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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안인숙


연대: 예수 이름으로

(마가복음 9:38-41)

201718일 주일예배

안인숙 자매

(새길교회 운영위원장)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 마가복음 938~41-

 

 

2016년은 우리 모두가 잊지 못할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는 대통령이 탄핵 소추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우리 교회는 22년간 정들었던 강남청소년수련관을 떠나 새 예배처소로 이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란 무엇인가? 교회란 나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봅니다. 너무나 급박하게 변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속해져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국가도 공동체요, 교회도 공동체인데, 예수님은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에 이르러 오늘 본문의 말씀을 떠 올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귀신을 몰아내는 능력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 능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12제자 중에 들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귀신 쫓은 사람이 월권행위를 한 것 같고, 요한과 제자들의 판단이 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로 구성된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며 제자들을 다독였습니다. 자신에서 비롯되는 능력을, 자신을 둘러싼 가시적이고, 장소제한적인 무리에 국한하지 않고, 동시대 다른 지역까지도 아우르는 개방성을 보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제자들은 파워와 권위를 현재 제자들을 구성하는 자신의 집단에만 한정하였습니다. 마치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특허권을 자신들만 가진 양 생각합니다. 직접적 제자들의 집단 외의 사람들에게는 허락지 않으므로 이는 배제적이며, 너와 나를 가르고, 차별을 두는 태도라 하겠습니다.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949-50절에도 기록되었는데, 마가복음의 '우리'라는 단어 대신 누가복음 저자는 '너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너희'의 차이는 뭘까요? 저는 저자들의 의도를 헤아리기 보다는 예수님의 뜻으로 보고 싶습니다. 혹시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 이후 세대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까요? 시공을 초월하여 2,000년 후인 우리까지도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한 성령 안에 있는 우리와 너희는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와 함께했던 복음서의 제자들로부터, 예수 승천 후 현재까지, 아니 오고 오는 세대를 이어 우리는 성령으로써 예수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목적은 미래의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온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직접 제자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과 대조되는 곳이 마태복음 1230절에 있어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고 되어 있어 마가복음과 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듯하고, 마가복음 938절의 제자들의 주장과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222절에서 32절까지를 읽으며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성령을 중심으로 일관된 말씀을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같은 성령의 역사이면서 한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반면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사탄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귀신 쫓는 역사는 저의 말씀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이 정도로 하고 본문말씀에 충실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우리 혹은 너희가 아닌, 제삼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냄에 관련한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에 대하여 이러한 개방성을 염두에 두고, 저는 우리 새길공동체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회과학에서는 교회공동체도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합니다. 제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이론 중에 체계이론(systems theory)이 있습니다. 체계이론은 사회학에서는 사회의 구조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에서는 기계나 열역학을 설명하기 위해, 생물학에서는 유기체를 설명하고, 그리고 사회복지학에서는 개인, 가족, 집단 혹은 조직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적용하는 등 다양한 학문에서 다루어지는 이론이라고 봅니다.

 

교회를 하나의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체계에는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가 있습니다. 열린 체계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고 보지만, 닫힌 체계는 반대로 경계선이 뚜렷하고 주변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므로 성장이 멈추고 쇠퇴하다가 종국에는 소멸하는 과정을 걷게 됩니다.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은 환경으로부터 무엇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용하여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생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체계이론을 두 차원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우리 새길교회 안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새길교회와 다른 주변과의 관계에서입니다. 첫 번째 차원으로,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역시 작은 하위체계들이 있습니다. 각 구역이나 부서들 등입니다. 이런 하위체계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상호작용하면 그 체계는 생명력이 있겠지요.

 

