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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도덕적 행위자들로 인하여"

(성서본문: 룻기 1장 15-22절)


 

1995.08.06

최만자 자매

.

[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

- 룻기 1장 15-22절

 


  인생의 불행은 무엇에서 비롯하는 것일까요? 우리 인생의 과정을 희비애락으로 표현하여 온 옛사람들의 말처럼 인생은 때로 즐거움도 있지만 그러나 때론 숨이 끊어질 듯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 행과 불행의 교차 속에서 웃고 울며 사는 것이 인간 삶의 여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찾아온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축복으로 쉽게 해석하고 감사할 수 있지만 우리가 당한 불행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심정을 갖게 합니다. 더구나 정직하고 신실하며 사랑이 많은 삶이 큰 불행을 당하고, 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와 갖가지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볼 때 그 부조리함에 대하여 분노까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인생의 불행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 불행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한 것일 때 사람들은 그것을 수용할 각오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오와 전혀 상관이 없는 천재지변이나 철저히 우연적인 사건에 의한 것일 때 우리는 '왜?' 내가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끝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하는 행이나 불행을 인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지'라는 식의 해석입니다. 성경에도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요한 9:1-2). 당시 유대사회의 지배적인 사고가 인과응보론적인 것으로 불행은 죄 때문이고 행복은 그의 공적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이러한 인과응보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9:3)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여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인과응보론을 교조주의적으로 절대화하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불행과 비극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갖도록 요구하신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유대의 공적사상은 구약성서의 인과론적 이해에 근거한 것으로 고난을 죄의 결과로 보며 공적을 가지면 상을 받는다는 보상에 집착하는 사고가 팽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응보관을 거부하였습니다. 불행의 요인을 밝히는 문제가 불행을 당한 사람을 향한 것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오직 그에 대한 관심은 지금 곧 그를 치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에게 있어 공적은 지극히 종말론적인 것이었으며 현세에는 도리어 핍박과 고난이 의로운 사람의 몫임을 가르친 것을 산상교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론적 이해는 단순한 이차원적 해석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해석될 수 있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는 비인과론적 불행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악인들은 오히려 장수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 의인들은 가난과 질병과 고난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봅니다.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 않습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해야 하는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의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욥의 고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욥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의인이었으나 마귀가 그의 의를 시험하고자 하여 온갖 불행을 겪게 하고 고통에 빠트립니다. 이 욥의 고난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의 친구들로부터 일어나고 세 친구와 욥 사이에는 뜨거운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보면 이 욥의 이야기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입니다. 즉 교조주의적인 인과응보론에 대하여 목소리 높여 그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교조주의에 그들의 인격이 매몰되어 있는 친구들과 더불어 씨름하면서 고난 속에 있는 인간의 생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책입니다. 신앙의 교조주의와 삶의 역설성 곧 부조리 사이의 긴장, 그리고 하나님의 본래성, 곧 하나님은 그 본질이 의로우심으로 공과에 대해 철저하게 의로 판단하여 보상하고 징벌하시는 분이라는 그 하나님 이해와 인간실존의 본래성 사이의 심각한 충돌을 다루는 책입니다. 까닭 없이 경건할 수 있습니까? 전혀 합리성 없이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 욥은 그 희생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없는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을 최상의 경건으로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주기도 하고 거둬가시기도 하는 역설적이고도 독단적인 매우 불가해한 섭리를 믿음으로 승인하는 행위가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욥기는 인생의 고난과 삶에 관한 전통적 이해에 대하여 항거하고 자신을 끝까지 변호하는 일종의 '저항과 변호의 신학'이라는 신학적 기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욥은 거세게 자기의 불행에 항거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나를 무릎으로 받았으며 어찌하여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렸던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도..."(욥 3:11-13). 그는 하나님께도 항거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 3:20).

