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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구미정 교수

주의 어머니 마리아

누가복음 1:39-45

 

2010년 12월 12일 대림절 둘째 주 주일예배

구미정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님들을 다시 뵙게 되어 반갑고 고맙습니다. 오늘 제가 새길교회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것입니다. 대림절 기간에 한번 묵상해봄직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고 발견한 은혜만큼 여러분께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우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여성은 엘리사벳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영락없이 ‘미혼모’ 신세인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피신 왔는데, 그런 마리아를 보고는, 어쩌다가 이리 됐냐, 애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냐, 아이고 팔자 한번 기구하네, 이런 따위의 말은 전혀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42절)라고 운을 뗍니다. 세속의 시선, 세상적 기준을 완전히 전복하는 관점이지요. 이런 엘리사벳의 눈, 이른바 영안 또는 혜안을 가지려면 필요한 것이 “성령 충만”(41절)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크리스천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의 어머니’라 호칭합니다. 문자 그대로는 우리 주님, 곧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라는 뜻이지만, 저는 그걸 더 깊은 의미로 해석해보고 싶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아주 암울한 때였습니다. 구약성서의 맨 끝을 장식하는 말라기 예언자 이후 4백 년 동안 예언도 그치고, 징조도 사라진 이스라엘의 암흑기입니다. 게다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역사적 사실이지요. 어둠이 깊다는 것은 새벽이 멀지 않은 때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가요? 그렇게 깊은 어둠 속에서 홀연히 하나님이 일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바로 한 여성을 통해서 말이지요.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닙니다. 유대 땅의 수도도 아닙니다. 저 변방 갈릴리 나사렛 동네입니다. 가난한 시골처녀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이 엄청난 일을 도모하십니다.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커밍아웃 하신 순간부터 줄곧 해오던 일, 눌린 자의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해방과 자유, 정의와 사랑을 가져오는 일, 그 일이 지금 한 여성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의 정확한 신상 정보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나마 마리아라는 이름이 유일한 단서인 셈인데, 당시에는 이 이름이 우리나라 ‘영자’, ‘순자’만큼 흔한 이름이라 그다지 중요한 단서도 되지 못합니다. 다만 마리아라는 이름이 구약의 유명한 여선지자 미리암의 헬라식 표기라는 점만 짚고 넘어가지요. 그러니까 상징적으로 마리아는 이집트 제국의 노예살이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해방시키는데 온몸을 바친 미리암의 화신(化身)인 겁니다. 적어도 신약성서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의 운명은 그래야 했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시대의 여선지자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다지요?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에서는 약혼이 결혼에 버금가는 효력이 있으니까, 내용상 둘은 이미 혼인생활을 시작했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요셉이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원래 베들레헴 출신인 요셉이 나사렛이라는 타지에 와서 살다 보니, 아내를 맞이할 준비가 채 안 되어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그 무렵, 마리아가 임신한 거지요. 물론 뱃속의 아기는 요셉의 씨앗이 아니었고요. 그렇다면 관례상 마리아는 돌로 쳐 죽이는 극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마리아의 정조를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지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20-21)

 

이 대목만 보면, 요셉은 틀림없이 백마 탄 왕자예요. 마리아의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씨까지 살려주고 거두어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이렇듯 요셉의 비중을 크게 다루면서 그의 인품과 역할을 소상히 그리고 있는 데 반해, 누가는 별로 그러지를 않습니다. 실상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 사건을 먼저 다루고 있지요.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중요한 건, 누가의 첫 장에서 주인공은 단연 여자들이라는 사실이지요. 온통 남자들 이름으로 도배된 족보 이야기부터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예수를 어떻게든 다윗 왕과 연결시키려고 몸부림치는 마태와는,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또 이 두 여성이 어떻게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운명적인 연대를 이루는지에 방점을 찍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은 이름만 슬쩍 언급됐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도 않지요. 한편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는 명색이 직업이 제사장이라면서, 아들을 점지해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됩니다.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불가해한 일들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는데, 남자들은 믿지 않거나 수동적이에요. 이쯤되면 누가복음의 편파보도에 남성들이 슬슬 화가 나지 않으시는지요? (그래도 마태복음이 누가복음보다 ‘앞’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 이야기의 백미는 마리아의 ‘순종’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요셉의 ‘순종’을 강조한 것과 완전한 대비를 이룹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말하는 상대도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입니다. 그것도 꿈이 아닌 생시에 천사가 직접 마리아의 집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누가복음 1:30-31) 누가에 따르면, 천사가 예수의 이름을 알려준 상대 역시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고요. 세례 요한의 경우에도 이름을 짓는 사람은 아버지 사가랴가 아니라 어머니 엘리사벳입니다.

