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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창모 교수

"기다림 혹은 게으름"

(누가복음 14:15~24)

 

2006.12.10

최창모 교수

(건국대 히브리중동학 전공)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누가복음 14:15~24

 

 

지난 5월 영국의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56년이나 늦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가 알려진 적이 있습니다. 1950년 3월 3일자 소인이 찍힌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조지, 다음주말 몬티네에서 만나요. 오후 2시 어때요? 사랑하는 그웬(George, will meet at Monty's next weekend. Is 2pm acceptable? Love Gwen).”

그웬은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답신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요즘 같았으면 배달 지연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사고는 애당초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e-메일이나 메신저로 데이트 신청을 했을 것이고, 확인을 위해 다시 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결국에는 약속 당일에는 전화로 재확인하여 반드시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재촉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실시간으로 즉시즉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생존의 필수조건은 속도입니다. 초고속 통신수단인 인터넷과 초고속 교통수단인 고속철은 현대문명을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된지 오래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기계의 전송 속도를 높였다는 뉴스가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비트세대’라 부르는 것도 그만큼 빠른 속도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듣는 음악이나 랩은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빠릅니다. 머지않아 인간의 과학기술이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꿈도 이제는 어느 정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속도지상주의라 일컬을 만큼.

 

생각에도 속도가 있습니다. 빌게이츠는 자신의 책『생각의 속도에서 디지털 신경망과 각종 솔루션의 확충을 통한 지식 노동자들의 업무 효율을 극대화시키고자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기업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 군대에 이르는 전 조직에 걸친 확장된 디지털 신경망을 통해 정책 판단과 결정의 시간을 단축하고, 그 정확성을 높이며, 좀 더 창조적인 부분에 지식 노동자를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을 보내면서 ‘기다림 혹은 게으름에 대한 예찬’을 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빠른 현대사회에 적응을 잘 못하는 능력 탓도 있으나, 신앙적으로 볼 때 약삭빠른 자보다는 게으른 자가 얻을 수 있는 큰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2천 년 동안 기다려온 ‘배달되지 않은 편지’(초청장)를 받으려면 끈질긴 기다림 혹은 게으름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국잔치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장이며, 그것은 곧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역설적으로 천국은 게으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채셨겠지만, 오늘 읽은 본문은 현대인들에게는 참 이상한 본문입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오해를 갖게 해주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 역시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는 본문입니다만, 오늘은 제 나름대로 ‘이상한 본문’을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는 파티를 참 좋아하셨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서의 삶을 현재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이셨습니다. 맨 처음 공식적인 예수의 활동이 혼인 잔치였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겨 하셨습니다. 예수의 궁극적 관심사인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직접적으로 맛보게 하는 방법치고는 괜찮지 않습니까? (좋은 신도가 되려면 자주 파티를 열어 즐기십시오! 디오니소스적인 향연이야말로 천국의 현재화입니다.)

 

그런데 파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술과 음식은 기본이지만, 자리 배치, 즉 요즘 말로 하면 의전(儀典)이랄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파티이든 주빈이 있고 귀빈이 있으며, 그들을 돋보이게 하는 단순 초청자들(들러리)이 있게 마련인데, 파티에 초대 받았을 때에는 자기가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를 잘 알아서 자리를 잡으라는 겁니다. 오늘 읽은 본문 누가복음 14장의 7절부터 11절에는 천국 파티에서 명예를 얻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뒤따라 나오는 12절부터 14절까지는 파티를 열 때는 초대할 대상을 잘 정하라 하시면서 형제나 친척, 부자 등 가까운 이웃들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파티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천국 잔치는 ‘베푸는’ 것이지 ‘받는’ 파티가 아니라는 명시적인 언급이라 보입니다.

오늘의 본문(15절~24절)은 앞서 언급한 파티의 두 규칙 ― 초대 받았을 때 어디에 앉을 것인가?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 이 적용되는 사례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예수의 파티에 초대되어 함께 음식을 나눈 사람 중 하나가 예수께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초대된 자)는 복되겠습니다” 하니, 예수께서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천국잔치에는 소위 ‘바쁜 놈들’은 초대해도 안 온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신규청약도 해야 하고, 신도시 개발 예정지를 잘 골라 땅을 사려면 은행에 가서 돈도 빌려야 하고, 친구랑 신제품 외제 자동차를 시승하러 가야 하고, 몇몇 연애도 관리해야 하고, 장가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쫓아 바쁜 지위 높으신 분들은 ‘쉴 틈’이 없습니다. 현대적으로 쉽게 말해서 ‘회의’(會議)와 ‘사업’(事業)으로 바쁜 거죠. 종종 진짜로 중요한 사업이나 회의도 있겠지만, 골프모임도 사업이고 해외여행도 회의가 되는 세상에서는 별반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고 바쁘다고 야단들인 셈입니다. 매일 TV를 보고 여러 개의 신문 잡지를 읽어도 그렇다고 아는 것,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이 바쁘기만 한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그냥 바쁜 게죠.

