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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경재 목사

왜 광야로 데려가시려 하는가?

(호세아 2:14-20, 요한복음 4:16-18)

 

2012년 10월 28일 종교개혁주일 예배

김경재 목사

(삭개오작은교회, 전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1. 문명사는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로 진입함

 

오늘 주일은 종교개혁 495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시대에 말씀하시는 복음의 음성을 경청하려 합니다. 한국교계와 신학계는 5년 후 2017년에 맞이할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준비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근대 서구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인류문명사에 큰 영향을 끼친 종교개혁 사건발생의 5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마땅히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교계신문엔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시기’ 라던가 ‘종교개혁 500주년 준비 위원회’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개신교의 한사람 신도로서, 신학자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요즘 근본적 질문에 스스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 시대, 다시 말하면 지구촌이 실현되고 문명사회가 근본적인 털갈이를 하려는 역사적 카이로스에서는 ‘제2종교개혁’ 운동이나 ‘종교개혁 발생500주년 기념행사’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종교개혁 이후시대’(post-protetant Era)에 돌입했다는 시대의식 또는 교회사 의식이 더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진지한 고민입니다.

‘제2종교개혁’이라는 개념바탕을 검토해보면, 마틴 루터가 1517년 당시에 로마 가톨릭 교권체계의 도덕적 타락에 저항하고 개혁하려했던 것처럼, 요즘 한국 개신교가 특히 그 지도자들이 너무나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세인의 지탄을 받고 있음으로, 루터가 당시 교황청의 도덕적 타락을 정화하려고 개혁의 불길을 든 것처럼 개신교의 도덕적 혁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식인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준비’ 라는 의식 속에도 500주년이라는 연대기적 기념식에만 더 많은 초점이 놓여 만고불변의 진리를 천명한 종교개혁기념일 곧 개신교 탄생 500 주년 ‘생일잔치’를 더 성대히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나 죤 칼빈의 종교개혁의 근본 의미는 당시 도덕적 타락 상태에 있었던 교권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도덕정화운동보다 더 깊은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묻는 근본적 성찰이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당시 로마가톨릭체계로 신성시 되어있던 거짓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상타파’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과 앞으로 몇 년동안 종교개혁에 관련된 기독계와 신학계의 모든 담론들은 교회가 타락하였으니 정화 해야겠다 던지,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레등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다시 증보간행하는 행사 수준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문명사 자체가 ‘종교개혁 이후시대’(post-protestant Era)에로 진입해들어 갔다는 시대의식을 가지고, ‘종교개혁적 기독교’ 그 자체를 총체적으로 성찰을 해야 할 시대에 돌입했다는 영적통찰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 박사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큰 눈으로 조감하면 기독교 2000년 역사는 사도들이 이끌었던 초대기독교 제1세기 이후, ‘복음의 본질’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패러다임으로서 5가지 큰 패러다임 전환이 있어왔다고 본 것입니다.

 

헬라철학 영향을 듬북 받은 헬라철학적 교부시대 기독교(상징인물은 어거스틴), 중세 1000년을 지탱했던 스콜라 신학 기독교(토마스 아퀴나스), 근세 시민사회가 동트면서 형성된 종교개혁적 기독교(루터와 칼빈) , 성인이된 현대인들의 계몽주의적 기독교(칸트와 헤겔),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형성된 에큐메니칼 기독교(칼 바르트와 칼 라너), 이상 5가지 기독교 패러다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한스 큉 신부에게서 경청할 점은, 종교개혁을 비롯하여 기독교사 속에서 등장했던 거대한 신앙운동이 각각 삶의 자리와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한정된 복음이해의 형태일 뿐, 그것이 만고불변한 ‘복음 그 자체’를 대신하거나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노력들 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이후로 들어간 오늘의 문명 사회사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종교개혁’ 패러다임에 갇혀버린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동굴’로 전락되고 만다는 위험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은 항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시대 제약적 한계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한계성은 무엇보다도 첫째, 종교개혁이 발생했던 16세기는 개인의 주제적 자기의식과 개인적 인간가치를 자각하던 시대에 걸맞는 종교개혁입니다. 중세기시대엔 ‘전체’라는 의식이 부분과 개체를 삼켜버렸던 시대였습니다. 종교개혁적 신앙은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영성이었지, 오늘날처럼 ‘온생명’(장회익) 이론적인 생태학적 생명이해와 양자물리학(아인슈타인)등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의 영성입니다.