 

  욥은 부조리한 고난 당함을 하나님의 인생 창조 곧 그 본질에 대하여서 그리고 자기의 전 실존에 대하여서 모두 부정하고 항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항거를 함에도 결국 욥은 이유 없는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그 불가해한 섭리를 승인하는 경건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욥의 선언은 까닭 없는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공적사상을 극복하고자한 성서의 노력의 산물입니다. 공적사상은 결국 하나님을 한정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과에 하나님의 행위가 전적으로 의존되고 마는 지극히 인간행위 중심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불행과 고난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어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성서본문에서 말하는 룻기의 이야기로부터입니다. 룻기는 구약 판관기 때를 배경으로 하는 퍽이나 전원적이며 인간관계가 사랑으로 얽혀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존재의 양식이며 삶의 깊은 차원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룻기의 이야기 또한 인생의 한 차원을 그려내어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이 책이름의 주인공은 룻이지만 그 처음과 끝을 나오미가 장식하고 또 두 여인이 함께 인생의 여정을 펼쳐가고 있으며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유대 땅에 기근이 들어서 먹을거리가 없어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이방나라 모압땅에 피난 오는 것으로 막을 엽니다. 그런데 무슨 연고인지 나오미의 남편이 죽고 그의 두 아들도 모두 죽고 맙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당하면서 나오미는 고향 유대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두 며느리에게 이르기를 각각 자기들의 친정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이에 작은며느리 오르바는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큰며느리 룻은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끝까지 나오미와 동행할 것을 간청합니다. 그 간청하는 내용이 오늘 읽은 성서본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고, 룻은 그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다가 보아스라는 집안사람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나오미의 대를 잇게 하고,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며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문장은 지독한 불행의 서곡을 울리다가 두 여인의 적극적인 삶의 현실을 보여주고 들판의 아름다운 전원에서 남녀의 힘찬 밭농사를 보여주며 나아가 남녀의 사랑의 속삭임을 보여주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얘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 룻기는 하나의 연극 같은 구성으로 짜여져 있고 우리가 교회에서 가끔씩 들어 익숙한 성경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인생의 실존적 차원들이 그대로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생의 비극과 환희, 생과 사의 고비들이 모두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들은 대체로 나오미와 룻의 아름다운 고부관계에 중심을 두고 늙은 시어머니를 잘 모시면 복을 받는다는 젊은 며느리들에게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은 다윗 가문의 위대함을 엿보여주기도 합니다. 또 유대 중심주의적인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주제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에서 각각 이 본문을 주목하였는데 그 이유는 나오미와 룻의 여성끼리의 연대를 의미화하거나, 해방신학에서는 룻과 나오미를 땅 없는 가난한 농촌사람으로 보고 이들의 고통과 노력을 생존을 위한 농민의 투쟁으로 해석해왔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제3세계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자신들의 어린 자녀들을 들판이나 공장에 내어보내 노동을 시킨다던가 또는 팔아먹기도 하는 자신들의 가난의 극한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현실에 비추어 어린 며느리를 들판에 나가 일하게 하여 먹고사는 나오미를 비판적으로 보려는 해석도 나와서 얼마나 성서가 자신들의 삶의 상황에 의하여 의미가 달라지는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에 대한 관심은 불행한 인생에 대응하는 룻의 행위가 어떤 것이며 그 결과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즉 서두에 시작한 불행과 고난의 문제를 초점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룻기의 시작이 인생의 험한 비극적 사건들로부터임을 볼 수 있습니다. 땅에 기근이 들어 먹을거리가 없는 세상,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유랑신세가 되었습니다. 배고픔과 떠돌이 인생, 처량하고 가엾은 생입니다. 이방에서의 외로운 삶도 어려운데 그 위에 죽음이라는 운명이 덮쳤습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인간의 유한함과 그리고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결국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한 사람도 아니고 세 남자였으며, 더구나 아들을 먼저 잃는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운명은 천운의 불행이 원귀처럼 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룻기 1:1-5절까지는 인생 비극의 상황들이 열거되는 듯 합니다. 기근, 배고픔, 고립, 죽음, 무자식, 늙음, 절망 같은 것들 그래서 모든 것을 상실하고 있는 이야기가 쏟아져 있습니다. 