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51.70.169) 조회 수 5824 추천 수 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한완상

사랑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1:20-21, 고린도전서 15:36-37

 

2010년 11월 14일 남선교회헌신예배

소천하신 교우 추모예배

한완상 형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다운 공동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여러 교우들과의 영적 코이노니아도 우리들의 회상 속에서 따뜻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은 그분들이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새길 공동체에서 함께 서로 나눈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려 합니다. 이런 회상을 통해 복음이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기쁜 소식임을 새삼 확인하고 싶습니다.

  요즘 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파트 창문을 열고 아파트 단지의 앞마당에 있는 은해나무 잎이 얼마나 더 떨어졌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봅니다. 젊었을 때는 노랗게 깔려 있는 은행나뭇잎을 보며 “아 가을은 참 아름답구나.” 라고 감탄했지요. 헌데 지금은 흩어져 있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저것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하고 조용히 탄식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기야 장독대에 잠시 머물고 있는 먼지와 같지요. 바람이 불면 휙 날다가 없어지고 마는 먼지 같지요. 성서도 우리 삶이 잠시 풀의 꽃과 같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풀은 어김없이 마르게 되고, 꽃은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아빠(Abba)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심을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하지요.

  이 사랑은 회상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항상 아름다운 회상이 살아 움직입니다. 지난 일이 한낱 낡은 기억의 대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며 보다 밝고 맑은 내일을 추구하게 하지요. 그러기에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닙니다. 증오는 때때로 사랑의 변형이기에 회상의 힘을 갖고 있지요. 정말 무서운 것은 회상을 어렵게 하는 잔인한 무관심과 망각이 바로 사랑의 반대입니다. 회상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정말 두렵습니다. 그래서 치매가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사랑하는 이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의 관계도 무참하게 깨트려 버립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게 되지요. 나아가 사랑의 하느님도 망각하게 되지요.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기독교와 교회가 오랫동안 역사의 예수를 망각해왔음을 새삼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교우들을 회상하는 이 시간 저는 갈릴리 예수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조명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아빠지배, 또는 아빠 하느님의 사랑지배를 이 시공간(역사) 속에서 누룩처럼 번지게 하는 일이 너무나 절박한 우리 예수 따르미의 소명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관(神觀)은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무서운 보복의 신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 같은 인자하고 자상하신 하느님 이지요. 우리는 갈릴리 예수의 이 같은 파격적 하느님 이해를 그의 비유들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가 부각시킨 그 파격적으로 너그러우신 하느님 모습을 잠시 살려 봅시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의 아버지는 당시 유대가부장적 문화의 전형적 아버지와는 너무 다릅니다. 부친이 사망해야만 부친의 재산을 분깃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데도, 망나니 둘째 아들은 그 분깃을 먼저 요구 합니다. 그것은 부친의 사망을 원한다는 뜻이지요. 정말 불효자식이지요.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것을 파격적으로 허락합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징벌하려 하지 않지요. 그리고 그 자식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아빠는 자기를 사랑하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불효막심한 탕자를, 처참하게 실패해서 돌아온 불효자식을 오히려 무조건 사랑으로 껴안는 아빠였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자식을 더 강열하게 품어 용서 하시는 사랑의 아빠 하느님이시지요. 항상 탕자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렸던 아빠의 마음은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는 한없이 넓고 깊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런 아빠 하느님의 사랑이 다스리는 새로운 질서를 갈릴리 예수님은 우리가운데서 세우려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존 제도에 대한 엄청나게 새로운 대안질서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어떠합니까? 유대율법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愛神)과 이웃사랑(愛隣)을 실천해야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갈릴리 예수는 이 비유에서 이웃사랑은 원수사랑까지를 포함하는 넓고 깊은 사랑임을 증언합니다. 자기와 가까운, 동질적인 존재만이 이웃이 아닙니다. 자기를 경멸하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존재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 있으면, 조건 없이 가까이 가서 자기 몸처럼 그를 돌보는 행동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사랑은 愛神의 수준과 愛隣의 수준을 뛰어 넘는 사랑, 곧 愛敵(원수사랑)의 파격적 수준에 이르는 사랑이지요. 강도만난 불행한 유대인을 이웃으로 볼 뿐만 아니라, 평소 사마리아인을 그토록 능멸하고 억압했음에도 바로 그 유대인에게 이웃으로 행동하는 파격적인 사마리아인의 사랑이 바로 예수의 사랑이요, 아빠 하느님의 사랑임을 이 비유는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바로 이 같은 사랑지배를 예수님은 꿈꾸었고 그 꿈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의 산 위의 설교에서도 예수님의 비젼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흥미로운 삼단논법에 우리는 주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팔복 중에 가장 큰 복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입니다. 누가 그 축복을 받게 되나요? 평화를 만드는 자 아닙니까! (마태복음 5장 9절) 그런데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45절까지 보면, 흥미로운 예수의 대안적 인식이 나타납니다. 전통은 愛神하고 愛隣하면서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만, 예수님은 그것만 가지고 안 된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지요. 자기를 핍박하는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하면, 아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충격적 선언이라 하겠습니다.