제가 아는 어떤 전도왕은 전도하러 다니면서 경험한 얘길 해 주는데, 아파트 현관에서 벨을 눌러 “전도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문을 배꼼 열고 백이면 백 대부분 “지금은 좀 바쁜데요” 한데요. 그러면서 문을 쾅 닫으려는 찰나에 발이 문틈에 껴 부상을 입고 나니, 그제야 “미안해서 다음 주에 교회에 가 드릴께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택한 방법이 시내 거리와 골목을 다니며 ‘빈둥거리는’ 가난한 자들과 ‘아무 할 일 없는’ 장애인들을 모두 강제로 데려다가 파티 좌석을 채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본적으로 천국에 부자들은 못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이는 부자들은 바쁘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잘못은 바쁘다는 것 이외에는 없어요.

(사실 성경 해석은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결합시키면 멋진 해석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에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한 청년이 있는데, 종종 제게 성경을 물어 와요. 한 번은 가룟 유다가 어떻게 죽었느냐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한 곳에서는 목 매 자살했다고 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창자가 터져 죽었다고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사실은 절벽에서 자살하려고 목을 맸는데 줄이 약해서 도중에 끊어져 밑바닥에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은 거라고.

실상 우리 시대가 자랑하는 위대한 문명은 속도의 발명에 불과한 것일 뿐,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잘난척하는 문명인의 치열한 삶이란 실상은 한갓 소동(騷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제대로 인간적인 것이려면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주에 경주를 거듭한다는 것은 산에 산을 포개 쌓은 게 아니라 바람에 바람을 포개는 꼴”이라고 벨기에 태생의 수도사 자끄 레끌레르끄는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양반이면 아시다시피 일하기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지위가 높은 분일수록 아무것도 안 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부질없는 것을 피해 마음의 깊이를 되찾게 하는 한가로움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노라면, 실업자들과 노숙자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병폐인 목적 없는 맹목적인 분주함을 우리네를 대신해서 속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개는 공장을 가지고 있는데 돈을 어찌나 많이 버는지 그걸 다 어디에 써야 할지를 모릅니다. 일에 짓눌려 삽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근심으로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 갑니다. 자기에게 필요이상으로 돈을 번다고 해서 그가 활동을 줄이고, 생각할 여가를 내고, 주위를 살펴볼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는 공장의 수입으로 두 번째 공장을 세웁니다. 그러다가 어찌되는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공장은 부도가 나서 문을 닫게 되고, 실업 사태가 벌어집니다. 여기서 쫓겨난 이들이 바로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가난한 노숙자들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들을 잔치에 초대하여 먹고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강제로!

 

오늘날 한가한 사람보다 더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흐트러지고, 어느새 잃어버린 ‘나’를 찾아 이리저리 좋다는 것 찾아다니느라 다시 바쁘고…. 주변에서 이젠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소리 안 하는 사람 하나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쉬는 걸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그들은 절대로 쉬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지난 봄에 심각하게 아팠드랬습니다. 의사는 ‘당장 일을 절반으로 줄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며 사실상 중형 선고를 내리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바쁩니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려면 멈추어야 하지 않습니까? 허접한 글을 쓸 때나 허튼 소리를 할 때는 다른 일을 함께 하면서 할 수 있지만, 말 같은 말, 글 같은 글을 쓰려면 멈추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은 워낙 힘드는 지라 몸과 정신을 온통 오르는 일에 쏟게 되지만, 정상에 오르면 멈추게 되고,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런 힘도 쓰지 않은 채 맑은 공기와 홀연한 빛과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비행기를 타면 아무 것도 못 봅니다.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 속의 인간은 여행자가 아닌 단순한 통행인입니다. 하지만 한눈을 팔면서 길을 싸다니거나 숲 속을 한 나절씩 산책하면 얻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마냥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으며,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성경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밤의 고요와 별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신을,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패스트푸드(Fast Food)보다는 슬로푸드(Slow Food)가, 질주하는 패스트 라이프(Fast Life)보다는 자동차 안 타는 슬로 시티(Slow City) 운동이 전 세계에 서서히 확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1989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발표된 슬로푸드 선언문에 따르면 “산업문명 이후 기계를 생활의 모델로 삼고 사는 현대인들은 속도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의 종이 소멸되는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속도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은 슬로푸드 식탁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2000년 7월 이탈리아의 그레베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슬로 시티 운동은 도시에서 자동차 추방, 경음기 사용 금지, 자전거 권장, 보행자 구역 확대 등 시민들의 삶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도시’인 것입니다.

