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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창엽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2:19-20

 

2010년 9월 26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이창엽 형제

 

 

안녕하십니까. 추석명절은 가족들과 함께 잘 지내셨는지요. 그리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고 계신 분들에게는 평소보다 더 마음이 짠한 시간들이었겠지요. 여러분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늘 함께 하셨기를 바랍니다.

 

지난 8월 10일 오전에 여느 때처럼 환자를 보는 틈틈이 불교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리학 지식이 부족해서 임동건 형제님께 여쭈어서 친절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다소 장황하지만 그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고전 물리학은 원자가 거의 대부분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이 그 공간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양자장 이론에서는 질량과 에너지의 모든 형태가 빈 공간에서 출현하는 수학적인 추상으로 축소된다. 이것은 사물이 진짜 물질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고 절대적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19세기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다시 읽어 보아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네요. 나중에 보충수업을 들어야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읽고 불교와 양자물리학이 세상을 유사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그 전날 천연가스버스 폭발사고로 부상 당한 사람들 중에 20대 여성이 양쪽 발목을 절단하는 수술을 고려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방금 전에 저의 머리속을 차지하고 있던 내용을 기억하고는, 문득 부처님이 말씀하신 화살을 맞은 사람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고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달려와서 황급하게 화살을 빼려고 하는데 화살을 맞은 사람은 질문을 쏟아냅니다. 누가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화살을 쏜 사람은 어디에 있지? 이 화살은 무슨 종류이지? 그러자 친구들은 그 사람에게 입을 다물고 어서 화살을 빼자고 다그칩니다. 사변적인 논란은 놓아두고 화살로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당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양자역학과 불교에 대한 설명처럼,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 젊은 여성이 겪은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에 만연해 있는 고통을 해결하는 데 그런 공부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저를 일깨웠습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해 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낮에 버스가 폭발하고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것 같은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내 가슴이 아프다면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버스 폭발과 같은 일입니다. 따라서, 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 하느님나라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지금 여기서 나와 내 이웃의 고통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길은 죽은 후에야 들어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맞이하는 하느님나라로 가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믿음에 관한 것들은 우리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오랜만에 사도 신경을 읽어 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구절들은 제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게는 예수님이 다른 존재들을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라는 믿음이 그런 것입니다. 제게 예수님의 부활은, 도마처럼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본 후에 믿게 되는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이천 년 동안 마치 그분이 늘 함께 살아계신 것처럼 예수님은 이미 부활해 계시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무조건 사랑하기만 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저는 저 자신을 먼저 챙기는 이기심을 떨구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죄라면 원죄라고 할 수 있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처럼 스스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과는 좀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신학강좌에서 연자께서 다음과 같이 추천해 주셨다고 합니다. 제가 듣지 못한 신학강좌의 이 내용을 홈페이지 게시판에 써 주신 이상길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특히 예수살기를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첫째, 하루 30분 이상 기도해 보라.. 둘째, 매일 성서 읽기를 해보라.. 세째, 성령을 체험해 보라.. 아니면 영성체험이라도...하라.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실제로 이런 수행 방법이 익숙하고 좋다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도 하기, 성서 읽기, 성령 체험이나 영성 체험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방안이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성서 읽기는 어떻습니까. 여러 번 읽으면 문자의 뜻이 저절로 풀어진다는 옛 말씀은 뜻글자로 된 한문 서적에나 해당되는 말이지, 성서를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나라가 무엇인지 저절로 깨우쳐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 책들 중에는 새길교회에서 계절마다 나오는 <새길이야기>도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이 일제 시대에 <성서조선>이라는 기독교 잡지를 발간해서 조선 땅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간직했다면, 현대 한국에는 <새길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계간지에는 하느님나라를 향해 가는 길에서 길잡이가 되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새길교회에서 봄가을로 계속하고 있는 신학 강좌를 통해서도 성서를 읽는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그뿐 아니라 매주 예배에서 진행되는 말씀증거의 내용들도 바로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길잡이가 되는 말씀들입니다. 그동안 있었던 말씀증거와 신학강좌, 그리고 계간지 <새길이야기>의 자료들만 해도 몇 년을 두고 계속 복습해야 할 정도로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신도 공동체를 유지해 가려면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이런 내용들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부담을 가지는 분들도 계실 줄로 압니다. 하지만, 목사님도 없이 교회를 꾸려가는 일이 쉽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말씀 드리고 나니, 교회 다니는 일이나 하느님나라로 가는 길이 신학을 공부하는 교수님들에는 익숙한 길이고 우리 같은 평신도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리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한 사람의 목수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짐작하기로는 예수님은 책을 공부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일상생활 속에 있는 하느님나라를 꿰뚫어 보신 분입니다.

