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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만열 교수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마태복음 5:37, 누가복음 12:54-57, 예레미야 5:30-31)

 

20141026일 종교개혁주일 예배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새길교회 여러 식구들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제게 초청을 통고해주신 정경일 박사는 새길교회가 오늘을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셔서, 저로서는 퍽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마태복음 537절에서 언급한 오직 너희 말은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입니다. NIV 번역은 단순하게 라 하고, ‘아니오아니오라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야고보서(5:12)에도 있습니다.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의 배경은 맹서와 관련된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누가복음 12: 54-57에서는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는 달리, 시대를 분간하라는 당부를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문제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문제를 시대적인 이슈와 관련시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시대의 인간사회의 인문 사회적 현상과 관련하여 시대를 분간하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 2-4절에서도 비슷하게 보입니다. “너희가 날짜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기후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움직임과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마태복음의 말씀은 다 같이 자기 시대를 직시해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자기 시대를 통찰하고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은 유대가 어떤 정치 사회적 배경 하에 있을 때에 주어졌을까요. 당시 유대 민족은 지역에 따라 에돔 족속인 헤롯왕과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이중적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때는 유대 민족이 종교적으로는 야훼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만, 정치 사회적으로는 로마 치하의 엄혹한 시대였습니다. 때를 의식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시대의 식민지적 상황에 냉철한 통찰력을 가지라는 당부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정교분리를 강조 받아온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설명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자기 시대의 상황을 외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양 자기 변명적 태도를 취해온 이들에게, 다시 자기를 점검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또, 진영논리에 서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여건 때문에 자기시대에 대한 통찰과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역사의식을 분명히 가지라고 권고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책임을 묻는 질문으로 확대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사회현실에 관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해묵은 논쟁도 더 이상 쟁점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랜 동안 이런 해묵은 논쟁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해 왔고, 행동하지 않는 지성의 나약함을 시대와 역사 앞에서 변명하거나 합리화해 왔습니까. 이 말씀은, 용기가 없어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외면해 왔던 우리들의 나약한 자세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음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누가복음의 <시대를 분간하라>는 말씀이나 마태복음의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을, 마태복음 537절의 옳은 것옳다하고, ‘아닌 것아니라고 하라는 말씀과 연관시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와 함께 예레미야 5장을 통하여, 자기 시대를 통찰한 예언자 예레미야를 같이 등장시켜 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대략 BC 650년경에 태어나, 유다가 여러 차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그 마지막 포로시기인 BC 586년경까지 예언자로 활동했던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느부갓네살왕이 이끄는 바빌론 군대가 침입해 왔을 때,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기 민족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했던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존망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51절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이는 국방의 요체가 군사력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에 있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바빌론 군대의 침략 앞에서 이 말이 먹힐 리가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530절과 31절을 통해 계속 선포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예레미야의 외침이 어찌 그 시대를 두고서만 적용되겠습니까. 그 외침을 오늘 서울 도성과 우리 사회에 확대시켜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31절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이 거론되었다고 해서 꼭 종교인들에게만 적용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는 언론인과 지성인들도 이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란, 진리와 정의 대신 물신숭배를 강조하는 종교인들도 여기에 속할 것이고, 조직적으로 여론을 왜곡하는 언론인과 지성인들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12대 경제 강국으로 발전했다고 열창하면서도 이 나라의 자살률이 세계1위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또한 거짓 예언자들일 것입니다. 이 땅의 경륜가들과 지식인들, 목사를 비롯한 종교인들이 귀중한 생명을 자살로 몰아가는 구조적 사회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생명외경에 대한 개인적 책임만 강조하고 있다면 그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구조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면서 개인 윤리와 책임만 강조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거짓 예언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민족 공동체에 용서와 화해, 희생과 평화의 존재로 부각되어야 할 목회자들이 거짓 복음으로 갈등을 부채질하고, 이 땅에 권력자들이 봉사와 희생을 앞세우는 공복으로서가 아니라 백성을 짓누르는 압제자로 등장한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겠습니까. “이 땅의 통치 권력과 경제권력, 언론권력 심지어는 대학교수들까지 주류권력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 사회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과연 5%를 위해 95%가 자신들도 모르게 희생을 당한 사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레미야가 통탄한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주류사회의 횡포가 아니겠습니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거짓 종교인들과 권력자에게 백성들이 환호하며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혹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복을 강조하기만 하면, 그런 거짓 종교인을 환호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진실을 은폐하고 공약을 파기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민중들입니다. 이게 예레미야 당시의 현실이자 오늘의 한국의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책임져야 할 주체들을 무책임하게 내버려두거나 심지어는 용서하는 기괴한 자기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국민들이 그들의 거짓 예언과 권력 횡포를 좋게 여기는 것은 그들 편에 서야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하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자니 악한 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그들의 감언이설에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선거 때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여론 조사 때마다 그런 생각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떡고물과 감언이설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 사회와 교회를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종교인들이나 지성인들은 옳고 그른 것을 밝혀야 할 시대적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시비를 가리고 곡직을 밝혀야 할 시점에 지성인들은 침묵의 행렬에 자기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왜곡 못지않은 병리현상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에 머물게 하는 보신주의(補身主義)로 나아가게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정직하게 외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성인들의 벙어리 현상은 이 땅에 귀머거리 대중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라 하지 못하고, ‘아니요아니요라고 말 못하는 현상은 급기야 우리 사회의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이렇게 변하면 공동체적 가치가 붕괴될 것은 뻔합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던 함석헌이 1950년대 이승만의 시대를 향해 외쳤던 것이 바로 지금의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이런 현상을 두고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다고 했고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 한 교육부 장관의 인사청문회를 보았습니다. 