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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영미 교수


복음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삶

(창세기 3:1-7, 요한14:18-21)

 

 

2015215일 주일예배

이영미 교수(한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 창세기 3:1-7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 요한14:18-21 -

 

 

 

기독교인으로 성장하면서 저에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교리중 하나가 창세기 2-3장을 근거로 한 원죄론 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인류가 3-4대도 아니고 수천세대를 걸친 연좌제에 묶여 죄인으로 살아가야하는지? 나는 무엇을 그렇게 잘못해서 매번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하는지? 회개만으로도 구원의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는데,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말입니다.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이기에 죄를 전제로 해야 한다면, 그 죄는 무엇인가? 창세기 3장은 정말 인간의 원죄를 고발하는 본문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본문을 바탕으로 여러분과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성서의 첫 본문인 천지창조와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지만 정작 제1성서 자체에서는 에스겔 2811-19절에서만 언급됩니다. 아마도 이 주제는 포로기 이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거나 그 이후에 생겨나 회자되던 이야기였으리라는 추측을 낳게 합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두로왕을 향한 예언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은 금은보화가 가득한 풍요와 축복의 장소로, 그 안에서의 두로 왕은 무역이 많아지고 폭력이 난무하여 불의한 자로 묘사됩니다. 창세기 3장의 에덴이 풍요와 축복의 장소로, 인간은 불의를 행하여 심판받는 내용과 유비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에덴동산 이야기가 성서의 서두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원죄를 고발하기 위해 배치된 것인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창세기 3장에는 죄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1성서에서 죄(핫타)가 처음 언급되는 곳은 창세기 47절입니다.

 

네가 선(토브)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서 죄란 마음을 홀리고, 소유욕이 강한 속성을 가리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나를 유혹하지만 중요한 것은 는 그 죄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서는 창세기 4장 이후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가인은 형제살인이라는 생명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였고, 이 폭력은 확장되어 그 영향은 창조의 모든 영역에 미쳐 홍수로 인한 창조세계의 전멸이라는 엄청난 결과에까지 이르는 홍수설화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6-9).

 

그러면 창세기 3장은 무엇을 말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지창조와 인간의 범죄 사이에 소개되고 있는가?

 

창세기 3장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을 심어놓고 그 열매는 따먹지 못하도록 금지명령을 내렸을까? 뱀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미끼를 던지시는 분인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하나님의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 나무가 중앙에 심겨져 있으며 다른 나무의 열매는 다 따먹어도 그 열매는 취하지 못한다는 명령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모두가 공유해야할 창조가치가 바로 생명과 지혜임을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피조물의 어느 누구도 생명을 취할 권리가 없으며, 지혜를 사용할 때도 그 판단의 기준은 공공의 선, 창조질서의 유지를 위해 공유해야하는 요소이지 개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사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운영하시는 지혜요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는 은유는 무엇인가를 한 존재 속으로 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열매를 따먹는 것은 창조세계의 공공선을 내 이익을 위해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사유화하고 먹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벌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부터의 이탈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연인 땅과 동물과의 괴리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을 경험하고 죄의 세계에서 죄가 가족에서 인류로 확장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학자 프랫하임은 이를 창세기 3장의 신학은 우리에게 너가 먹는 것이 바로 너다.”는 명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먹을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뇌물의 유혹 앞에서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창세기 31절과 7절의 히브리어 유희는 3장의 신학을 드러내줍니다. ‘벌거벗은(에이롬)’ 인간과 뱀의 교활함(이룸)’ 사이의 히브리어의 유비입니다. 두 단어의 유사성은 인간의 존재변화를 언어유희를 통해 보여줍니다. 자기 비움의 존재가 교활함으로 치장한 존재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본문은 인간이 동산 중앙에 놓인 공공선으로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함께 나누지 못하고 어떻게 나의 것으로 취하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은 질문을 하면서 대화를 이끌어가고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줍니다. 뱀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하와에게 말해줍니다. 이 사실은 3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에서 하나님의 독백을 통해 재확인됩니다. 선악과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판단의 기준을 보여주는 지혜의 나무인 것을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5절은 인간으로 하여금 열매를 따먹게 만든 핵심 구절인 5절의 마지막 말, “하나님께서 아신다.”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뭔가를 숨기셨거나, 그들을 속인 것과 같은 뉘앙스를 남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뭔가를 그들로부터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공공선으로서의 지혜를 우리가 공유하지 못하는 깊은 바닥에 신뢰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찾아가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비록 인간인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가 가장 관심 갖고 있는 것을 다 채워주실까? 공평하실까? 그분을 믿을 수 있는가?하는 의심은 신뢰의 관계를 깨트립니다. 지혜의 근원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지혜의 근본을 의심하는 것, 지혜의 근원자에 대한 불신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번민하는 인간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이러한 의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혜의 나무를 동산 중간에 놓아두지 못하고 내 것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눈이 밝아져 바라보니 탐스러웠더라고 표현합니다. 더 이상 창조세계를 위한 공공성이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 시작합니다.

 

뱀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뱀은 말로 (오직 말로만) 가능성들을 제시했고 인간이 자신들의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조용히 나무를 응시했고, 아담은 아무 말 없이 받아먹었습니다.

 

창세기 31-7절이 정말로 인류의 원죄를 말하는 본문이라고 말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공유해야할 지혜의 나무를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유화한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기보다 창조질서에서 이탈하여 그 질서를 무시하고, 내 탐욕을 위해 다른 생명체의 안녕을 깨트리는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마조리 H. 수하키, 폭력에로의 타락김희헌 옮김 (동연, 2011) [원제 1994], 33.). 역으로 인간의 구원은 자신이 창조질서의 일부임을 깨닫고 창조세계의 보존과 회복을 위해 힘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최후의 구원세계에서 모든 피조물의 안녕을 이야기하는 점도 이와 상통합니다.

