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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7.01.06 12:09

[2017.01.01] 정의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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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정의의 하느님

(아모스 5:4-15)

201711일 신년감사주일

길희성 형제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 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신 분, 어둠을 여명으로 바꾸시며, 낮을 캄캄한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올려서 땅 위에 쏟으시는 그분을 찾아라. 그분의 이름 주님이시다. 그분은 강한 자도 갑자기 망하게 하시고, 견고한 산성도 폐허가 되게 하신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너희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곡물세를 착취하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는 못한다. 너희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는 못한다. 너희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너희는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신중한 사람들이 이런 때에 입을 다문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행여 주 만군의 하나님이 남아 있는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르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

 

- 아모스 54~15-

 

 

오늘 이 새로운 예배 처소를 찾아오면서 강남 YMCA 시절, 문정동 시절, 현대교회 시절, 그리고 강남 YWCA 시절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갔습니다. 하기야 어디서 예배를 드린들 뭐 그것이 대수이겠냐는 생각도 듭니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이 이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인이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고 말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4:21-24). 오늘 새로운 처소에서 드리는 첫 예배에 이 말씀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줄곧, 실현되는 새길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독교는 본래부터 베두인족들이 사는 사막의 종교로 시작했고, 성서의 하느님은 어느 특정한 장소, 특히 신상들이 즐비한 어느 화려한 신전에 거하시거나 거기에 매인 하느님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 때부터 하느님은 떠돌이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니, 따라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한 하느님의 미래를 향해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지상에 거하는 동안에는 보금자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항상 텐트나 장막을 거두어 보따리를 싸고 떠나는 유목민들의 하느님이고, 그런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 역시 유목민적 삶(nomadic life)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떠돌이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참다운 교회를 지향하는 새길의 도전과 모험의 여정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날까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날까지 믿는 자들에게는 고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보금자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어디나 다 우리의 고향일 수가 있고 보금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그네 인생을 사는 우리들도 역시 잠시 몸과 마음을 쉬게 해줄 인생의 중간정류장과 같은 곳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정도 필요하고 국가도 필요하고 교회건물과 장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언제나 한시적이고 임시적이며,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훌륭한 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란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오산학교는 다 아시는 대로, 사업을 일구시다가 독립운동을 하게 되신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교육에 뜻을 두시고 사재를 털어 세우시고 온몸을 바쳐 가꾸신 진짜 학교다운 학교였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게 된 이 오산학교 강당인 소월당은 이 학교가 배출한 국민시인 김소월의 이름을 딴 곳이라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석 유영모 선생도 이 학교의 물리교사로 재직하시다가 잠시 교장 일까지 맡아 보신 적이 있는데, 유영모 선생님의 감화로 이승훈 선생이 기독교 신자가 되신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석헌 선생 역시 이 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유영모를 평생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오산학교는 이래저래 우리 새길교회가 추구하는 정신, 가치와 이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장소이며, 오히려 우리에게 과분한 장소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느 해이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없지만, 지난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 대선에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남북한 관계는 경직 될 대로 경직되었고 통일의 꿈은 점점 더 멀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는 점점 더 심화되어 젊은이들은 헬 조선을 떠나고 싶다고 외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시작된 비극은 도무지 그칠 것 같지가 않고, 세계는 언제 어디서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호하고 있는 신고립주의와 극우 민족주의 세력 역시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면서 세계 일등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만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신고립주의가 문제의 해결은 못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껏 세계화를 외치고 주도하면서 온갖 혜택을 누렸던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들이, 이제 와서 태도를 돌변해서 고립주의로 돌아선다 하니 정말 어의가 없고 그야말로 이런 얌체가 어디 있습니까? 이래저래 뭣도 모르고 따라다니던 약자들만 당하는 것이 역사인 모양입니다.