 

그려면 두 번째로,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제가 식견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우리 새길교회에서는 하느님이나 예수님, 또는 한국 교회에 대한 말씀들은 많이 나누시는데, 어떻게 기도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나누시는 것을 접한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저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대화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기도하는 방법을 불교에서 찾아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중에서 구체적인 기도의 방법을 거기서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찾고 있습니다. 이런 길을 제가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신 길희성 형제님을 비롯한 새길교회 자매형제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명상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공부도, 수행도 부족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기도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모색 중인 것으로는 예수의 기도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오강남 선생님께서 2003년 6월에 새길교회에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희 부부가 새길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때가 바로 2003년 6월부터였으니 묘한 인연이라면 인연입니다. 지난 12일에 윤진수 형제님께서 동방정교를 소개해 주셨는데, 예수의 기도는 바로 그곳의 전통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렇게 간단한 구절의 기도를 기회가 되는 대로 하루 종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기도에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내용은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거나 아들을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거나 아픈 사람을 낫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이 땅에 세속적인 정의가 실현되게 해 달라는 이타적 내용도 예수의 기도의 근본 정신과는 다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기도는 공의를 위해서든, 개인적 소망이든,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가득 채우고 넘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간절한 소망이나 사회 정의가 값싼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의 기도는, 그보다는, 우리가 그런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성령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고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운전하다가 깜박이도 켜지 않고 위험하게 차선에 갑자기 끼어드는 다른 운전자를 욕하고 싶을 때 제 마음은 바늘보다도 좁아집니다. 그러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성령이 깃들 수 없으므로, 제가 옳고 저 운전자가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의미로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읊조립니다. 어떤 일로 감정이 많이 상해서 제 마음이 늘 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떠나 정처없이 헤맬 때에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를 괴롭히는 일이 생겼는데 그 일과 그 사람들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지향하는 것은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 바울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기도, 이것이 제가 지금 연습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그 수행 방법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김용덕 형제님께서 일상 속의 수행을 하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그 제안에 대한 저의 소박한 답입니다.

 