나오미는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지독히 팔자가 거센 여자, 죄인으로 하늘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래서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부탁합니다. 곧 즐거움, 나의 즐거움이란 나오미란 이름이 야훼께 얻어맞은 신세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쓴맛이라는 마라가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서두는 이렇게 불행의 연속과 고난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룻이 나오미와의 동행을 결단하면서부터 이야기는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룻은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동행하기로 결단하면서 시어머니의 허락을 간청합니다. 룻은 잠시 인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늙고 가난하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미래가 보장되는 친정 집과 새로운 남편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섰습니다. 사실 여기서 시어머니를 선택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입니다. 시어머니는 늙고 힘없는 형편이며, 또 룻의 미래는 지극히 불투명합니다. 친척과 어머니 집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큰 위험을 안는 것입니다. 의지할 남자가 없는 과부라는 처지는 씨족사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먹을거리도 보장받기 힘든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룻에게 재혼은 중요한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자연스레 그 길을 택하고 고향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을 낳아야만, 혹은 의지할 남자가 있어야만 생존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에서, 또 그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성들끼리 불신과 갈등을 일삼는 현실에서 룻은 매우 다른 결론으로 자기 인생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보장받았고 부인과 함께 하는 안정된 가족구성과 성적 억제의 문제도 없었지만 룻은 미래의 약속도 없고 젊음을 억제해야 하며 오직 늙은 노파를 시중 들어야 하는 부담과 타민족에 대한 강한 유대인의 배타주의에 시달려야 할뿐인 상황에서 나오미를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룻의 나오미 선택은 힘있는 자와의 결합이 아니라 약자에의 연대이며 이것은 그의 천성적 선함과 지극한 인간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룻의 결단이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반전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문을 다시 세워 공동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작인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이 룻의 결단은 나오미와 룻의 상호적 인간애를 만들어 냅니다. 두 불행한 과부는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알아채는 감수성을 가집니다. 마침내 나오미의 인간애가 룻을 향하여 발동합니다. 물론 나오미는 처음부터 룻의 행복과 권리를 우선적으로 생각한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룻의 인간적 삶을 위해 그의 마음 모두를 바칩니다. 나오미에게 룻은 애처로운 청상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설움을 넘어서 이 가여운 며느리의 미래를 보장해줄 짝(고엘)을 찾는 일에 나오미는 지략을 짜내고 룻과 함께 이를 실행합니다. 이제 두 여인은 그들의 불행을 몰아내는데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결국 나오미는 룻의 불행에 연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이기심으로는 룻을 평생 부리며 효도를 받고 지내도 될 일이었으나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가져올 다른 길을 택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두 여인의 의로운 행동에 감동되어 그들의 도덕적 수행에 연대하는 한 남성이 등장합니다. 그는 곧 보아즈입니다.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곧 들판에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줍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밭의 주인인 보아즈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즈는 룻의 행동에 감동하였습니다. "남편을 잃은 뒤에 댁이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자세히 들어서 다 알고 있고,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한 일은 주께서 갚아주실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룻기 2:11-12, 3:10이하). 그래서 그는 룻을 자기 밭에서 편하게 일하도록 배려하고 남자 일꾼들이 성희롱 못하도록 방패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룻의 고엘이 됩니다. 보아즈의 인간애가 룻의 행위로 말미암아 흘러나게 되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보아즈는 어려운 룻과 나오미에 대하여 공동체적 관심에서 사랑으로 그들의 보호자로 자청한 것입니다. 보아즈는 룻의 남편이 되고 룻은 아들을 낳고, 그 아들로 인하여 나오미가 자식을 얻으며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그 아기는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메시아를 탄생시키고 인류를 구원할 책임을 가진 한 공동체의 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물론 학자들은 4장 18절 이하의 족보는 후대의 편집이며 다윗 족보로 연결시키고자한 의도에 대하여 분석하고 있지만).