 

창조질서가 이미 파괴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징글러는 이 시대를 탐욕의 시대라고 지칭합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의 공공선의 실현과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할 교회 역시 탐욕에 눈이 어두워 불의를 행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철 박사는 욕망과 환상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현대 한국교회의 욕망의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비움의 십자가 신학을 실천해야할 교회가 욕망덩어리 괴물로 변화되어버린 이 시대, 우리가 공유해야할 십자가 복음의 공공성을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 고민해봅니다.

 

저는 무엇보다 기독교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한다고 믿습니다. 구원이 죄의 심판으로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구별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뜻하지 않고 창조세계의 회복(65장의 새 하늘 새 땅)이라고 말한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원죄가 아닌 원복의 개념에서 출발해야 진정한 사랑의 종교로서의 가치를 회복하고 복음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삶에 앞장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죄와 심판을 강조하면서 교인들을 위협하고, 통제하려는 지배의 논리에서 사랑과 배려를 통해 창조질서의 회복이라는 구원이해를 되살리는 전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성서 역시 원죄가 아니라 원복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원래의 축복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명권과 행복권을 추구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원복을 누리지 못하는 그 곳이 불의의 현장이며,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사랑과 배려가 필요한 곳입니다. 복음으로 오신 예수의 삶 자체가 창조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병든 자, 소외된 자, 배척받은 자를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원복자로서의 생태적 인간이해는 우리가 창조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일부라는 자아인식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만델라의 우분투’, 내가 있기 위해서는 너가 있어야하고, 너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상호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나는 생태계의 일부임을 자각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최초의 낙원에서의 자기비움의 존재로서의 벌거벗은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울 것입니다.

 

내가 이룬 업적까지도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을 숨기고 내어놓을 수 있는 온전한 자기비움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엑스레이(X-ray)를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Wilhelm Röntgen, 1845-1923)은 이 업적으로 1901년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뢴트겐은 음극선 실험을 통해 밀도가 낮은 나무, , 종이 등의 물질은 통과하지만 밀도가 높은 물질을 통화하지 못하는 광선을 발견하고 이 광선이 사람 몸을 투과하여 몸 속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수학의 미지수를 나타내는 알파벳 “X”를 따서 이 광선을 엑스레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엑스선의 발견으로 의사들은 환자들의 속을 볼 수 있게 되고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선을 뢴트겐선으로 정하자고 제안했지만 뢴트겐은 나는 단지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며 이를 거절했고 엑스선에 대한 특허권으로 부자가 되는 길도 마다하고 이것이 인류를 위해 사용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것이 공공의 선을 실천하는 삶의 한 범례라고 봅니다. 이러한 겸손과 자기비움을 통한 공공선의 실천은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서 절정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에서 공공의 선을 우선시하지 못하고 나의 이익을 앞세우게 되는 인간의 속성은 두려움과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요한기자는 요한 1418절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우리가 진정한 원복자로서의 의 모습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주체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을 내쫓고 존재의 근원에 맞닿는 경험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나의 존재를, 이웃의 존재를, 그리고 자연의 존재를 생명체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해주며, 그 생명을 옥죄는 아픔을 함께 풀어주는 마음과 실천의 동력이 됩니다.

 

성서는 이 사랑을 긍휼의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만남이 옳고 그름의 심판의 자리에서 존재가 공유되는 자리로 바뀔 때 우리는 진정한 상호적 관계를 이루고 상대를 축복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때에 비로소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아량이 생기고, 차이가 다름으로 인식될 뿐 차별의 근거로 속단되지 않게 됩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는 마음. 보다 정확하게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사건을 세상을 상대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 마음을 성서는 긍휼이라고 표현하는데, 복음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삶은 창조질서의 파괴에 대한 애통함과 나를 희생하려는 긍휼심에서 완성됩니다. 이 긍휼의 마음은 나의 눈이 밝아져 상대의 아픔이 보일 때 가능한 사랑입니다. 판단이 개입되기 이전의 존재의 교감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마태복음 201-16절에 포도원의 품삯에 대한 비유가 떠오릅니다. 아침 일찍 나온 일꾼과 제 11(저녁)에 나와 일한 일꾼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때 일한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아야한다는 판단가치를 뒤로하고 모두가 즐겁게 일할 권리가 있고 생명을 유지하고 행복을 영위할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보장받아야한다는 존재적 이해로 사고를 전환한다면, 저녁에 나와 일한 일꾼에게 동일한 임금을 주는 것이 화가 나고 부당하게 느껴지기보다 일용할 양식의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된 것이 기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하신 하늘의 분배정의 같습니다.

 

마가복은 1017-22절에 한 부자가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대목은 예수가 그 사람의 중심에서 그 생명을 옥죄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아픔을 응시한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그 무리를 바라보니 측은지심이 생겨서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합니다. 혈루 병 앓는 여인을 측은히 여기셔서 병을 고쳐주십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바보, 멍청이, 천치라고 부르는 등(마태 5:22) 타인을 비하하는 언어를 삼가게 되고 존중과 애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세상의 원칙에 따른 사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창세기 3장의 본문을 가지고 복음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삶은 창조의 영성을 회복하는 삶,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축복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창조세계의 일부일 뿐임을 인정하는 겸손과 자기비움, 원복을 누리지 못하는 생명체에 대한 긍휼지심의 예수의 마음으로 생명살림을 위해 애쓰는 삶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내 이익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혜로 상대의 중심을 보고 그 생명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내 것으로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의 선으로 확장시키는 삶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 길을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에 새길교회가 함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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