 

이런저런 국내외 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절망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미국 대선 패배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했다는 말, “내일도 태양은 뜰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겸손이라고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세계 최강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그의 실망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상상해봅니다. 나는 이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니 너무 낙심하지 말라’, 그리고 미국의 시스템이 그렇게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될 정도로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니너무 걱정하지 말하라는 위로의 뜻을 담은 말이었을 거라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오바마는 정치에 관심이 있고 미래를 걱정하는 자기 딸에게 말하기를, 사회의 발전은 늘 지그재그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진전이 있으면 후퇴도 있고, 후퇴가 있으면 진전이 따를 것이라는 위로의 말이겠지요. 사실 제가 아는 미국의 시스템이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늘 깨어서 날카로운 비판을 자유롭게 하는 용기 있는 언론이 살아 있고, 건강한 시민의식과 탄탄한 사법제도가 있으며, 수많은 전문가들 집단도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트럼프 한 사람의 자의에 의해 움직일 허술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일도 태양은 뜬다는 말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은, 자연의 섭리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오바마 자신의 깊은 개인적 영성 같은 것이 담긴 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뜻까지 포함해서 들었습니다. ‘내일도 태양은 뜬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잊고 살기 쉬운 깊은 뜻이 담긴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촛불 시위를 통해서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값진 수확도 있어서, 분노 가운데서도 기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구겨진 나라의 체면과 한 사람으로 인해 받은 온 국민의 마음의 상처가 수백만이 들어 올린 촛불 때문에 그나마 보상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나라가 안개 정국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현재의 판결이 어떻게 나든, 우리는 나라의 장래에 대해 희망이라는 소중한 단어를 품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죽하면, 이 모든 것이 최 아무개 덕택이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여야, 남녀노소, 신분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소중한 경험도 했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맹자 이래의 진리를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양심의 소리가 하느님의 음성리라는 위대한 진리를 실감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촛불 집회가 일종의 종교적 행사같은 느낌을 받았고 참여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종교적 경험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사회로 오면서 종교가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고 다원화되면서 국교(state religion)라는 한 나라의 지배적 종교가 사라지자, 개별종교들을 초월해서 한 사회 구성원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안으로 이른바 시민종교’(civil religion) 같은 것이 필요하게 되었고, 계몽주의 사상가들 가운데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를 아울러 어떤 공통의 미국적 가치를 공유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단일 언어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이점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라는 종교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시민종교라고 불릴만한 것이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늘 존재해오다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해서 저는 그동안 시민종교, 그리고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창하는 이른바 이성종교(Vernuftreligion) -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신관과 계시 신앙을 대신해서 인간 이성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리와 도덕성을 모든 종교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에 대한 종래의 이해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성종교나 시민종교는 개별 종교들 실증종교라고 불립니다만, 실제로 존재하는 종교라는 뜻 - 이 지니고 있는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 없고 감동이 없는 미지근한 종교, 지나치게 합리화된 종교, 물탄 싱거운 종교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촛불집회를 보면서 시민종교에 대한 이러한 저의 부정적 견해가 편견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시민종교도 기독교 같은 특정종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도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종교로 승화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수백만이 외치는 함성에는 종교 특유의 성스러움이 느껴졌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강한 마력과 흡인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차이들을 초월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에는 분명히 어떤 초월적인 종교적 요소가 강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만 명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이런저런 관심들이 대수럽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고, 개인들이 겪는 천차만별의 운명 또한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 경험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에 사는 저의 가까운 친구는 먼 길을 마다 않고 5번이나 집회에 참여했다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더라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특히 요즘 학생들과 청년들은 패기가 없어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고 데모도 하지 않고 관심은 오직 야구나 연예인들을 둘러싼 시시껍절한 루머들에나 관심이 있고 취직과 스펙 쌓는 일에만 열심이라는 비판이 많았는데, 사실이 아님이 