  이 두 말씀을 이어보면, 예수님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가 되고, 또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평화 만들기와 원수사랑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요. 원수사랑을 통해서 참 평화를 세울 수 있고,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큰 축복을 받게 된다고 설파하셨지요. 하느님 자녀는 자연스럽게 하느님 아빠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닙니까! 구태여 愛神을 강조한다고 해서, 또 愛隣을 소리 높여 외친다고 해서 구원받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참 평화를 만드는 자에게 아빠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내리시게 되지요. 영생의 선물이 바로 그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삶과 죽음을 뛰어 넘는 기쁨을 온 존재로 느끼는 그 축복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아무리 외쳐댄다 해도, 원수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때, 아니 원수를 더 미워할 때 하느님의 축복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복음이라면, 오늘 분단된 우리 조국상황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증오하는 것을 신앙과 신학의 차원에서 옹호하는 오늘의 한국기독교인들은 과연 예수님의 복음에 충실한 분들일까요?

  이제 사도 바울의 복음을 갈릴리 예수의 운동의 빛 아래서 한 번 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운동을 역사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일이야 말로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초기 예수 따르미들은 막강한 로마권력체제 안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고 때로는 처참한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제 명대로 못 살았지요. 아빠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려는 예수 따르미들은 예나 지금이나 능멸과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온갖 역경 속에서도 그는 아빠의 사랑을 체험했고 또 선포했습니다. 비록 그는 갈릴리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못지않게 예수운동, 예수비젼, 예수꿈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하기야 그의 신학적 예수이해는 주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신학적 이해이기도 하지만, 그는 역사의 예수의 말씀의 본질, 곧 사랑 본질을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주옥같은 사랑편지(고린도전서 13장)는 우리를 영원히 감동시키는 복음의 메시지가 아닙니까. 그는 이 사랑예찬에서 사랑의 카리스마가 가장 강력한 것임을 웅변적으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산을 옮길만한 신앙의 카리스마도, 모든 비밀을 다 알아내는 지식의 카리스마도, 예리한 예언의 카리스마도, 자기 몸을 불사르는 순교의 카리스마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같이 막강한 사랑의 효험을 매일 매일 체험했던 바울은 그 어떤 괴력도 이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음을 또한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8:31-39)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장엄하게 선포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표현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도 우리 연약한 인생을 아빠의 그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참수당하기 전 빌립보 교우들에게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놀라운 인식입니다.