 

둘째, 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시대적으론 중세기가 끝났지만,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이중구조의 이원론이 개혁자들의 맘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라는 니케아 신조에 기초한 성육신 신앙과 속죄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가령 20세기에 활발하게 논의된 소위 ‘역사적 예수’ 에 대한 관심은 아직 철저하게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넷째, 16세기는 아직 유럽중심주의에 갇혀있던 시대요, 기독교왕국 밖에도 중국이나 인도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심원한 종교가 발전하고 있는 줄을 모르던 시대 곧 유럽기독교왕국 밖은 온통 이교도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일어난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있어야 할 종교개혁 신앙의 가장 핵심적 복음진리는 무엇입니까? 설교자는 그것을 두 가지 라고 요약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우상타파’ 정신인데,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라 !”(Let God be God!)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복음신앙 곧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는 말의 참 뜻은 “예수를 바르게 알고, 예수를 깊게 사랑하고, 예수 뜻에 온전히 동참하여, 예수를 사는 것이다”는 것이다. “예수 앎, 예수 사랑, 예수 닮음, 예수 살기” 가 복음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절대화함으로서 우상숭배 직전에 이르렀고, 오직성경만의 틀에 박힌 교리신조에 사로잡혀 벧들레헴 말구유에 누었던 ‘아기예수’ 대신 수 십 만원된다는 외제 유모차에 ‘교리로 조립된 밀랍예수’를 태우고 한 것 자랑하며 명동거리를 걷는 졸부에 비유하면 지나친 것일가요?

 

2. 호세아가 본 이스라엘의 죄와 요한복은 기자가 본 예수의 혁명

 

구약성경이라고 기독교인이 부르는 유대교 경전의 본래이름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집“ 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언서 안에는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이 많지만, 초기 예언운동의 두 물줄기는 아모스와 호세아였다고 구약학자들이 밝힙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신비자 하나님 심장의 구성소를 밝힌 셈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장의 일부분은 정의 혹은 공의라고 강조했고, 호세아는 긍휼심 혹은 은총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의와 긍휼심, 정의와 은총은 둘이 아니고 심장의 심방심실처럼 피를 온몸에 돌게 뿜어 보내는 심장박동의 구성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서 2:14-20엘 보면, 겉으론 가장 번성했다고 보이는 북왕국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신앙의 실체를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서”, 평생 동안 성실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자고 혼례식에서 약속한 남편을 버리고, 정부에게 꼬임 받아서 타락해버린 여인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라는 관계,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이라고 일심동체로 살아야 할 참 남편을 배신하고, 자기에게 금귀고리와 각종 패물로 호사하게 치장해주는 어떤 허우대 좋은 남정네, 남편이라고 감히 할 수 없는 주인 같은 바알과 도시의 호화생활에 빠져 외도하는 한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을 비유함니다.

 

그런데, 변심한 그런 여인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타이르되 출애굽 후 40년 광야에서 고생했지만 행복했던 신부신랑의 허니문 밀월시대 그 때를 생각하게 하려고, 그녀를 광야에로 데리고 가서 타이르겠다는 것입니다. 제 발 지금 그대가 몸과 맘을 다 빼앗겨 푹 빠져있는 그 사람은 ‘남편’ 이 아니고 언젠가 임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가 시들어버리면 언제든지 버리고 떠날 여러 첩을 거느리는 ‘세도가’(바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서 깨닫고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질적 차이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성경 신앙이, 매우 역설적이게도 가장 이상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치적 군신관계로서도 아니고, 봉건시대의 주인과 하인관계도 아니고, 선생과 학생사이의 사제관계를 넘어서 장가들고 시집가서 살을 석어살고 맘을 서로주고 받으며 일심동체로 살아가는 부부관계로서 은유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0-21)고 말씀하셨던 가 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보면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귀의하고 있는 기독교마저도 ‘진정한 남편’이라고 말 할 수 없으며, 과거 우리민족에게 풍류도, 무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 우리조상들에게 남편노릇 했던 다섯 종교가 있었듯이, 지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도 궁극적 마지막 참 ‘남편’은 아니고 종교사속에 나타난 매우 훌륭한 잠정적 동거인 인뿐이라고 상대화시켜 볼 줄 알 때, 진정한 기독교신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언하는 신비자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셔서, 자기가 남편 되고 인간들을 자기 신부로 삼아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인간들이 남편인 자기를 버리고 자기 이외 다른 것 예들면 기독교라는 종교, 성경이라는 경전, 거대한 성전건물이나 저명한 성직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못견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관념적 변증법을 가르친 헤겔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정반합의 변증법적 종교사 발전단계의 마지막 완성체라고 강조했지만, 서구 철학적 해석임이 들어난 것입니다. 차라리, 초기 칼 바르트가 1920년대 <로마서 강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계시는 역사적 종교들을 심판하는데, 그 종교들 중에는 기독교라는 서구당시 종교도 포함된다고 일갈한 예언자적 포효 속에서 더 진실에 가까운 종교개혁자의 영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3.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교권체계를 우상화 한 집단