빈둥거림, 권태, 기다림은 자연의 시간 흐름과 함께 하는 것이며, 광속이나 경쟁, 과속(過速)이나 속도위반의 현대사회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는 그것들은 내면에 있는 무한성의 시선에 비추어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의식하고서 모든 일상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 느끼는 형이상학적인 빈둥거림, 고상한 권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제가 권하는 권태란 아무런 할 일이 없거나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들을 잠시 뒤로 밀쳐놓을 수 있을 때, 느긋한 행복감에 젖어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러운 하품을 해댈 수 있는 그런 빈둥거림, 권태, 기다림인 것입니다.

 

왁자지껄, 들썩들썩, 야단법석의 빠른 생활이라는 보편적인 어리석음에 반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질적 만족을 조용한 방법으로 얻도록 확고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미 보장된 감각적 즐거움과 느리며 오래 지속되는 기쁨을 적절하게 누리는 방식으로 우리는 광기의 효율성으로 잘못 알고 있는 다중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 기다렸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사랑했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육체의 급속한 성장으로 기다림 없이 바로 어른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숙성(熟成)의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성인들과 똑같은 방송을 보고 듣고 자랍니다. 아이들에게 ‘기다림’이란 단지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쯤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니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요즘 아이들에게 비전(Vision)이 없는 까닭이 바로 기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짙어만 가던 초록 나무 이파리도 여름 내내 님을 기다리다 애가 터져 어느새 형형색색 낙엽 되어 바람에 뒹굽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단풍은 기다림의 결과물입니다. 양현주 시인은 노래합니다. “홍시가 익을 때까지 푸른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은 감이 아니라 실은 오랜 기다림이었다.” 제대로 돌아가는 정부나 기업, 학교나 조직의 첫 조건은 지도자들의 정신이 명민하고, 영혼이 고요하고,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같이 긴장되고 정신없이 분망한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면 이 세상은 빈 수레처럼 시끄럽기 마련입니다.

생산성이나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존재 방식을 빠른 생활 형태로 변화시킴으로써 자연의 생태적 환경과 인간의 정신적 여유를 빼앗아 간 것에 대한 진취적 해답은 게으름, 빈둥거림, 기다림 등으로 대체하는 것뿐입니다. 게으름은 결코 포기나 무기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소멸시키지 않으면서 세상과 연합하려는 소망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신학적으로 말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기다림의 결과로 얻게 되는 미래는 우리에게 많은 놀라움을 안겨 줄 것입니다.

 

“천년을 기다려도 좋습니다. 기다림도 사랑입니다. 언제든 오실 것을 믿고 오늘도 묵묵히 기다리는 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기다림에 지치면 잠이 들지 몰라요. 그러면 당신 보기에 미안하잖아요. 턱 괴고 있었는데,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절대 울지는 않았습니다.” ― 류경희 시인의 “기다림도 사랑입니다” 중 일부입니다.

 

기다림을 간직하는 것은 큰사랑의 마음입니다. 지금 이렇게 마구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기다림을 영원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영혼의 기다림! 인디언들은 넓은 광야에서 말을 타고 열심히 달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말에서 내려 말없이 한참을 서서 자기가 달려온 뒤쪽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 힘들어 할까봐 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가 너무 지쳐서도 아닙니다. 너무 빨리 달려와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자신의 영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중동-아랍인의 속담에 “인간의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걷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은퇴하면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5월과 10월에만 문을 여는 카페 혹은 술집을 차리는 겁니다. 7~8월의 찌는 듯한 더위와 1~2월의 살을 에는 추위가 지나 누그러지면, 5월과 10월의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나타날 때쯤, “야호, 그 술집이 문을 열었다구!” 하며 반갑게 찾아오는, 반년을 기다려 온 단골손님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주말이면 함께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 조용히 카페 문을 닫으면서는 언제 다시 문을 열까 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음을 준비할 것입니다.)

중동지역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아랍 사람들에게서 내려오는 오랜 덕목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IBM's입니다. ‘인샬라!’(알라의 뜻), ‘부크라!’(내일), ‘마알리쉬!’(걱정 마슈), 그리고 ‘슈아이야!’(천천히). 제 맘대로 해석해서 종합하면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며, ‘내일’까지는 잘 될 테니 오늘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모든 것은 때가 이르러 ‘천천히’ 무르익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 시간에 아직도 조급하게 떨며 서 있는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이제나저제나 메시아가 오실까 기다리면서도, 언제까지나 메시아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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