 

  “나에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빌립보서 1:21)

 

  여기 유익하다는 것은 영어로 소득, 이익을 뜻하는 ‘gain’입니다. 죽는 것이 추상적으로 ‘보람있다.’가 아니라, 죽음이 구상적으로, 구체적으로, 또는 몸에 와 닿게 이익이 된다는 고백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장사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구체적으로 즐거운 일 아닙니까. 바울은 죽음도 그렇게 유익하다고 고백했기에, 죽음과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고백 했지요. 도대체 이렇게 행복한 고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같으면, 천 번, 만 번 삶(生)을 택하지요. 그런데 바울에게는 죽음(死)도 삶(生)만큼 가치 있는 계기요, 은혜라고 확신했습니다. 죽으면 즉각 천당 간다고 떠들어대는 신자들도 지금 당장 천당 가는 것을 택하라고 하면 주저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삶(生)이 훨씬 더 소중하고 유익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영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 동시에 입학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 학생의 고민은 정말 행보한 고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의 고민은 이 보다 훨씬 더 깊은 행복의 고민이 아닐 수 없지요. 예수 따르미의 행복은 사실 이 같은 바울 사도의 고민 수준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최고수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의 이 같은 기쁨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나라(Lovedom)의 그 완벽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역사현실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제도와 문명이 갖는 사탄적 힘이 위협하는 현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갖게 되는 기쁨을 고백했지요. 그렇다면 아빠 하느님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황(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어떨까요? 그 기쁨은 훨씬 더 신비하고 깊고 클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시어(詩語)로 표현 했지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하게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여기 얼굴이 누구의 얼굴이겠습니까. 인자하게 빛나는 아빠 하느님의 그 환한 얼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미소 짖는 얼굴 아니겠습니까. 비록 바울이 “희미한 상태”, “부분적으로만 아는 상태”에 처해있었어도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복음의 삶을 살았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같은 바울의 험난했던 삶을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빛 아래서 보게 되면, 더 올곧게 그의 복음운동이 이해되지요. 도대체 죽음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을 그는 땅 속에 심어진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아빠의 사랑 안에서는 죽음이 비참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었습니다. 땅 속에 뿌려진 씨앗의 모습은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지요. 씨앗이 스스로를 비우면서 그것이 거목으로 신비하게 변하게 된다고 믿었지요. 마치 번데기가 화려한 나비처럼 변모하듯 말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에게는 죽음은 새로운 변화, 더 아름답고 더 신비한 변화로 나아가는 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아빠와 면대면으로 서로 보면서 소통하는 엄청난 기쁨을 누리게 되지요. 그래서 죽음은 비참하거나 무서운 끝장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삶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죽음의 유익함을 깨닫고 죽음의 새로운 시작의 기쁨을 깨닫는 것을 제 2복음의 기쁨이라 부르고 싶군요. 바울은 이 제 2복음의 기쁨을 열악한 역사조건 속에서 전파했지요. 갈릴리 예수의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사랑의 기쁨으로 대체한 셈이지요. 이른바 속죄론의 기쁨도 따지고보면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제 2복음이 제 1복음이라 할 수 있는 예수운동, 곧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단순하게 비하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의 역사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질서를 세워나가야 하고 이 과정에서 평화와 공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예수운동 곧 제 1복음운동에 우리는 항상 헌신해야 합니다. 이 같은 예수 따르미의 헌신이 때로는 독선과 탐욕의 세상 권세로 인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한다하더라도, 예수 따르미들은 오히려 죽음이 주는 은혜로운 기회에 동참한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그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 1복음을 구현하는 우리의 예수운동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제 2복음이 주는 소망 속에서 더욱 신나게 지속 되지요. 죽음도 유익하다는 믿음과 죽음은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새 존재의 삶으로 인도하는 은혜의 문임을 믿는 소망 속에서 우리는 끈질기게, 신나게 사랑나라의 실현을 위해 헌신 할 수 있고 또 있어야 합니다. 제 1복음운동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 손잡고 추진하는 운동이기에(collaborative eschaton) 때론 넘어지고 힘들다 하더라도 기쁘게 그 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육신의 몸의 끝장이 영의 몸의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제 2복음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사나 죽으나 하느님의 사랑나라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게 해 주는 힘입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나 아빠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고 있는 우리 교우들의 흐뭇한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들은 죽어 망각의 블랙홀로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뜻 깊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의 실체로 살아 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쉬 이들처럼 신앙적 회상의 대상이 될 것을 내다보며 오늘, 여기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증거를 마무리 하면서 이미 소천하신 교우님들이 우리에게 남긴 아름다운 모습들을 새삼 떠올리면서, 저는 그들의 우리 곁에 있을 때 그들의 아픔을 충분히 동고(同苦)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한 박사님 너무 아파요 저를 꼭 안아주세요.”, 췌장암의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 신음했던 서문자 자매님은 병실을 찾은 저에게 기도 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요구했어요. 그를 꼭 안으면서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님, 자매님에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영의 힘을 주옵소서. 저희들도 자매님과 동고 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주옵소서.”