확실하게 드러나서, 우리사회의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일등 국민삼등 정치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지만, 이번 미국 대선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근거가 없는 자기비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미국 국민의 정치수준이 우리만도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치에 대해 너무 자조적이거나 비판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정치가 아무리 더럽다 해도 아예 관심을 접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란 좋게 말해서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사회정의는 곧 모든 정치의 목적이자 존재이유이며, 나아가서 모든 종교의 궁극적 가치이고 목적이라고까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하튼, 가수 전인권의 노래 말대로,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아픈 기억을 모두 그대 가슴 깊이 묻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또 아무 예고 없이 촛불집회 단상에 올라가서 양희은이 부른 국민가요 상록수의 가사 일부가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듯합니다. “우리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손에 손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하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단지 우리 정치계만이 문제가 아님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최태민 같은 사람이 사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풍토를 조성한 우리나라 종교계 일반의 문제가 있었고, 거기에 가장 책임이 큰 것은 우리나라 개신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이런 엄청난 비리를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부와 권력을 탐해 온 우리나라 언론계, 권력층, 폴리페서들, 그리고 정보력에서는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우리나라 재벌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문제를 한국 종교계와 신앙풍토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최태민의 사이비종교와 사기행각이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종교계, 특히 개신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고 도덕적 비판정신이 마비된 풍토에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관심이 따로 놀면서, 도덕적 비판을 감당할 수 없는 한심한 종교집단들이 독버섯처럼 마구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종교에 놀아나고 종살이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새삼 종교란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 위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요즘 언론에 회자되는 유명한 정치인들 가운데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는데, 언론에서 제발 그런 꼬리표를 붙이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목사라는 타이틀 제발 좀 안 썼으면 좋겠는데, 오죽하면 사람들이 목사를 먹사라고 비아냥거리겠습니까? 정말 문제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정말로 저들이 우리와 같은 하느님, 같은 예수를 믿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차라리 이런 엉터리 종교를 그냥 떠나버리고 될 대로 되다가 망하게 놔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 아무개라는 사람이 차라리 예수와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몰랐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막말이 통하는 교회들이 이 땅에 허다하다는 사실이고, 그런 교회들이 우리나라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새길교회 30년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가 창립취지문을 만들 당시나 오늘날이나 한국교회의 현실이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에 회의를 넘어 절망감을 느낍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이제 저도 그만 기독교에 대한 미련을 포기해버리고 떠나버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잘못된 기독교 신앙 탓이라고 반론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잘못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많은 요소, 아니 독소조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문제를 정직하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소수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뭐라고 떠들던, 한국교회는 갈 때까지 가다가 사회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제가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이렇게 기독교 언저리를 맴돌고 있고, 오늘처럼 교회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으니, 저의 마음을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여기서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적어도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마비시키고 묻지마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 도덕적 비판을 외면하고 일반 사회의 도덕적 수준에도 못 미치는 한심한 종교는 아예 이 땅에서 퇴출되는 편이 낫겠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개신교가 어디서 왔겠습니까? 죄다 미국 선교사들이 전파한 저급한 기독교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미국 어느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라는 엉터리 학위를 받고서 무슨 대단한 목사인양 활개를 치고 다니지만, 대다수 신자들을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맹종합니다. 지난번 미국 대선 때 트럼프 같은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우기던 구역질나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그와 맞서던 당시 공화당 후보 12명 모두가 복음주의자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서로 복음주의자라고 다투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고 기가 막혔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이 무슨 대단한 신자라고 착각해서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뻔뻔한 짓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여하튼 그런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이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이입니다.