세 번째, 성령 체험이나 영성 체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모릅니다. 아버님이 이사를 가시려고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아파트 계약을 하는데, 매도하는 여성분이 “믿는 분이세요? 그렇군요. 하나님이 다 이렇게 연결해 주셔서 거래가 이루어진 거지요.”라고 말하더군요. 이렇게 소박하게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성령 체험이나 영성 체험을 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성령 체험이고 영성 체험인가요? 성령 체험이라는 말이 풍기는 느낌처럼 극적인 경험이 제게는 아직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짐작하고 있는 것은, 먼저 말씀드린 예수의 기도를 꾸준하게 계속하면 어느 날인가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말과 표정과 태도와 행동 속에 평화가 깃들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영성 체험과 성령 체험은 이런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당신을 따르기를 바라지 않으셨고, 우리가 기적을 행하거나 경험해야 하느님나k라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지극히 경청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성령체험에 이르기 위한 길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새길교회의 역사에 숨어 있는 흥미 있는 여러가지 일들 중에 계간지 새길이야기와 관련된 일을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새길이야기> 2005년 여름호에 김우택 형제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시장경제, 사유재산제도, 경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호인 2005년 가을호에서는 정대현 형제님께서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의견을 실으셨지요. 이어서 2005년 겨울호에 김우택 형제님은 정대현 형제님의 평에 대해서 재응답에 해당하는 글을 실으셨습니다. 시장의 역할과 규제, 그리고 사유재산에 대해서 두 형제님들께서 지면을 통해서 이렇게 우아하게 토론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참 좋았습니다. 제게 공부가 된 것은 두 분 글의 내용보다는 두 분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 받는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서 두 분 형제님들처럼 새길교회 안에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른 의견들이 있는 모습은 한국 사회의 건강한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새길교회에 모인 것이므로, 시장 경제를 비롯한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한다고 해도 우리들이 굳이 새길교회에 함께 모여서 그 이야기를 나누는 근본적 이유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고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두 분 형제님께서도 아마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장경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기를 잘 했지만, 그것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과 태도가 많이 모자랐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 의견이 옳다는 것을 주장할 줄만 알았지 내 의견과 다른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이 공감하도록 주의 깊게 말을 건네는 태도는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청하는 태도를 보여주신 두 분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새길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정모 형제님께서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 제가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답글에 대해서 이정모 형제님께서 다시 진지한 답글을 올려주셨구요. 그렇게 해서 여러 차례 글이 오고 갔습니다. 이정모 형제님께서 그때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신 태도가 제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제게는, 그 때 주고 받은 내용보다도 지금까지 제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 주고받은 마음이 더 소중합니다. 그때 저는 느꼈습니다. 아, 여기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한 곳이구나.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하느님나라를 향해 가는 길은 어떻습니까? 오직 그 목표만이 중요하고 그 과정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나라는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아직 아니지만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나라를 접하기 위해서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그곳을 향해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내디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나라를 두고 멀리서 찾게 되지 않을까요.

그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우리와 다른 식으로 하느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지난 8월 1일에 한완상 형제님은 우리의 원수는 항상 악한가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새길교회에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원수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없는 곳이 없이 모든 곳에 계시므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함께 계실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만나는 성령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전면적인 하느님나라에는 조금도 다가갈 수 없지 않을까요. 그 성령은 신앙에 대한 의견이 다른 사람이나 정치ㆍ경제 문제에 대한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은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합니다. 제 논리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려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저만 옳다는 자아에 사로잡혀 상대방에게 깃든 성령을 보지 못할까봐 조심하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이런 경우에도 예수의 기도가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최현섭 형제님께서 <생각이라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증거하신 것에 대한 저의 화답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조금씩 연습을 하고 있지만 저는 아직은 늘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합니다. 아직은 제 아집이 예수의 기도보다 힘이 더 센 모양입니다. 이런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가진 많은 의견들은 모두 옳고 진리는 따로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누가복음 4장 18절은 제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저는 우리의 삶과 이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따라서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원대한 비전이 멋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늘 접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삶은 수많은 자잘한 일들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내 얼굴 표정, 내 호흡이 고른 정도, 작은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등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나 하느님나라는 이런 소소한 일들 속에 이미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이런 일상 생활 속에도 속속들이 스며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누군가를 대할 때 미워하는 마음이 들면, 숨을 고르면서 차분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미워하는 것은 나인가 그리스도인가.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내 안에 살게 하고 있는가.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새길교회를 다니고 있는 제게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자매형제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므로 노무현이든, 한나라당이든, 미국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든,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내 의견은 옳고 상대방의 의견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불편한 마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안 자체의 옳고 그름도 중요하겠지만,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 하느님나라에 한 걸음 다가가는 연습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있는 하느님나라를 조금씩 실현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새길교회는 지역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모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생활하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런 비전을 마음에 품고 어떤 식으로든 함께 기도와 수행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향해 함께 손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얼마 전에 말씀증거에서 정경일 형제가 제안한, 우리가 함께 추는 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성령이 깃든 춤을 추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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