  이제 이야기는 서곡의 불행을 완전히 반전시키면서 밝고 명랑하고 아름다운 내용들로 채워집니다. 기근으로 인한 배고픔은 추수를 통한 풍요로, 질병과 죽음의 그늘은 건강함과 새 생명의 탄생으로, 상실과 고립의 삶은 결혼과 함께 사는 공동체의 생활로 절망과 쓴맛은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으로 바뀌어졌습니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불행에 대응하는 룻기의 독특함입니다. 욥 같이 변론하고 원망하며 자기 결백을 증명하려는 노력도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였거니와 욥은 인생의 고난과 삶에 관한 전통적 이해에 대하여 항거하고 자신을 끝까지 변호하는 '저항과 변호'의 신학적 기조를 가졌음에 비해 룻기는 항변이나 변호가 없습니다. 나오미의 자기 불행에 대한 '어찌하여'라는 탄식은 하나님께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당한 불행은 인생의 절대비극인 죽음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해결하지 못한 죽음의 재난을 의연히 극복하여 나갔습니다. 나오미의 비참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어머니의 경험을 이에 비유하곤 합니다. 룻에게 있어서 그 불행은 대결해서 처치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비밀한 영역으로 묻어두고 오늘의 삶에 충실한 수행자가 되어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도덕적 항변을 하고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역설성 곧 '고난을 통한 구원'에 항변을 제기하지만 룻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조용히 수용합니다. 욥은 부조리한 고난의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를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하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 말하지만, 룻에게는 하나님의 현현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일상적인 삶, 인생의 일상적인 자리에서 결코 그때그때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는 신의 계시가 즉각적이지 않는, 신이 숨겨진 부재의 현실 - 그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과 현실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룻기에는 하나님의 행동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경에서, 그때는 보리를 추수할 때였더라 라든지, 야훼께서 나를 빈손으로 되게 하였다 라는 등의 표현은 인생의 운명이 이미 나의 차원이 아닌 우주적이며 자연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태적으로 터득한 도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차원은 내가 처한 상황에서의 도덕적 행위자(moral agent)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관심이며,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며 생존할 수 있도록 하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에 나를 내어놓는 행위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바로 그 생존케 하는 작인이 되었고, 또한 나오미도 룻을 생존케 하는 작인이 되었습니다. 도덕적 행위자가 된다는 말은 거짓말을 안 한다던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일반 도덕주의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존의 위기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작인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에 있는 이로 하여금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작인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 룻이 그랬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생존케 하는 힘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행위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말하는 도덕적 행위자의 의미입니다. 거기에 율법이나 교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논증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스 요나스라고 하는 학자는 책임윤리란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를 보고 다만 돌보아야한다는 책임을 갖는 행위를 요구받는 것입니다. 룻기는 인생의 불행의 문제를 그 원인을 밝힌다거나 따져보는 일에는 야속하리만큼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다만 그 이후 살아가는 태도의 문제를 중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시고 새로운 삶을 예지하고 계신다는 암시를 줍니다.