 

최근에 경건한 복음주의 신자로 널리 알려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60년 동안이나 몸담았던 미국 남침례교회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이 분이야 말로 정말 복음주의자라 해도 손색이 없는 분인데, 남침례교교회가 신앙의 이름으로, 성경말씀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성 인권과 인간으로서의 평등성을 짓밟는 악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떠나는 이유입니다. 세계 인권선언에 배치될 뿐 아니라 자기가 믿는 성서의 가르침과 기독교 진리에도 반한다는 신념 때문에 탈퇴한다는 것입니다. 침례교 지도자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성경구절만 골라서, 가령 하느님이 이브를 창조하실 때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주요 직책들을 맡을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입니다.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지만, 미국 복음주의자들 대다수가 이런 성서문자주의 신앙, 근본주의 신앙에 젖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실이 미국인들 일반의 낮은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힐러리가 첫 여성 대통령 문턱까지 갔다가 좌절당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카터라는 사람을 한 개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동안 무엇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선언을 하고 나섰는지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침례교회가 그런 기독교라는 사실은 세상이 이미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이제야 떠나겠다고 선언하다니 그의 기독교 이해의 수준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이 여성 인권에 대해 무어라고 하든 말든, 세상은 이미 콧방귀도 뀌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60년 동안 모르거나 외면하고 사셨는지, 그의 지성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성경이란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책입니다. 함부로 읽을 책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바로 성경말씀, 하느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여성의 인권 문제에 대해 성경 구절을 놓고 왈가왈부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이, 그리고 기독교가, 여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면이 있다면 과감하게 비판하고 고발해야 합니다. 조금 후에 더 말씀 드리겠지만, 만인의 인권과 평등,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정의를 외면하는 하느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아무리 신앙의 준거라 해도, 우리는 결코 맹목적인 성경숭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안에는 시대적 제약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가르침, 옛날 무지했던 시절에나 통했던 가르침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공연히 궤변을 동원해서 그런 구절을 억지로 이해시키려고 시간낭비 하지 말고, 변명하려 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옛날의 무지에 돌리든지, 예수님의 정신에 반하는 것으로 무시해버리면 됩니다.

 

문자주의적인 성경숭배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악입니다. 안 그러면 평생 꼴통 신자로 살다가 갈 것이라고 저는 단언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볼 때, 성경을 신자들이 직접 읽은 것은 마르틴 루터 이후 개신교 500년 역사에 불과하고, 지금도 그런 신자들의 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교리나 가르침을 대등하게 여기는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런 위험이 비교적 덜 합니다. 만약 그럼에도 교회가 인권을 무시하고 인간을 차별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면, 그런 교회는 아예 떠나버리는 편이 더 낫습니다. 아니, 우리가 떠나지 않아도 결국은 사회에서 자연히 퇴출될 것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미국 대선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습니다. 12명의 공화당 대선 후보자들이 서로 복음주의를 자처하면서 다투었지만, 이들과는 아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 미국 대선 후보가 있었습니다. 민주당 후보 지명을 얻기 위해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경합을 벌리다가 아쉽게도 고배를 마신 샌더스 상원의원이었습니다. 아마도 선거운동 기간이 한 2주 정도만 더 있었더라면 역전 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컸고, 미국의 역사도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느 날 저는 CNN 방송이 타운 홀 미팅 형식으로 주최한 후보 토론회를 보았는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샌더스에게 당신의 종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던 나는 순간 약간 놀랐습니다. 그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 질문이 결코 샌더스에게 유리하거나 우호적인 질문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질문을 듣자마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샌더스는 말했습니다. “I am a deeply religious person” - 나는 정말 깊이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랐고 한 층 더 긴장해서 그의 다음 말을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종교, 나의 영성spirituality은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어떤 소녀가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다거나, 어느 할머니가 돈이 없어서 약을 못 사먹는다면, 나의 종교, 나의 영성은 바로 그런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유대교 영성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유대교 영성의 특징과 장점은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윤리적 유일신신앙‘(ethical monotheism)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습니다. 샌더스 상원의원의 모습에서 저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태인이었던 예수는 유대교 일반의 성격처럼 신학이나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율법의 참 정신에 따라 사는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는 누구든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다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교리나 신학의 종교가 아니라 십계명을 비롯해서 율법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위와 삶이 중요한 종교입니다.

 