 

종교개혁 정신에서 정직하게 한국 기독교사를 돌아본다면, 한국 개신교 역사 130년 동안, 적어도 4가지 우상을 섬기면서 참 하나님을 배신하고, 참 복음을 우롱하였고, ‘참사람이시고 참 하나님, 어린양이시고 사랑의 화신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는 범죄를 저질러왔습니다.

 

첫째 우상은 국가주의 우상이었습니다. 20세기 전반기는 특히 세계 제1,2차 대전 전쟁은 국가주의 우상이 세계사를 비참으로 몰고 가던 시기였습니다. 히틀러의 독일국가주의, 일본의 대동아 평화명분이 일본국가주의, 뭇소리니의 파시즘, 그 밖에 모든 국가들도 온 우주를 주고도 바끌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생명가치를 ‘국가’라는 우상 앞에 무조건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전쟁터로 젊은이들을 내몰았습니다. 극소수 독일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교회가 제3제국 국가주의 우상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둘째 나타난 우상은 ‘정치이념’이었습니다. ‘냉전시대’라고 하던 그 시절 한국 기독교는 ‘극우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했습니다. 그 우상숭배는 오늘까지도 건재합니다. 화해와 사랑의 복음정신을 내팽개치고 새 시대를 앞당겨보려고 애쓰는 기독교 교회 형제들과 <생명, 평화, 정의> 사회를 이러보자는 시민운동마저도 모두 ‘종북세력, 친북세력’이라고 정죄하거나 단죄하는데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우상은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아주 휘황찬란한 의상을 입고 등장한 ‘무한성장, 무 한경쟁, 약자도태’를 지지하는 ‘the more ,the better'의 맘몬숭배입니다. 1980년대 이후, “교회는 하나요,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며, 거룩한 공동체’라고 말하는 교회론은 더 이상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 대형교회들이 나라의 대통령을 세우기도하고 폐하기도 하고 무릎 꿇리기도 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종단으로서 기독교 종교단체임을 과시했는지는 몰라도, 그 댓가로 예수는 죽고 복음은 ‘싸구려 상품’처럼 그 품위가 전락되었습니다.

 

넷째 우상은 언필칭 <오직 성경만!>이라고 주장하는 독단적 교리주의가 성경을 우상화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예루살렘중심주와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형제를 이단정죄하고 자기교단 과거 전통을 절대시하며 서로 경쟁적으로 장자권과 우월성 다투는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앞서 말한 4가지 우상들은 쉽사리 단결하여 다가오는 새 시대의 아기탄생을 막고 산모와 태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4. 맺음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답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단순성과 순수성을 상징하는 정신의 거친 들과 광야로 나아가, 자발적인 절제와 청빈을 통해서 내 영혼 속에 들어온 거짓 배우자를 몰아내고 참 님과의 화해와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하자, 마음을 비운자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지금은 종교개혁시대 이후시대라는 자각과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도 궁극적인 참 남편은 아닌 잠정적 동거인이라는 자각을 가지는 고도의 자기부정의 정신입니다. 그 때라야만, 진정한 개신교 신앙인이 되고 역사 상대적 교회나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영원자를 만나고 영원을 증언하는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 말을 인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이란 그 무엇,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주인이며, 바로 그러하기에 그 무엇 그 누구에게도 봉사하는 자유를 지닌 섬기는 자 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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