 

유명한 마리아 찬가도 누가복음에만 나오지요. 노래 속에서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합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하에서 주권을 잃고 강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자기 자신의 비천함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힘센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다”는 49절의 고백은 단순히 마리아에게 일어난 임신 사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큰 일’의 내용인즉,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신 일, 주린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은 빈손이 되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얼마나 정치적인 노래인지 모르겠습니다. 세도 부리는 강자들과 부자들을 대놓고 저주하며 조롱합니다. 힘없는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한없이 편들고 옹호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이 바로 그렇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이 마리아의 노래 속에 오롯이 예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주의의 포로입니다. 오죽하면 종교인들마저 기도할 때는 저마다 자기만 잘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으면 좋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사기를 치는 게 인간입니다. 거꾸로 하는 기도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내 뜻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내 뜻은 깨끗이 접을 테니, 제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이 곧 제 뜻이기를 바란 여자입니다. 그러한 바람에는 내 안의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불가능한 숙제를 해내려고 애쓴 여자입니다. 엘리사벳 식으로 표현하면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이기에 “행복한” 여자인 거지요. 뱃속의 아이, 하늘이 점지해준 아이, 성령으로 잉태된 이 생명을 통해서 일신상의 편안함과 호의호식을 꿈꾸는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요?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자식을 자기 삶의 연장으로 이용하고 조종하려는 마음도 내려놓습니다. 이른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모든 어미의 근원적인 소망, 곧 제 자식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본능적인 생각도 일찌감치 접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러한 내적 투쟁과 고민의 산물이었습니다. 자기 태(胎)에 둥지를 튼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생각, 그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자매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다”(마태복음 12:48-50; 마가복음 3:33-35; 누가복음 8:21 참고)라고 말했을 때, 자기 역시 혈연가족을 넘어 우주가족의 한 사람으로 기꺼이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그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또한 부활의 새벽을 누구보다 먼저 맞이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아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부정하고, 자기 안에서 발견한 신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삶을 살기로 결단했을 때, 어머니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우리 모자 관계도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요. 장자에 나오는 ‘오상아’(吾喪我), 곧 내가 나를 죽여 장사지내는 일은 예수에게만 주어진 숙제가 아니라는 것을요. 마리아 역시 한 생을 통해 그 숙제를 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 사상가였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표현을 빌면, 마리아는 정녕 그와 같이 “자유롭고,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고, 아집을 벗어던진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영원한 ‘처녀’입니다. 엑카르트가 이해하는 처녀라는 말은 “모든 그릇된 상(像)을 여읜 사람,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초연한 사람”을 의미하지요. 그런 측면에서 예수도 ‘처녀’라고 합니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사람이 항상 처녀로만 있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덧붙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처녀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선물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선물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낳아 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처녀는 다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엑카르트의 표현을 빌면, 우리 믿는 자는 모두 “하나님-아기를 낳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어머니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를 이토록 선명하게 해석해준 신학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엑카르트식 이해의 틀 안에서 마리아는 그야말로 ‘처녀’인 동시에 ‘어머니’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주의 사람들에게 매순간 하나님을 낳으며 살아야 할 숙제를 온 몸으로 보여준 참 사람의 전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통해 태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이 너무나 탐욕스럽고 우리 영혼이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어서 보지 못할 뿐, 모든 사람 속에서는 다 하나님의 씨앗이 심겨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씨앗이 있음을 깨닫고, 그 씨앗이 제대로 자라도록 기도하며 노래한 여성입니다. 마리아가 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도록, 새로운 시대를 거듭 열어 가시도록 부단히 생명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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