오늘 봉독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서의 말씀은 이러한 구약성서의 유대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해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 읽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구절만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 앞으로 몇 분의 판사들이 역사적인 탄핵심판에 참여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지만, 이 말씀만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존 롤스(J. Rawls)라는 <정의론>의 저서로 철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 정의에 대한 담론에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샌델(M. Sandel) 교수와는 급이 다른 거장입니다. 저는 지금 그의 정의론을 소개할 마음이 없고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꼭 알아두었으면 하는 점 몇 가지 점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가 그가 말하는 공정성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 개념을 이해하려면, 현대 민주 사회를 사는 우리는 인간이 모두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시 말해서 그의 다양한 우연적 속성이나 사회적 조건을 초월해서 예컨대 그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 금수저냐 흙수저냐, 어느 지역 출신이냐 등을 모두 완전히 무시하고 똑 같이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진리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숭고하지만 지극히 추상적인 인간관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사람을 여러 조건에 따라 차별하면서 삽니다. 인간이 모두가 평등하다니! 거짓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의 이념이고 하나의 현대적 신화라 해도 좋습니다. 아주 강력한 신화이며, 이 신화적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상가들이 순교자처럼 탄압을 받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 수천 년 동안 당연시되고 절대시되던 전통사회의 억압적 질서를 일거에 무너트릴 혁명적 힘을 지닌 이념이고 인간관입니다. 지금도 이 혁명은 세계 도처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등성의 이념에 근거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를 한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은 우리가 평등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만인의 평등성을 실제로 어떻게, 얼마나 철저하게, 사회제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실현하는가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입장, 세 가지 평등성의 개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문제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방향, 한국교회와 세계 기독교, 그리고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직결된 문제이기에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간단하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첫째는 자연적 불평등(natural inequality)을 옹호하고 전제로 하여 사회정책을 펴자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 입장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입장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불평등, 즉 신체, 두뇌,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환경이나 사회문화적 여건 등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각자의 운에 따른 차별적 권리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입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말로 하면, ‘금수저’, ‘흙수저의 차이는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지만 하기야 부모 잘 만나 돈 많은 것도 실력이라고 해서 국민들의 염장을 지른 철없는 아이도 있었지만 - 그대로 그 사람의 권리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사회복지를 시행해야 한다 해도 아주 최소한으로, 가난한 사람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혹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하고, 세금은 될수록 낮게 부과하고 작은 정부’ - 국방비는 빼고! - 를 지향한다면서 표를 얻습니다. 자유경쟁을 강조하는 시장주의자들이 취하는 입장으로서, 미국이 대표적이고 우리나라도 의료보험을 제외하고는 아직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난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개인의 선행이나 동정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정의가 만인을 위한 사랑이라는 이해가 없으며, 사회가 공동체라는 사실, 국가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공화국’(republic, res publica, 공공의 것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기본적 사실조차 외면합니다. 파이를 우선 키워야 나눌 것이 생긴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를 주장하면서, 노동운동을 드러나게 혹은 은밀하게 탄압하고 친기업적 입장을 취합니다.

 

