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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크리스마스의 기분과 예수가족의 아픔"

(성서본문: 마태복음 1:18∼25, 누가복음 1:51∼53)

 

1998.12.20

한완상 형제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

- 마태복음 1:18∼25, 누가복음 1:51∼53




  올해는 크리스마스 기분이 덜 나는 것 같습니다. IMF 한파 탓인 것 같기도 하고, 고개 숙인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기분은 여전히 들떠 있습니다. 그 기분은 예수 나심의 원래 뜻과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그 기분은 예수께서 탄생하셨던 팔레스타인의 상황과도 거리가 멉니다. 예수 탄생의 상황은 처절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 강대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에 대한 항쟁 문제로 내분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로마와 결사 항쟁을 주장하는 파, 로마와 적당히 화해하자는 파, 로마와는 관계없이 율법주의를 더 강화시키려 했던 파 등으로 갈라졌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헤롯당 간에 알력도 만만찮았습니다. 지도층의 분열 속에서 땅의 사람들(암하아렛츠)은 고통과 절망을 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 간의 대결도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평화의 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않았고, 대신 분쟁의 소음, 억압과 착취로 인한 신음의 소리, 그리고 전쟁의 소리는 더 높았습니다.


  이런 시기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기였습니다. 천지개벽을 기다리는 시기였습니다. 요즘 말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되는 때였습니다. 바로 이런 때 아기예수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칠흑처럼 어둠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여시고, 절망을 씹는 종과 같은 사람들의 뼈아픈 고통을 당신 것으로 아파하시면서 成肉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시어 가장 억울하게 오해받으시고, 가장 처절하게 고난 당하시다, 가장 처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쉽게 동일시(identify)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궁중에서 왕자로 태어났다면, 누가 감히, 특히 밑바닥 인생이 어떻게 그분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만인들이 그분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열린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열린 하나님께서 고통과 괴로움의 상황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모든 괴로움과 외로움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오늘 크리스마스 기분은 어떻습니까?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산타 클로스, 선물교환, 루돌프 사슴, 백화점 세일, 성탄 카드, 크리스마스 트리, 연인들의 모임, 가족의 재회 등이 떠오릅니다. 이와 같은 기분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의 상황과 예수 가족이 겪었던 아픔과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오늘 20세기 마지막 해를 눈앞에 두고 보내는 성탄절에 우리의 경박한 크리스마스 기분과는 사뭇 다른 예수 가족의 기분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당혹, 곤혹, 아픔, 처절, 고독 등을 겪었던 예수 가족의 기분을 오늘의 상황에서 이해해 봅시다. 먼저 예수 엄마 마리아의 고뇌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의 임신과 탄생은 어린 소녀 마리아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고뇌를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성서가 그것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고 있으나, 처녀가 별안간 임신하게 되었으니, 처녀의 이른바 순결성을 소중히 여겼던 당시 상황에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쳐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주는 익명성의 편리함은 없었지요. 게다가 사랑하는 약혼자 요셉을 설득하는 문제도 간단치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법적으로 대응한다면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에 따르면(신명기 22:23∼24) 공개 재판을 거친 뒤 돌로 쳐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가볍게 당한다면(신명기 24:1)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이혼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모두가 곤혹스러운 고통을 수반하지요. "왜 하필 나입니까?"하고 절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소녀 마리아의 그 당혹함과 아픔을 함께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아픔은 진리와 생명과 참된 길로 인도하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기분 속에는 전혀 이와 같은 아픔이 차지할 공간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忍從했습니다. 십개월간 세상의 수모를 당했을지라도 그녀는 참으로 놀라운 고백을 했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천지개벽의 노래입니다. 그녀가 잉태한 생명은 오만한 권력과 썩은 금력을 내쫓고, 허기진 가난한 자를 배불리시는 개혁과 혁명을 일으킬 존재임을 선포했습니다. 오는 카톨릭 교회에서 부각시키는 금관 쓴 마리아, 여황제 같이 위엄 있게 군림하는 마리아와는 사뭇 다른 마리아의 모습을 여기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들 뜬 크리스마스 기분 속에 변혁의 소녀 마리아가 있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불편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만삭의 마리아는 그 불편한 몸을 나귀와 요셉에 의지하여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요즘 좋은 시설을 갖춘 병원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는 젊은 엄마들이 많은데, 나귀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떠나는 만삭의 마리아, 그것도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던 요셉의 인도에 따라 떠나는 마리아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호텔 예약을 할 수 없는 당시의 딱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여행은 불편, 곤혹, 괴로움의 고행일 뿐이지요. 그것도 만삭의 배를 안고 떠나야 하는 마리아는 가는 중에 출산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괴로움을 속으로 꾹꾹 눌러가면서 가능한 한 요셉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던 마리아의 그 모습이 과연 들뜬 우리의 크리스마스 기분 속에 여과되고 있습니까? 그 모습이 과연 전통적 마리아의 성화 모습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화가라면, 몸의 아픔과 불편함을 참으면서 땀 흘리는 마리아의 그 깊은 내적 고뇌를 담아내 볼만합니다.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겨우 쉴만한 곳으로 마구간을 얻었을 때의 마리아와 요셉의 곤혹스러움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까? 수치심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그 묘한 기분을 말입니다. 가축처럼 취급당한 듯한 수모 말입니다. 마침내 산고가 시작되고 양수가 터져 아기 예수가 탄생했는데, 아기를 누일 곳이 없어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이 때의 마리아의 기분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지난 이천년간 낭만적으로만 다뤄왔습니다. 예수 부모의 실존적 아픔과 곤혹스러움을 모두 제거해 버렸습니다. 말 밥통에 누울 수밖에 없는 아기 예수가 마치 신나서 그곳에 누워있는 것처럼 우리는 떠들어대었습니다. 요즘 좋은 병원에서만 아기 낳기를 바라는 중산층 젊은 산모들이 젊은 산모 마리아의 이 아픔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 뿐입니까? 예수탄생이 헤롯왕에게 알려지자 헤롯은 유아학살을 명했습니다. 자기 아들로 인해 너무나 억울하게 죽게된 남의 아기들을 생각하면, 마리아와 요셉은 또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느꼈던 불안과 공포감은 또한 말할 것도 없지요. 과연 예수부모의 이와 같은 마음 고생을 오늘 우리의 들 뜬 크리스마스 기분 속에서 느낄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뒷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극형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자식의 처참한 모습을 그녀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30여년 전 말 구유에서 태어났을 때의 그 아픔과는 견줄 수 없는 고통을 어머니는 느꼈습니다. "아, 이 무슨 업보입니까?" 극형으로 너무나 처절하게 죽어 가는 아들을 목격해야 하는 어머니의 찢기는 이 아픔. 우리가 성탄절에 이 같은 예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함께 마리아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 됩니다. 바로 이 아픔은 성육신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파했어야 할 고통을 대신 주님과 그 가족이 아파했는데, 우리는 성탄절 기분으로 들떠 있으니 한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그러기에 껍데기 크리스마스입니다.


