항을 마음대로 산타 하나님께 투사한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나님이 꼭 우리 인간들처럼 생각하고 말한다고 여기는 유치한 신인동형론적 사고에 따라,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고, 기도가 최고라고 하면서 자기의 바람과 욕심을 하나님께 마구 투사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신을 닮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닮은 유치한 존재로 둔갑해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져서 신앙을 가지고 싶어도,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위대한 책이라니 교양 차원에서라도 한번 읽어보겠다고 모처럼 마음먹고 집어 들었다가도, 성경에 나오는 신에 대한 언어를 도저히 문자적으로 삼킬 수가 없어서 내동댕이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무한하신 신이 뭐 이래,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인간을 닮은, 아니 우리 인간보다도 못하게 편파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한 신의 모습, 특히 구약성서의 언어에 심한 반감마저 느낀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믿고 봐야 한다는 신자들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성경공부도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6-70 년대 선불교가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릴 때 활동했던 알란 왓츠라는 사람은 성경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책이라고 했는데, 경청할 만한 말이다. 적어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틀림없이 그렇다. 위험한책에는 물론 이슬람의 쿠란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 위험하다는 말을 더 깊은 긍정적인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성경이든 코란이든 잘 읽으면, 우리의 그릇된 삶을 도전하고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책, 진정으로 위험한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사상을 주름잡아온 무신론자들 -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뒤르켕, 그리고 최근에 많이 읽힌 만들어진 하나님’(원 제목은 God Delusion, 하나님이라는 망상이다!)의 저자 도킨스 같은 사람도 일단 신이 상징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가리키는 상징인가이다. 경제적 이익, 리비도, 즉 성욕, 권력욕, 이기적 유전자의 맹목적 번식욕, 혹은 사회의 자기 절대화 내지 자기 숭배 등, 무신론자들의 답은 다양하다.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신이 참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것이라는 것이 이들 폭로의 명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종교는 이러한 진실을 은폐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순진하고 무지한 신앙인들은 하늘의 산타 할아버지 같은 환상을 붙잡고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이라는 상징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성경의 이야기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궁극적으로 <사랑><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과 사랑, 하나님과 진리는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이 우주적 실재임을 믿는 것이며, 우리들의 사랑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 역시 불완전하지만 영원불변하신 진리의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 이래 가장 예수답게 산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하나님을 믿는 독실한 신자였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힌두교에서 부르는 이름 람(Ram, Rama)으로 불렀지만, 그는 자기가 믿는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실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간디는 처음에는 하나님은 진리이다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진리가 하나님이다라고 바꾸어 말했다.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로 실천한 그의 비폭력 저항과 진리파지 운동(Satyagraha)은 이러한 진리의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진리가 하나님이라고 간디가 바꾸어 말하게 된 이유는 무신론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라 해도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의 이름으로 무신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참으로 거짓을 물리치고 진리를 사랑하고 고수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간디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누구든지 진리를 궁극적 관심으로 삼아 정직하게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든 신을 믿는 사람이고 생각한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곳에서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불변의 진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중세 신학자 보나벤투라도 말하기를,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했다. 진리가 없다는 것도 진리이기 때문이며, 진리의 빛의 조명 아래서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거짓이 성립되며 진리가 거짓에 우선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누구든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빛이 어둠에 우선하듯이 빛의 입자인 광자는 존재해도 어둠의 입자는 없다 진리가 거짓에 우선하며 선이 악보다 더 근본적임을 믿는 사람, 그리고 정의가 불의에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사랑이 미움에 우선하고 미움보다 더 근본적인 힘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모두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랑은 단지 우리 인간의 따뜻한 성품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 자체에 깃들여진 우주만물의 속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멋있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엄청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세 스콜라 철학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말이 단순한 시적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테는 물론 중세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요즘 서구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 특히 우리 개신교 신학자들은 관심도 없고 배우지도 않는 철학이며 신학이다. 종교개혁 이래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신학은 이성과 철학을 무시한 채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만을 외치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 최근 나의 생각이다.