  얼마 후에 병실을 떠나면서 저는 무력한 허무감을 느꼈습니다. 저 신음소리를, 저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고 이렇게 병실을 떠나는구나. 하는 자괴감을 느꼈지요. 주님 저희들은 무력하나 주님께서 직접 자매님을 껴안아 주시고 고통을 덜어 주십시오. 하고 계속 기도했지요.

 

  우명미 자매님도 암과 혈투하며 아파했습니다. 한 번은 병원에 가서 빌립보서 1장 21절을 읽어주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메시지를 죽어가는 자매에게 알리는 것은 얼마간 잔인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때 우명미 자매님은 이렇게 증언했어요. “한 박사님, 저는 이제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이 정리되었습니다. 두렵지 않아요. 다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손주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워요.” 하면서 눈물을 훔쳤어요. 손주 사랑 속에 하느님 사랑이 녹아 있었으니, 자매님의 안타까움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우리가 손주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과 원수도 사랑 할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우리 속에서 누룩처럼 번지게 될 것임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남연 형제. 그는 가난했지만 봉사에는 넉넉했습니다. 교회 구석구석마다 그 형제의 채취를 느낄 수 있었지요. 살아있을 때 온갖 궂은 교회잡일을 몸으로 해냈지요. 이남연 형제는 자기 몸이 병들어 고생하면서도 남의 건강을 걱정해 주셨지요. 한양대병원에 입원해서도 이 말을 반복했어요. “한 박사님, 오래 사셔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한 박사님 자신의 소변을 마셔보세요.” 이 같은 주문은 엉뚱했지만, 그 마음은 너무 아름다웠어요. 사실, 몇 번 내 소변을 마셔보려고 하다가 결국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마음은 저희들 가슴 속에 지금도 살아 있지요. 결국 그의 사랑의 마음을 저는 마신 셈입니다.

 

  김정순 장로. 영낙교회가 낳은 걸출한 인물 중 한 사람이지요. 다른 한 사람은 조국통일을 위해 가시밭길을 친히 가신 홍동건 목사님이지요. 일찍이 교사, 교감, 교장을 지내시면서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했지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고, 뉴욕의 목요기도회 운동에서 기둥역할을 하셨지요. 미남이요, 멋쟁이 신사였습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귀국하여 다시 교장역을 밭았을 때 영낙에 가지 않고 우리 새길공동체로 나오셨지요. 과로하다가 쓸어지시어 병원에서 여러달 고생했습니다. 병실을 찾을 때마다, 그는 퀭한 눈으로 “한 박사님, 남북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언제 평화가 올까요?”를 물었지요. 그는 고향이 평안도였기에 평화에 더 관심이 컸지요. 그는 가장 냉전 근본주의가 강한 큰 교회의 장로였지만. 그는 냉전근본주의를 일직이 극복해낸 평화의 사도 예수 따르미였지요. 평화에 대한 그의 열망과 기도가 하루 속히 분단 조국에서 이뤄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남수 형제님. 남에 대한 배려가 너무 강해서, 그리고 자기의 딱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병문안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지요. 그도 고통으로 매우 고생하셨지요. 그렇게 아픈 중에도 새길 공동체의 사랑을 몸소 느끼시기 위해 여러 번 주일에 오셨지요. 그는 도무지 말이 없으면서, 그 무언의 깊은 곳에는 따뜻한 사랑이 항상 흘렀지요. ‘없는 듯 계시면서’ 새길 공동체의 구석구석을 알뜰하게 돌보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 저는 전화로 위로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전화를 했지요. 그 전화 소통이 무슨 힘을 주었겠습니까. 다만 도움 되지 못하면서도 전화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손일현 선생님은 저의 대학 선배님이시죠. 언젠가는 허심탄회하게 대화 하게 될 것을 기대했는데, 그만 너무 급작스럽게 소천 하셨지요. 선배님과 따뜻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아픕니다.