  이제 요셉의 고뇌를 생각해 봅시다. 요셉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마리아의 것과 견주어 결코 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리아보다 더 큰 인내를 요청 받고 있었지요. 그의 약혼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는 법과 사랑 사이에 끼어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는 원래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강경대응은 고려하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고 조용히 이혼하려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임신한 약혼자이지만, 아내를 맞아야하고, 아기 나을 때까지 참으며, 아기가 나오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해야한다는 엄한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는 이 명령에 경악했을 것이나, 조용히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랑으로 참으며 아내를 맞기로 하고, 아내의 아픔을 함께, 언제, 어디서나 나누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사랑으로 겸손하고 사랑으로 오래 참는 모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정말 조용한 영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12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났던 일은 예수 부모에게, 특히 요셉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사흘만에 겨우 찾은 어린 예수를 보고 마리아는 나무랐습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으려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어린 예수의 대답은 너무나 당돌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부모는 경악과 당황 속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특히 아버지 요셉은 자기의 아버지 위상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아찔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성서도 부모의 이러한 심정은 간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들과 아내를 항상 무대의 중심부로 모시면서도 자기는 하잘 것 없는 엑스트라로 물러나 있는 요셉의 인내와 외로움을 우리는 오늘의 크리스마스 기분 속에서 느낄 수 있는지요? 자기는 없는 듯 하면서 남을 위해 존재해 왔던 요셉의 인품이 참된 크리스마스의 인품이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어엿하게 고개 숙인 아름다운 남자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새길 공동체에는 요셉과 같은 남성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것이 새길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혹독한 경제난 속에서도 크리스마스 기분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값싼 기분에 젖기 쉽습니다. 온갖 상업주의의 선전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만은 아기 예수 탄생에서 예수 부모께서 느끼셨던 아픔과 외로움, 당혹과 경악, 인내와 순종을 한 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심은 이 같은 고뇌와 고통을 동반했습니다. 바로 이 고통과 고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거룩한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그 그릇을 마련해 봅시다. 그리고 이 아픔은 죽음의 어둠을 내쫓는 빛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불의와 교만을 내쫓는 정의와 겸손이기도 합니다. 그 아픔은 무관심과 증오라는 어둠을 쫓아내는 사라의 빛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는 이 아픔을 오래 전에 터득했습니다. 빛 되신 예수께서 평생 어둠의 세력에 의해 시달렸으나 빛은 마침내 어둠을 몰아냈습니다.(요한 1:5) 부활의 빛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성탄절의 아픔은 부활의 기쁨을 예고한 것이며, 성탄은 부활의 전야제일 뿐입니다. 윤동주는 일제지배하의 참으로 암울했던 1934년 12월 24일 다음과 같은 시, 를 노래했습니다.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오늘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아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맡노라

  여기 깨끗한 제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염소 갈비뼈같이 앙상한 몸으로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앙상하게 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지요. 그의 생명인 심지를 불살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백옥 같은 눈물을 뿌리기까지 하시면서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죽음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은 매를 본 꿩처럼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 마리아와 요셉의 고뇌와 고독, 그들의 인내와 겸손을 새삼 우리의 것으로 느껴봅시다. 경박한 오늘,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기분은 가도록 하고 예수 부모님의 그 인종과 겸손이 오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기에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리셨던 예수님의 그 아픔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 봅시다. 주여, 저희들에게 이 같은 겸손한 인종의 힘을 주소서. 이 성탄절 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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