 

여하튼 진리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간디도 중세 신학자들이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서구 중세 1천 년 이상을 지배한 그리스도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우주만물이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 선 자체이신 하나님, 진리 자체이신 창조주 하나님, 무엇보다도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갈망하고 있다고 믿었다. 마치 철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만물은 하느님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힘에 이끌려서 하나님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단테의 표현은 결코 시적 과장이 아니었다. 만물은 그들의 존재와 생명의 뿌리인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랑하며, 이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부단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뉴턴이 자연의 법칙이 하나님이 제정한 우주의 질서라고 굳게 믿은 경건한 사람이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지만, 하나님이야말로 만유의 인력 가운데 인력이라는 진리는 미처 몰랐을 것 같다.

 

우리를 구원하는 궁극적인 힘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증언하신 대로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이다. 요한1(4:16)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 곧 하느님이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사랑한다는 표현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언어가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실재는 사랑이라는 우주적 힘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다양한 만물을 하나로 모으는 우주적 사랑의 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칠십 평생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사후에 하나님을 대면할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떤 교리를 믿었고 어떤 신관을 가지고 살았는가 묻기보다는 네가 얼마나 사랑을 베풀며 살았느냐,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는가 물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삶에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만약 낡은 신학, 정통을 자처하는 신학이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마음 편하게,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런 신학과 교리는 내던지든지 아니면 과감하게 수정해야만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차라리 신을 믿지 않고 양심적인 휴머니스트로 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새길 신앙고백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 도대체 창조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하나님이 마치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 듯, 가령 집을 짓듯이 만드셨다는 말인가? 기독교 신학에는 전통적으로 창조개념에 크게 두 가지 큰 흐름이 공존해 왔다. 하나는 대중적인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이고, 다른 하나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누스(205-270)의 유출론적 창조론이다. 후자는 창조를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창조론이다.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주의 자궁 혹은 어머니로서 만물을 낳는다는 출산 모델의 창조론이다.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이 가장 대중적이지만, 출산 모델도 성경에 있으며,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서방교회 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과 동방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중세 유대교와 이슬람 사상에도 깊이 영향을 끼쳤다. 그 뿐 아니라, 유출론적 창조론은 인도의 힌두교 신학, 유교의 성리학이나 도가 사상에도 있는 신관 내지 세계관으로서, 그야말로 범세계적인 신관이다. 나는 기독교의 창조론도 이제는 제작자 모델의 창조 이해에서 출산 모델의 창조 이해로 과감하게 전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제작자(maker) 모델의 신관이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해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근본적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고 무슨 이유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가라는 의문이다. 하나님이 심심하셔서 혹은 외로우셔서 창조했을 리는 만무하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신학자들이 흔히 하는 대답은,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사랑은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을 하시려면 자기 말고 다른 타자가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이 타자, 즉 피조물을 왜 창조하셨냐고 묻는데, 사랑 때문에 창조하셨다는 것은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아무 이유나 목적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건 바로 무신론자들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계든 인간이든 본래 아무 이유나 목적 없이 그냥 존재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그의 자유로운 의지(free will)에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다. 창조하시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창조하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설령 하나님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건축가가 집을 짓듯이 자기 밖의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심각하다. 