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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류상태

"주님의 일은 많지 않다"

(누가복음 10:38-42)

 

2006.08.20

류상태 형제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0:38-42

 

 

[두 자매 이야기]

오늘 본문은, 두 자매가 예수님과 함께 즐기는 데이트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님과의 교제를 ‘데이트’라는 용어로 쓰는 걸 좋아합니다. ‘영적 교제’, 혹은 ‘주님께 경배’라는 용어가 좀 어렵고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 비해서, ‘데이트’ 라는 말은 훨씬 부드럽고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 두 자매는 성격이 좀 대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분위기로 유추해 볼 때, 언니인 마르다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인데 비해서, 동생인 마리아는 비교적 차분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성격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르다의 적극성은, 자기가 사는 동네를 방문하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는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 동행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마르다는 일행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임으로써 ‘주님과의 데이트’를 오붓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마르다는 아마도,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어서 빨리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자기 집을 찾아주신 고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르다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이렇게 열심히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부엌에서 애쓰고 있다면 동생인 마리아도 당연히 언니를 도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발 곁에 앉는다”는 것은 존귀한 분 앞에서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리아가 그 정도 예의를 알고 있다면 철이 없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마리아의 처신은 옳아 보이지 않습니다. 언니인 마르다의 처신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지지를 받지 않을까요.

마르다는 그런 마리아보다 예수님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불만이 섞인 투로 따지듯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저는 성경에 이런 부분이 나올 때마다 괜히 신이 납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어려워하지 않고, 당차게 따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유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따뜻한 분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존엄하고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믿는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대들고 따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따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성에 의인이 없어 멸하겠다.”고 하셨을 때, “그래선 안된다”고 충고까지 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이가 공의로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따지고는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인 50명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는 발칙하게도 하나님과 흥정을 했습니다. “거기서 열 명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 그 사건을 기록한 성서기자가 믿었던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이 계셔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인간세상을 주무르고, 눈꼽 만큼의 죄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대화가 통하시는 하나님, 보채고 매달리면 안아주고 들어주시는 따뜻한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의 격의 없는 투정도 주님에 대한 그런 따뜻한 느낌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요. 마르다의 어투를 보면, 자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당연히 옳고, 마리아는 깍쟁이 짓을 한 것이며, 이제 주님께서 곧 자기에게 사과를 하시고, 마리아를 보내주시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보기에도, 이런 상황에서는 꼼짝없이 주님께서 두 손을 드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주님은 얘기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하나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다분히 상징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우리의 일상생활 문화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마리아보다는 분명 마르다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님을 모셨으면 식사대접부터 하는 것이, 하다못해 냉수 한 컵이라도 먼저 대접하고 나서 대화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초대한 집주인이 손님을 대접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얘기만 나누는 것은 분명 결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오늘 본문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상적인 사건의 하나라기 보다는, 상직적인 의미를 가진 메세지로 여겨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일성수를 해야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교회 봉사도 해야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야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그렇게 무언가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자신을 섬기려는,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려는 기특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주님의 말씀, 이 본문에 의하면, 마르다는 많은 ‘일’ 때문에, 들떠 있기도 하고 염려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해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기쁨과 염려가 교차합니다. 이런걸 보고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하나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무언가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다. 필수사항이 아니다. 진정으로 꼭 필요한 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아니, 네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오직 이것, 즉 ‘듣는’ 것뿐이다.”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세상을 망칠 수 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세상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한국 교회는, 사명감이 너무 커서 문제입니다. 전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교회도 더 늘리고, 더 크게 지어야 하고, 주일성수도 꼭 해야 하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이 힘들어지고 초췌해질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아는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면, 오히려 그 일도 그르치고, 사람사는 세상을 힘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은혜를 좀 받았다고 느끼는 기독교인들 중에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섣불리 나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그 마음은 갸륵하지만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그 열정이 주님의 뜻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우님들 중에 혹 주님을 위해 일하지 못한다고 부담 갖는 분 계십니까? 못하는 것 때문에 부담 갖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게을러서 세상에 해를 끼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하겠다고 열심을 내서 일한 사람이 세상을 망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 조금 더 확장하면 자기 가족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갖고 나서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를 망치고 능력에 따라서는 세상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새길의 영성, 새길의 미래]

우리는 어제와 오늘에 걸쳐서 ‘새길의 영성과 미래’를 탐구해 보았습니다. 많은 좋은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애써 모은 좋은 의견들이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앞부분에서, 본문은 실제로 있었던 일상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인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교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생활, 일상생활에서는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본문 말씀이 실제 사건이었고, 마르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리아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했다면, 예수님은 매우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분명, 마르다의 역할도 필요합니다. 우리 새길교회 교우님들 중에도, 마르다적인 성향이 강한 분이 계시고, 마리아적인 성향이 강한 분도 계십니다. 새길교회가 이제는 무언가 움직여야 한다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제대로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예배와 교제에 머무는 것은 부족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긴 뭘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 예배와 교제가 있고, 가끔 신앙/신학 강좌가 있어서 주님의 뜻을 깨달아가는 기쁨이 있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작은 봉사라도 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더 이상 욕심낼 필요가 있겠느냐?” 라는 의견을 갖고 계신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교회 차원에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주장에 부담을 갖는 분들은, “그냥 각자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따르미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면 됐지 꼭 교회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느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쪽 의견만이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양쪽 의견이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는 마르다도 있어야 하고, 마리아도 있어야 하니까요. 마르다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은 마리아를 잘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도 마르다를 잘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두 성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교회의 두 축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은 마리아적인 신앙생활을 기꺼이 하시고, 마르다처럼 일하지 못한다고 부담을 갖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마르다가 하는 일을 기꺼이 이해하고, 응원해 주시고,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르다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도 마르다적인 일을 기꺼이 하시되 마리아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듣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애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할 뿐 아니라 그게 더 우선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데이트]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공통점을 찾아봅시다. 서로 다른 성향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이 둘에게는 다른 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한 지붕 아래 사는 사이좋은 자매들이고, 지금도 자매가 함께 주님과 데이트 중에 있습니다.

우리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주님과의 데이트를 즐깁시다. 일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여건이 여의치 않으면, 안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일보다 삶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 보다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았느냐?” 가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새길교회, 부족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충분히 좋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 그건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주님과 데이트를 신나게 즐기는 것, 그게 바로 필수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과 신나게 데이트를 즐기면, 깨우침이 깊어질 것이고, 주님과 하나가 될 것이며, 저절로 예수님의 빛이 전이되어 세상의 빛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요? 저절로 교회 자체가 소금이 되어 세상의 부패를 막고 맛을 내게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 뿐”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듣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데이트, 주님과의 데이트를 날마다 날마다 신나게 즐기는 새길교우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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