그나마 미국은 보편적 인권 사상이 정착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종종 보는 것과 같이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갑질같은 것은 없고 그랬다가는 당장 소송을 당해서 큰 일 나지요 - 또 사법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에 전관예우 같은 말도 안 되는 현상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비록 출발선에서부터 개인들이 불공정한 경쟁을 시작하지만, 일단 경쟁에 참여하면 능력본위(meritocracy)가 비교적 잘 준수되는 사회입니다. 지연, 혈연, 학연 같은 연줄이나 백이 그리 쉽게 작용하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일이 어느 정도 가능하며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신분상승도 용이하다는 것이 우리사회와 다른 점들입니다. 또 장애자들에 대한 배려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된 사회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무엇보다도 노조 결성과 활동도 법의 테두리만 잘 지키면 우리나라보다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평등성과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입장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누가 봐도 공정성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의 원칙에 반하기 때문에, 인생의 출발선부터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만 하는 부당성을 해소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사회복지나 소수자우대 정책, 혹은 세금정책 등을 통해서 시정 내지 보완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 두 번째 평등성의 모델인 자유주의적 평등성(liberal equality)입니다. 구라파 선진 제국에서 이미 상당 정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사회도 지향해 가야 하는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샌더스 상원의원이 주창하는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도 제가 아는 한은 이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구라파 나라들의 복지 수준을 빨리 따라가서 세계의 조롱꺼리가 되는 것을 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평등성 모델은 민주적 평등성(democratic equality)라는 것으로서, 롤스 자신의 입장이고 위의 복지모델보다도 더 나아가는 매우 급진적인 평등관이며 정의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첫째,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각종 유리한 조건들 유산은 말할 것도 없고 재능이나 지능까지도 자기 노력이 얻은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소유로 간주할 수 없고 사회의 공동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가 아는 한 어느 사회주의자도 이 정도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둘째, 따라서 개인들이 타고난 선천적인 재능이나 지능의 차이, 성품이나 자질 또는 타고난 스포츠나 예술적 재능 등의 차이에서 오는 혜택이 사회의 가장 열악한 조건에 처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한.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사회복지 정책 정도로만은 부당한 부의 대물림은 계속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반박하기 어려운 입장이지만, 실제로 이 정도로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어쩌면 가족제도 자체가 없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상상하기조차 어렵고 찬성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철저한 평등성의 이념을 어느 정도 개인적 차원에서는 신앙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정의의 정책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한다는 근본적 한계는 있지만, 자발성이라는 장점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자기가 가진 재산은 물론이고 타고난 능력이나 자질마저도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므로, 남과 나누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나 신학자들이 말하는 청지기론과 유사하지만, 이들의 시야가 주로 헌금 문제에, 특히 십일조 헌금 정도에 국한되는 경향이 강하며, 특히 사회복지 정책을 통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정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여하튼 개인의 신앙적 태도에 따라 실제로 자발적 재능 기부 같은 것을 통해 이미 실천하고 있는 훌륭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 내가 누리는 명예나 존경 등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매우 훌륭한 자세입니다. 능력 많고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심정으로, 그야말로 운이 좋아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열악한 위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 대해 교만하거나 잘난 체 하지 말고 항상 빚을 졌다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며, 항시 보은하는 자세로 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복지정책 같이 사회정의를 이루려는 노력을 겸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민주주의란 어디까지나 이상이며,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과정이지 완성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정의도 마찬가지로 끝이 없는 과정이고 이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롤즈의 정의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칸트는 말하기를, “만약 정의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칸트에게 정의란 인생의 궁극적 관심이며 지고의 선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는 대신, ‘정의가 곧 하느님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을 뒤집어서 사랑이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적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고,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의 궁극목표는 사회정의에 있고 종교의 목표도 결국 사회정의에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의를 외면한 정치나 종교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정치판도가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정당과 정치세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그 당과 그 세력이 얼마만큼 사회정의의 실현에 기여하느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신앙적 판단이고 신학적 판단입니다. 다시 한 번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 “만약 정의라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은 도덕, 정치, 종교 모두가 경청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정의의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의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의를 따른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아무리 좋아도 이 면이 약합니다.

 

만약 서구 근대사에서 기독교가 계몽주의가 고취한 이 정의의 꿈에 더 일찍, 좀 더 충실했었더라면, 현대 역사는 완전히 달리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동서냉전도 없었을 것이며, 한반도의 분단도 없었을 것입니다.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시작이다라는 유명한 유태 지성인 칼 마르크스의 외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면, 니체 같은 사람도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며 해방신학, 민중신학 같은 것도 따로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길교회 같은 교회도 생길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새길교회 같은 교회가 사라지는 날,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이 바로 우리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고 모든 종교의 꿈이 실현되는 날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무거운 이야기를 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모두가 새해의 꿈을 말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꾸는 새해의 꿈은 제대로 된 꿈이어야 하고, 야무지고 당차고, 급진적인 꿈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믿어 무엇 하며, 교회를 다녀 무슨 소용이 있고, 이 땅이 교회들로 십자가들로 뒤덮인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신앙인들이 꾸는 꿈은 실로 과격한 꿈입니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고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꿈입니다. 이런 꿈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인연을 맺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품고 살아야 하는 꿈이며 희망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보이는 것은 꿈이 필요 없고 희망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인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은 결코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트려서는 안 됩니다. 기독인들은 혁명을 했다고 기뻐 날뛰어도 안 되고, 정권교체를 이루었다고 날뛰면 더욱 안 됩니다. 유가에도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군자는 남들이 세상을 걱정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남들이 다 기뻐한 후에야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사회를 걱정하는 유교의 이른바 우환의식을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기독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워하는 믿음으로 살고, 희망으로 구원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운명이고, 새길교회 신자들이 죽을 때까지 함께 지고 가야할 십자가입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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