두 번째 차원으로는, 한 집단이 상호작용하는 그 주변 환경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무리에 자신을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의 집단은 상당히 융통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12명이었지만 제자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15:40-41;8:2-3). 누가복음 101-1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 72명을 둘씩 짝지어 파송하였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21-26절에는 가룟유다 대신에 예수님 생전에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요셉과 맛디아를 사도의 수에 추가하였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집단은 고무줄같이 늘었다 줄었다하였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나 병든 자가 함께하였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참여한 적이 많습니다. 무리의 성격은 시시때때로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에 기도에 힘쓰던 마가의 다락방 모임은 약 120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경계가 매우 개방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집단을 새길공동체에 적용해 보면, 우리가 열린공동체라 하며 열렸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열린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부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냥 내버려 두니 나가는 것도 쉬이 나가는 열린 문이 있다는 뜻인지요. 예수님의 개방성을 본받으려면 우리도 유동적이며 또 탄력적인 경계선을 유지하는 동시에 역동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평신도강단교류의 일환으로 다른 교회를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가 서로 축복 기도하는 축도시간을 가졌습니다. 보수적인 분위기임에도 가끔씩 평신도가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같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기회를 통해 그 교회의 참신한 에너지를 우리 교회 안에 끌어 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한 편으로는, 강단교류에 참여했던 교회들이 거의 목회자 있는 교회임을 보고 새길교회가 평신도성을 지켜 온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깊게 깨달으면서 우리 교회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더 사랑해야겠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평신도성을 다른 교회와 더 많이 공유할 필요도 있고, 그리스도의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작은 교회, 여성교회, 인권, 정의,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교회들과 연대하여 함께 행동하거나, 종교간 대화를 모색하는 교회 등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면 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건강한 교회,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제대로 공유하는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체계이론의 기준으로 종교집단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던 본회퍼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가 사회적 집단임을 인정하였으나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공동체가 아닌 성령공동체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소통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다툼과 분쟁이 있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있을 뿐이며,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길 창립정신의 본질인 예수님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어떤 좋은 프로그램이나 문화적인 계획 혹은 인간적인 요소가 중요시되어 영적 요소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제가 이 성경본문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은 마가복음 941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익히 아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개역개정성경과 새번역성경에는 '내 이름으로(in my name)'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왜 빠져있는지 모르겠으나 영어성경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넣어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내 이름으로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어귀는 본문에는 세 번 나오고, 성경 전체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는 귀신을 쫓을 때 주문처럼 사용될 뿐 아니라 제가 신약성서에서 살펴 본 바로는 그 용도가 10가지도 넘습니다. 그러나 순기능만 있지는 않아서, 마태복음 245절에는 "세상 끝날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고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의 부재 시에도 예수님의 파워와 권위가 능력을 발휘함을 알 수 있기에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8절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일은 중요한 ''로 여겨지고, 41절에 예수의 이름으로 물 한 잔을 주는 행위는 '삶의 한 행동'일 뿐으로 인식된다면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예수님은 둘 다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에게 물 한 잔을 건네줌으로 하늘나라의 상을 잃지 않는 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목마른 내가 물 한 잔을 구한 적은 없나요?

 

우리는 예배처소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오산학교에 손을 내밀었고, 오산학교는 우리의 손을 잡아 초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알고서 우리에게 물 한 잔을 건네준 것입니다. 우리는 한동안 오산학교에 깃들어 살텐데, 오산학교와도 좋은 연대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훌륭한 인재로 커 나가는데 있어 우리 교회의 인력은 좋은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보광동 지역사회와 연대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가를 살펴서 새길공동체의 사회사역에 주도사역으로 만들어도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누구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예수님의 지지자로서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한 겨울에 이렇게 이사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도전입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낯익고 익숙했던 곳을 떠나와야만 했습니다. 여름이었더라도 어려웠을텐데 하물며 추운 12월임에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힘을 합쳐 이사를 했습니다. 특히 이사준비팀은 SNS를 통해 긴밀히 소통하며 일사분란하게 협동하였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더욱 견고해졌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과제를 화두로 하여, 많은 회의와 대화마당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들은 소통하였고, 많은 생각들을 공유하였습니다. 다른 자매형제의 의견을 경청하고 내 의견을 평화롭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의민주주의, 평등성, 수평적 토의 문화, 비권위적 분위기 등은 참으로 소중한 집단가치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성숙한 시민,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기에 저는 이것을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만 상호작용하며 신앙을 그 안에서만 유지하려고 한다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낙오될 것입니다. 지난 30년간 세상과 교회는 많이 변하였습니다. 우리 공동체로 와서 훌륭한 말씀증거를 해 주시는 전문가나 신학자들의 칭찬 섞인 인사에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말씀을 실천에 옮겨 새로운 성장의 과실을 맺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오산학교와 연대하여 새로운 사역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성경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연대하는 것을 예수님이 의미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개방적 태도를 가지고, 다만 악령을 경계하면서 성령을 거스르지 않는 다양한 단체와 연대하며 새길공동체의 생명력을 키워나가면 좋겠습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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