우선, 건축자가 집을 지를 때는 먼저 재료 내지 질료(material)가 있어야 하는데, 이 질료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만약 질료가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질료가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것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교부들은 하나님께서는 질료까지도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아무것도 없는 순전한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이른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론이며, 기독교에서 정통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은 없다. 태초의 흑암이나 혼돈이나 이라는 표현 등이 나오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의 는 아니다.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이 지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제작자와 물건이 확연하게 분리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피조물과 전혀 다르고 분리된 존재, 말하자면 피조 세계에 대하여 초월적 타자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관은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을 우주만물 밖에혹은 그 에 군림하면서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군왕이나 제왕처럼 생각해 온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아빠하나님처럼 친근한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하나님이다.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내재성(immanence)이 무시되며 하나님과 만물 사이의 밀접한 내적 관계성도 무시되고,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이 일방적으로 강조된다. 현대 신학에서는 신을 세계나 인간에 대해 초월적 타자로 보는 이러한 신관, 세계관, 인간관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가장 심각한 비판은, 신과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제작자 모델의 신관은 만물로부터 신을 분리시키고 만물의 신성성을 박탈함으로써 오늘날의 환경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이념적 뿌리라는 비판이다. 처음부터 세계와 하나님, 자연과 초자연을 확연히 구별하고 하나님을 초자연적’(supernatural)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자연계에서 신성을 추방해버렸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을 추방해버림으로써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지배해도 좋다는 세계관을 낳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 심각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과 초자연주의적 신관이 처음부터 신 없이도 세계를 이해할 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초월적-초자연적 타자로 간주하는 신관은 처음부터 무신론적 세계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날카로운 비판이다. 실제로 세계를 신과 무관하게 이해하는 이론적/철학적 무신론과 자연과학이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문화의 풍토에서 발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나 자신이 오랜 시간 비교종교와 비교문화를 공부한 결과 도달한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대 유물론적 무신론, 거세게 유신론에 대항하는 전투적인 무신론은 인도나 중국 등 동양 세계나 아프리카 문화 같은 데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관, 세계관이라는 사실이다. 무신론은 아이러니 하게도 기독교의 산물, 기독교의 자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신학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서구의 초자연주의 신관과 무신론적 자연주의(naturalism)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항시 같이 간다는 말이다.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이 지닌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세계의 창조, 즉 세계의 시작 자체를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느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간주하기 쉽게 만든다는 점이다. 창조를 시간 속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시간적 사건’(temporal event)으로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 과학, 사이비 신학은 하나님이 세계를 4,000년 전 혹은 6,000년 전에 만들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해서 사람들의 조롱을 사고 있다. 그런데도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문자적인 진리로 고집하는 창조과학의 신봉자들은 무슨 신앙의 위대한 진리라도 지키려는 듯, 창조론을 진화론과 함께 과학 교과서에다가도 실어야 한다는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만약 창조가 과거의 한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따라서 시간적 인과관계의 한 고리, 즉 최초의 고리가 된다면, 창조가 과거의 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두 가지 의문이 뒤따른다. 첫째, 하나님은 또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유신론자들은 물론 하나님이 인과의 고리에서 제일 첫 고리, 즉 만물의 제일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고 어디서 생겼냐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왜 하필 인과의 고리가 신에서 멈추어야만 하냐고 항의한다. 바로 그런 제일원인의 존재 자체가 문제되고 있는데, 거기서 멈춘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이미 상정하는 논리라는 말이다. 원인은 무한대로 소급될 수도 있고, 아니면 원인들 끼리 서로를 발생시키는 순환적 인과의 써클을 형성하는지 누가 아느냐는 반론이다.