그 뒤 이 정권 하의 여러 장관들의 인사청문회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5·16이 군사쿠데타냐 아니냐를 대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관 후보자들은 5.16 쿠데타에 대해서 ’,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으로 전통이 내려온 김영삼 정권이 이미 5.16은 군사쿠데타라고 정리했고, 그에 따라 교과서에서에까지 명기했고 그 교과서로 학생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교과서 편찬의 수장인 교육부 장관이 그런 내용을 시인하는 데 주저했습니다. 윗선의 눈치가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는 분들이 진실에 입각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지난 대선에서 개표에 부정의혹이 있다는 것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습니다. 전산개표기를 사용함으로써 그걸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선거법을 어겼습니다. 개표의 주 수단이 되어야 할 수개표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선거무효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작년 14일에 유권자들이 선거소송인단을 꾸려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선거법상 재판개시 의무기일인 6개월이 1년 반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재판기일조차 잡지 않고 있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개표 상황표에 의해 수개표를 하지 않은 지역 선관위들을 골라 고발해도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언론은 침묵의 대 연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하고, ‘옳은 것옳다하고, ‘아닌 것아니라로 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예, 아니오를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야 합니까.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와 ’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하는 시험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나라가 국민을 구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또 이 나라가 총체적 비리사회라는 것도 만천하에 입증시켜 주었고, 나라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에 일어나는 비극적인 현상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뻔뻔스럽게 진실과 책임을 묻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국민을 분노케 합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을 속속 폭로하고 있습니다. 목사들, 종교인들, 언론종사자들, 지식인들이 거짓 예언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의 울부짖음처럼 우리도 지금 최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대통령에 대한 모욕을 빙자하여 SNS에 가하고 있는 검열 현상은 민중의 입을 틀어막고자 하는 이 정권의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7시간은 베일에 숨겨둔 채 민중들의 호기심과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그 많은 예산 탕진해 가면서 검경을 동원하는 것이 온당한 것입니까. 북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삐라를 살포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고, 남쪽의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언론자유에서 제외하는 것이 과연 그들이 목메어 부르짖는 <자유민주주의>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지난 번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와 최근에 세월호 문제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의 상영 문제에서 보여준 갈등은 진실문제에 접근하거나 소통을 방해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실에 접근하려는 의식이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강요받는 침묵은 소통과 진실 접근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찌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느냐, 왜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용기 있게 소리 내지 못하는 세태가 되고 보니, 옳다는 확신은 점차 사라지고 의도적인 회의론자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태가 그렇습니다. 또 옳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힘을 받지 못하고 동력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옳다는 사람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고 옳다는 신념하에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반대로 그른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아니요라는 판단에 의해 거부청산되어야 할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종식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엊그제 언론에 발표된 전작권 문제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교회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이 문제는 국방주권을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들이 와서 우리의 주권은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진 상납한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을사늑약 때에 총칼 앞에서 외교권이 강탈당할 때에 협조했다 하여 을사오적이니 정미칠적이니 하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국방주권을 국민의 동의 없이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또 국방비를 북한의 33(2012)를 쓰고서도 전시작전권을 갖지 못한다면 언제쯤이면 전작권 확보를 통한 국방주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런 착잡한 생각을 갖게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조치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두에 둔 조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판단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면서 구약성경 열왕기상 22장에 보이는 미가야 선지자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합왕 앞에선 400명의 선지자들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한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미가야는 그들과 대척점에 섰습니다. 그의 예언자적 지성은, 400명의 가짜 선지자들과 같이 아합왕의 승리를 열창한 것이 아니라 왕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리방황을 내다봤습니다. 미가야는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거짓된 영을 퍼뜨려 소위 선지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예언은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 보낸 거짓 영들에 의해서 조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과 정책이 선지자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지지받을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4001의 미가야 선지는 이 시대의 거대한 사이비언론 권력 앞에 선 정론의 고군분투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언자적 지성이 한국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세습 등 교회의 사유화 현상은 입에 올리기도 싫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회자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아니요라는 분명한 입장을 개진하지 않고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돈과 물질을 우상화하는 행태의 귀결점이 교회의 사유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유화 현상 못지않게 한국 교회는 윤리부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와 쾌락을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거하라고 명령한 바알과 아세라를 교회 안에 끌어들여 즐기는 현상입니다. 한국 교회는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논문 표절 사건이 터졌습니다. 어찌 표절사건이 그것뿐이겠습니까. 표절사건 못지않게 우려되는 것은 이 표절 사건을 감싸고 변호하는 신학교수들의 태도와 이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한국교회입니다. 신학교수들이 이를 감싸는 것은 영성의 마비를 의미합니다.