  인생의 불가사의한 문제들은 늘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이런 불행이, 이렇게 의로운 사람에게 고난이 올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정의롭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가?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을 한마디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의 타락설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타락할 인간을 만들지도 않아야 했을 것입니다. 악성을 가진 인간존재를 창조하시어 수많은 생명을 죽게 하는 인류역사를 진행시킨 것은 차라리 잔인한 일일 것입니다. 성서는 어떤 복 방망이 같이 뚝딱뚝딱 두들기면 만사가 해결되는 그런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난 스네 가운데 계신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은 오히려 약한 것과 인간의 내면에 계십니다. 룻의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그 심성 안에 계시고, 나오미의 룻에 대한 극진한 배려 안에 계시고, 보아즈의 약한 과부들을 위한 고엘로서의 책임의식 속에 계시는 하나님, 곧 도덕적 행위 속에 계시며 그 행위의 작인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래서 인생의 비극을 행복으로 바꾸는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하나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인간의 역사가 전도되며 정의가 수립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룻의 이야기는 부조리한 인생, 모순 투성이의 인생이지만 그 부조리하고 모순 덩어리인 인생 속에서나마 좋은 날이 오기를 억척스럽게 기다리며 사는 비운의 여인들의 삶의 경험, 이것은 또 특수한 계시를 받는 영웅들이 아니고 평범한 인생들의 경험을 소재로 한, 불행의 극복과 하나님의 전정한 계시의 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인생의 행과 불행, 더욱이 질병, 죽음, 좌절 같은 비극적 상황이 습격해 오더라도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의지를 실행하는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 삶을 지속하는 것, 그것이 불행에 대한 룻의 응답이었습니다. 룻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게 저 하늘에서 인생을 조정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공과를 측정하여 보상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내면에서 나오미와 동행하도록 결단하게 도우며, 나오미와 보아즈의 인간애를 생성시키어 나오미의 쓴 인생을 반전시켜 그들의 미래를 살맛 나게 재건하는, 그들 속에 계시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룻과 나오미와 보아즈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유대의 인과응보론적 사고를 근거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래 전에 들은 한 이야기로 끝맺음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여정에 네개의 발자국을 발견하였습니다. 두 발자국은 자신의 것이고, 다른 두 발자국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발자국은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이때가 내가 가장 어려운 때였는데 왜 동행하지 않았느냐고, 하나님은 그 때 나는 너를 등에 업고 있었다고 답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굳게 신뢰하며, 묵묵히 인생의 바른 길을 수행해 나가는 도덕적 행위자들로 인하여 이 세상은 이만큼 밝은 것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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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1995 [1995.12.24] "빛으로 오신 임마누엘, 그리스도" 2002.01.17 김성수 신부
46 1995 [1995.12.10] "회상의 힘" 2002.01.17 최만자
45 1995 [1995.12.03] "12월의 기도" 2002.01.17 길희성
44 1995 [1995.11.26] "중,근동 여행길의 하나님" 2002.01.17 김병종
43 1995 [1995.11.19] "다윗의 지도력을 다시 생각하며" 2002.01.17 한완상
42 1995 [1995.11.12] "공(公)에 대한 경외" 2002.01.17 최만자
41 1995 [1995.11.05] "완악한 백성" 2002.01.17 이경숙 교수
40 1995 [1995.10.29] "믿음으로 사는 삶" 2002.01.17 길희성
39 1995 [1995.10.15] "멍에를 함께 메고" 2002.01.17 현요한 목사
38 1995 [1995.10.08] "위대한 교사 우리 예수님" 2002.01.17 한완상
37 1995 [1995.10.01] "기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2002.01.17 서창원 목사
36 1995 [1995.09.24] "참을 수 없는 마음" 2002.01.17 김용덕 형제
35 1995 [1995.09.17] "다시 만나는 사람들" 2002.01.17 박동현 목사
34 1995 [1995.09.03] "위험한 만남" 2002.01.17 길희성
33 1995 [1995.08.27] "솔로몬의 재판 하나님의 심판" 2002.01.17 한인섭
32 1995 [1995.08.20] "불행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아픔 - 삼풍의 교훈" 2002.01.17 한완상
31 1995 [1995.08.13] "성서의 희년과 한반도의 1995년" 2002.01.17 김창락
» 1995 [1995.08.06] "도덕적 행위자들로 인하여" 2002.01.16 최만자
29 1995 [1995.07.30] "꺾이는, 그래서 보다 아름다운 삶" 2002.01.16 박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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