 

창조를 과거에 일어난 시간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창조론은 또 하나의 심각한 의문을 낳는다. , 창조가 하나의 시간적 사건이라면, 하나님은 세계를 만드시기 전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라는 엉뚱하지만 말이 되는 질문이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답하기를 하나님은 그런 고약할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농담으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에 따르면, 창조는 결코 시간 안에서 발생한 시간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는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최초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시간 안에서(in time)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with time) 창조하셨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만물과 더불어 시간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하시기 이전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놀랍게도 시간과 물질과 공간이 분리할 수 없이 함께 간다는 아인스타인 이후의 현대물리학의 통찰과 부합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시간 자체가 물질과 함께 창조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은 현대 우주물리학자들에 의해서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빅뱅(Big Bang) 우주 발생론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냐고 묻는다. 무언가 있었으니까 하고 터졌을 것 아니냐는 상식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대답은 빅뱅 이전이라는 시간 개념 자체가 빅뱅 사건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빅뱅은 물질 뿐 아니라, 시간 자체가 함께 시작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뱅은 여느 사건과는 전혀 다른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우주물리학의 빅뱅 이론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그의 놀라운 통찰, 즉 하나님은 세계와 시간은 함께 창조하셨다는 것, 따라서 창조를 단순히 과거 어느 한 때에 일어난 시간적 사건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시간 자체의 창조는 결코 시간 속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시간적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창조는 하나님의 영원과 시간의 세계가 만나는 특이한 사건, 말하자면 사건 아닌 사건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창조는 과거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사건이다. 기독교의 창조 신앙과 달리, 고대 그리스나 중국에서나 사람들은 세계는 대개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자체가, 시간 자체가 생겨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빅뱅 이론은 이러한 생각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우주는 무한하지도 않고 영원하시도 않다. 그렇다고 우주물리학자들이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도 대다수 우주물리학자들은 오히려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다. 세계는 존재 이유가 없거나 모르는 그냥 존재하는 우연이든지, 아니면 세계는 스스로가 원인이 되는(causa sui) 신과 같이 필연적 존재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 실제로 과학자들 가운데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세계의 존재가 필연적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럴 경우, 또 다시 제기되는 의문은, 세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를 설명하는 더 물리적 법칙 자체가 어디서 왔는가라는 또 하나의 근본적 질문이다. 여기서도 과학자들의 답은 둘 중의 하나다. 물리법칙의 존재는 이유가 없거나 모르는 우연이든지, 아니면 또 하나의 더 근본적인 물리법칙으로 법칙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 만약 후자라면, 문제는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여기서 무신론과 유신론은 확실히 길을 달리 한다. 창조신앙에 따르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세계의 존재는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세계에 물리법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당연하거나 자명한 일이 아니다. 창조신앙에 의하면,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필연적이며, 세계의 존재와 물리법칙은 하나님께 의존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세계와 시간의 창조가 결코 시간 안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과거 사건이 아니고 영원한 사건이라면, 창조는 과거에 일어났다가 지금은 그쳐버린 사건이 아니다. 창조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한 사건이며, 언제 어디서나 진행되고 있는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이다. 창조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로서, 창조주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 영원한 현재로서 현존하신다. 또 우리가 창조를 이렇게 영원한 사건, 영원한 현재로 이해하면, 창조는 무엇을 만드는 제작 행위라기보다는 우주만물이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한 하나님께 항시 의존하고 있다는 존재론적 진리, 즉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진리를 뜻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교우 여러분이 의식했을지 모르지만, 새길 신앙고백문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이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지 않고 창조하시는이라고 현재형 내지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지속적 창조와 지속적 의존의 관계를 뜻한다.

 

이상과 같은 여러 이유에서 나는 제작자 모델의 신관과 우주론을 포기하고 이제는 창조를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출산의 모델로 이해하는 신관과 세계관으로 과감히 전향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신과 세계의 관계를 공학적 모델보다는 생물학적 모델로, 다시 말해서 유기체적 창조론과 신론으로 전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우주만물을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일자(一者)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과정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우주의 자궁과도 같은 하나님이 자식과도 같은 만물을 출산하는 행위로, 더 나아가서 만물을 품고 먹이시고 키우시고 지속적으로 돌보시는 어머니 하나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에서는 도를 만물의 어미, 심지어 식모라고 부르는데, 그야말로 만물을 먹이고 키우는 어머니 하나님이다. 유기체적 신관과 세계관에서는 공학적인 제작 모델의 신관과 달리, 하나님은 세계만물을 초월하는 전적인 타자(das ganz Andere. 신학자 칼 바르트의 유명한 표현)가 아니며, 만물 위에 군림하는 제왕이나 엄한 가부장도 아니다. 만물을 낳고 품고 기르시는 어머니 하나님, 식모 하나님이다.