 

한국교회가 큰 죄를 범해도 회개를 외치지 않는 배경에는 집단이기주의와 진영논리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지역패권주의에서 한국 교회는 떳떳합니까. 내 편이면 눈 감아 버리는 한국사회의 집단패권주의가 교회를 함몰시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빛을 따라 집단이기주의 덫을 거두어내는 데에 앞장 서야 합니다. 우리까지 그런 악마적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참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단이기주의는 패거리 진영논리를 만들어냅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의하면, <강 이편과 강 저편>이라는 <진영 논리>가 나옵니다. 강 이편에 있기 때문에 강 저편을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 이편과 저편은 바로 혈연이나 지연, 학연, 또 이해관계에 의해 편가름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이해관계라는 진영입니다. 진영 논리에 서게 되면 자기 앞에 옳은 것이 보여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고,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다면 우리가 진영논리에 서 있지 않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강한 신념은, 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분간하게 만들고,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에 의해서 행동하게 합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 운동에 몸 바친 백범 김구는 해방 후 그의 통일평화운동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일지라도 그 길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이오, 우리가 망명 생활을 30여 년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 인줄 알면서도 민족 지상 명령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시대를 분간하고 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기 신념을 행동화하면서 거기에 생명을 걸어본 적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신사참배반대투쟁 때와 1960-70년대의 인권 민주화 운동 때입니다. 특히 군사정권 하에서는 소수의 크리스천만이 그들의 반인권 반민주에 침묵하지 않고 아니요를 외치며 저항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인권과 민주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교회의 그 같은 전통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니요의 열매로 주어진 인권과 민주화를 누리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아니요를 외치지 않습니다. (null) 오히려 보수화된 체질로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시장화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아니요의 전통을 갉아먹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전마저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28절에는,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시대의 상황을 보지도 못하고 이 시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며, 또 과거 암울한 시대와 폭력적이고 사악한 정권의 오만 횡포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준엄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쩌면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로 갈멜산에 나아간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오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치하에서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어느 편이 이익이 되는가, 어느 것이 현실적인가 주판알을 굴리는 백성을 향해, ‘여호와냐’ ‘바알이냐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눈치에 익숙한 백성들은 말 한마디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여호와 하나님을 물질적 풍요를 담보해주는 바알신과 세속적 향락을 약속해주는 아세라신과 동등하게 생각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이 침묵을 깨고 나갈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날마다 살아나고 나를 쳐서 십자가 앞에 복종하는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와 말씀, 시대를 보는 예지와 판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 거대하고 사악한 세속적 권력을 분간하지도, 이기지도 못합니다. 열두 정탐꾼 중에서도 유독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나머지 열사람의 정세 판단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용기와 비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베틀채 같은 무기를 가진 가나안 사람들 앞에 자기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비전을 내다봤습니다. 비전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누가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용기와 확신이 오늘 이 세대를 분별해야 하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아니오는 그 나름대로 역사를 발전, 변화시킨 두 강력한 동력입니다. ‘옳은 것에 대한 확신 는 강력한 힘을 축적하여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번 교종(교황)의 방한 때에 그도 말했습니다. 옳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릇된 것에 대한 결연한 아니오또한 역사에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습니다. 세계사에 나타나는 각종 형태의 혁명은 바로 이 아니오를 동력화시킨 결과입니다. 프랑스혁명을 포함한 서양의 혁명이나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을 비롯한 3.1혁명, 4월혁명, 6월혁명은 이 아니오의 산물입니다. 불의한 현상에 대한 변화와 개혁은 아니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적시에 주어지는 아니오는 역사를 변화, 발전시키는 두 강력한 동력입니다.

 

며칠 있으면 종교개혁 497주년을 맞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부르짖은 ‘Nein(아니요)’, 이 한마디가 교회사는 물론 세계사를 변혁하는 위대한 시작을 알렸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향해서 아니요를 분명히 함으로 그런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날마다 우리의 영성을 새롭게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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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만자 2014.11.08 00:30 (*.54.86.195)
    이만열 교수님, 이 시대의 예언자 목소리로 말씀 들었읍니다.
    누군가는 언행일치의 모습이라 말씀의 진정성이 깊고 크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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