 

  이제 이런 회상을 통해 아쉬움을 가슴 깊이 담아내며, 저는 여러분들에게 꼭 상기시키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들은 먼저 가신 형제․자매들을 회상하고 있지만, 조만간 우리들도 회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회상의 대상이 되기 전, 우리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가 누룩처럼 번지게 하는 일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우아하게 지려는 사랑의 움직임이 항상 뜨겁게 솟아 올라와야 합니다. 남의 결점은 작게 보고 내 결점은 크게 보면서 겸손해지는 흐름이 항상 우리 속에서 뜨거워져야 합니다. 남에게 양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을 면대면으로 볼 수 있기 전에도 불완전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소통 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뜨겁게 함께 체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짧은 시간을 주님의 그 영원한 사랑에 잇대어 삽시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 그 오묘함에 항상 감격하며, 감동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체험 할 수 있으며, 죽음도 두려운 것이 아니라 유익한 기회요 은총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삶과 죽음이 아름답게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30 2010 [2010.12.19] 은혜는 치유하고, 진리는 자유케 한다 2010.12.29 김경재 목사
29 2010 [2010.12.12] 주의 어머니 마리아 2010.12.29 구미정 교수
28 2010 [2010.12.05] 가족 사랑과 하나님 사랑 2010.12.09 이경숙 교수
» 2010 [2010.11.14] 사랑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2010.12.03 한완상
26 2010 [2010.11.07]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1 2010.12.03 이주향
25 2010 [2010.10.10] 인권지킴이, 예수 1 2010.10.15 문경란
24 2010 [2010.10.03] 허무주의를 넘어 메시아를 노래하자. 2010.10.08 권진관
23 2010 [2010.09.26]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2010.10.05 이창엽
22 2010 [2010.09.05] 시대와 소통하는 지혜로운 신앙인 2010.09.08 김희헌 박사
21 2010 [2010.08.08] 일상 속의 수행 2010.08.10 김용덕
20 2010 [2010.08.01] 우리의 원수는 항상 악한가? 2010.08.05 한완상
19 2010 [2010.07.11] 신앙에 대한 성찰 2010.08.05 정양모 신부
18 2010 [2010.07.04] 생각이라는 것 file 2010.07.09 최현섭
17 2010 [2010.06.20] 사람 대접 2010.07.02 서광호
16 2010 [2010.06.20] 화와 해 2010.07.02 김성진
15 2010 [2010.06.20] 평화주의자 예수 2010.07.02 김유진
14 2010 [2010.06.13] 미니멀 file 2010.06.17 추응식
13 2010 [2010.06.06] 열린 식탁 공동체 2010.06.11 차옥숭
12 2010 [2010.05.30] 문익환과 윤동주, 그리고 찬송가 582장에 스며있는 이야기들 4 file 2010.06.03 한인섭
11 2010 [2010.05.23]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차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 1 2010.05.27 오강남 교수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