 

제작자 모델의 창조론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말하지만, 출산 모델의 창조론에서는 우주만물의 자궁과도 같은 하나님이 만물을 낳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deo)가 된다. 창조는 신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그 이유를 물을 수 있는 -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것처럼 하나님의 본성적 필연이다. 하나님과 세계는 어머니와 자식처럼 구별은 되지만 결코 분리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생명의 연속성이 존재하며, 만물은 하나님의 존재와 생명에 참여하는 성스러운 존재들이다. 신이 없는 세계도 생각할 수 없고, 세계 없는 나 홀로 하나님도 생각하기 어렵다. 신은 세계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세계는 신에서 나와 신에 의존해서 일시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다가 신으로 복귀한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향해 있다.”는 바울의 말(11:36) 그대로다.

 

끊임없이 만물을 출산하고 품고 키우시는 어머니 하나님은 만물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며 뿌리다. 만물은 우주의 자궁과도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출현한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인간만 존재할 권리가 있고 인간만 귀한 존재가 아니라 만물이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존재할 권리가 있고 신성하다. 하나님은 인간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만 선민으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인만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삼으시는 차별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을 어머니처럼 품고 보듬어주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신관에서는 따라서 환경생태 신학이 따로 필요 없고, 여성 신학도 따로 필요 없다. , 새길 신앙고백문이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면서 굳이 품어인도하신다고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학의 양대 주제인 창조(creation)와 구원(redemption)을 별개의 것으로 따로 이해하거나 별도로 다룰 필요도 없다. 창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무한한 존재와 생명을 나누어주고 지속적으로 만물을 품고 먹이시고 기르는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다.

 

만물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현해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출산 모델의 창조론은 이 세계가 약 138억 년 전에 탄생해서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고 오랜 창발적 진화과정을 통해서 생명으로부터 정신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진화론적 사고나 세계관과 잘 어울린다. 이런 창조론에서는 창조냐 진화냐하는 논란이 필요 없고,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 신학이나 사이비 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 지속적 창조는 곧 진화적 창조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진화적 창조의 과정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창발적(emergent) 과정이다. 진화는 단순히 돌연변이(mutation)라는 무수한 우연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물리적 과정만으로 이해하는 무신론적/유물론적 진화론과 달리, 창조신앙은 물질에서 생명, 생명에서 정신이 출현하는 전 과정이 처음부터 우주의 영(Spirit)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도하는 목적과 의미가 있는 과정이다. 전 진화적 창조의 과정은 정신(Spirit)이 정신(spirit)을 낳는 과정이다. 진화적 창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모상(imago dei)으로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랑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출산하는 진통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인간 출현의 목적과 의미는 결국 하나님의 모상을 가장 완벽하고 순수하게 구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데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에 따라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로서(8:18-25)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 가운데서 기다릴 수 있다. 곧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이자 창조의 완성을 고대하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유명한 이슬람의 수피(신비주의, mysticism) 시인은, 하나님은 무함마드가 아니라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세계 창조의 원리이자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인 로고스가 육신을 입어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독 신앙이 증언하는 진리다.

 

출산 모델의 창조론은 결코 범신론이 아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엄연히 구별되듯이, 영원한 하나님과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시간적 존재들 사이에는 존재론적으로 위상의 차이가 있다.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과 다()라는 존재론적 위상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주만물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과 세계 사이에는 존재와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은 내재적 초월이며, 하나님의 내재성은 초월적 내재성이다. 요즘 신학계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범재신론(panentheism)에 가깝게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만물 안에 있다.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범신론(pantheism)이 아니고, 하나님을 피조물을 위에 군림하면서 통치하다가 최후에 세계를 심판하시는 초자연적 신(supernatural God)도 아니며, 성경의 이야기들이 전하는 것처럼 위기 시에만 간헐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시고 소수의 선택 받은 사람에게만 초자연적 기적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편협한 구원사’(Salvation history)의 하나님도 아니다.

 

만물을 출산하시고 지속적으로 돌보시며 인도하시는 어머니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최종적인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세계의 종말은 대 파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식과도 같은 창조의 세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시고 질적 변화를 통해 완성하시는 새로운 창조다. 만물이 그로부터 와서 그에게로 되돌아가고, 그에 의해 수렴되고 변화되면서 한 차원 높게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놀라운 구원의 세계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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