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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차옥숭

희망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

(출애굽기 3:5-6)

 

2014105일 주일예배

차옥숭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나 신조 안에 갇혀 다른 사람들의 사상이나 가치를 살펴볼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종교전통에서 자기 전통과 다르거나, 낯선 것은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항상 그 종교의 자기 방어적인 해석 활동에 의해서 극복되어 왔습니다. ‘다름혹은 낯섦에 대한 전형적인 대응 전략은, 그것을 자기 종교의 일정한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그것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종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자신이 속한 개별종교전통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배타적 독선과 결부되면,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크게 저해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와 종교 사이의 갈등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종교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종교입니다. 이 세 종교는 같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두고 오늘날까지도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는 세 종교 사이의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2002, 2010, 두 차례 이스라엘을 방문했습니다. 2002년에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과제 종교다원주의 도전과 3대 유일신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적응과 전개 과정의 연구 목적으로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을 방문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대학 교수로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 둘, 출판국장으로 있는 유대인 랍비, 가톨릭 신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아카이빙(이주, 전쟁)을 위한 방문으로 여성들 여섯 명, 유대인 둘, 팔레스타인 사람 둘, 유대인과 혼인한 한국여성, 팔레스타인 사람과 혼인한 한국여성을 만났습니다. 방문 당시 저의 관심은 주로 세 종교 사이의 핵심적인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며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세 종교가 예루살렘을 두고 어떤 갈등을 겪었는가, 세 종교 사이에 상호 공생, 공존, 소통과 조화의 역사는 없었는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오늘날 종교와 종교 사이의 경계를 넘어, 죽음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싶었습니다.

엘리아데는 모든 성스러운 공간에는 성현(聖顯, hierophany), 하느님이 여기에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있는 곳은 신성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출애굽기. 3:5) 하시며 시나이(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것 같은, 즉 성스러운 것의 돌연한 출현이 결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실로, 예루살렘 곳곳의 성소가 그러합니다. ‘평화를 의미하는 예루살렘에는 히브리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기 이전에 이미 가나안인, 여부스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추분이 되면 태양이 그들 바로 앞에 떠서 바로 등 뒤로 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태양빛이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 샤하르(Shahar: 일출의 신)와 샬림(Shalim:일몰의 신)의 거주지였습니다. 예루-샬렘(Jeru-Shalem)이란 샬렘 신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기원전 13세기 가나안에 등장한 히브리인들은 샬렘이란 단어와 평화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롬(Shalom)을 혼동하여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갖게 되지요. 신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로 모리야라 불리는 그 신성한 바위 위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사악(무슬림들은 이스마엘이라고 함)을 묶어 제물로 바치려 했고 훗날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던 이곳을 다윗이 은 50세켈을 주고 사서 하느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고 집터로 정했습니다. 또한 이 바위는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 그 초석이 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기원전 961년에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계약의 궤를 다윗성에서 새로운 성전으로 옮겨 봉헌식을 올렸습니다.(2역대 3-5, 7장 참조; 1열왕 6-8장 참조) 계약궤가 있는 모리야 산은 시온, 즉 신의 동산, 거룩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유대교 회당의 주요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지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슬람 정복자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희생하려 했던 그 바위를 매우 거룩하게 여겨 그 위에 멋진 팔각형의 사원을 짓고, ‘바위 돔 사원’(Dome of the Rock)이라 불렀습니다. 황금지붕의 바위 돔 사원은 바로 가나안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던 바위를 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BC. 1,000년경 다윗 왕이 여부스족이 살고 있던 곳을 점령하고 수도로 세운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약 30세기 동안 포위되고, 방어되고,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축되기를 40차례나 거듭했습니다. 그것도 모두 신의 이름으로!


이처럼 예루살렘에서 참담한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지금도 유대인, 그리스도교인, 무슬림들의 순례행렬이 끊이지 않는 성지입니다. 예루살렘이 세 종교에 주는 종교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유대인들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1800년이 넘는 해외 이산(Diaspora)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유대민족과 하나로 묶여지지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그들이 믿는 종교의 근원에 가보고자 하는 열망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성경의 기록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서있던 곳, 가르치던 곳, 기도하던 곳, 그리고 예수가 고통 받던 곳에서 거룩한 근원과 교감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합니다.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은 위대한 예언자들의 도시이며 고귀한 성소입니다. 무슬림들은 예루살렘 정복 이전부터 성전 지역을 경배해 왔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랍어 명칭이 성전의 집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은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에 이르는 수많은 위대한 예언자들의 도시였고, 지금도 물론 그렇습니다. 이슬람 전통에서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와 더불어 성스러운 곳입니다. 예루살렘을 찾는 무슬림들의 순례는 황금사원이나, 알 악사 사원 같은 그들의 성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덤성당을 방문했을 때, 저는는 인도에서 온 이슬람 신자의 가족들이 그곳에 무덤이 있다는 지하에 내려가며 본인은 물론 어린 아들의 신발과 양말을 벗기는 것을 보고 숙연해졌습니다.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들어갈 때 신발과 양말을 벗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때,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신을 벗어라!”했던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예루살렘을 통치란 기간은 550, 그리스도교가 지배한 기간은 400, 이슬람 제국이 1200년을 통치했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참상은 언제부터일까요?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불란서에서 있었던 간첩조작사건인 드레퓌스(Alfred Dreyfus)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시온주의 운동에 의해서 입니다. 오스트리아 신문의 파리 통신원이었던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간첩조작사건인 드레퓌스(Alfred Dreyfus)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 박해 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유일한 해법은 유럽을 떠나 시온, 즉 이스라엘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유대 민족운동에 앞장섭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화 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럽 전역에 퍼져갔던 반유대주의, 그 결과 시온주의 탄생과 팔레스타인 식민화의 진행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로 영국의 이중외교정책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적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원한 관계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과 아랍인을 연합군 측에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이 취했던 이중외교정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일찍이 1880년대부터 유대인 이민이 야기할 위험과 불안정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농촌 공동체에 시온주의가 미치는 영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감지됩니다. 농촌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온주의자들이 토지 매입에 박차를 가한 뒤에야 자신들의 삶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꿔 놓는 사건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하심가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심가와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세워 주겠다고 한 영국 정부의 약속을 알게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점령은 시온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영국의 정책으로 귀결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미래는 현지 사람들이 논의에서 배제된 채 결정되었습니다. 식민정책은 팔레스타인 농촌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정책은 외부의 행위자들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착취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인구의 60퍼센트가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농촌이 폐허로 변한 것은 농업의 상업화와 시온주의 토지 매입 운동, 팔레스타인 대지주들의 탐욕이 파국적으로 뒤섞인 결과였습니다. 나치 참사를 계기로 이슈브의 지도적 외교관들은 미래의 유대 국가만이 이런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이자 홀로코스트의 재발을 막는 완충제가 될 수 있다고 세계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1947년 유엔은 총회 결의 181호로 팔레스타인 전 지역(26,323km)56.4%는 유대 국가에, 42.88%는 아랍 국가에, 예루살렘 국제 지구로는 0.65%를 할당하였습니다. 이 결의는 1948101일까지 유대국가와 아랍국가 건설 완료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들은 전 지역 중 87.5%를 소유하였던 반면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5.9%는 영국 위임 통치청이 자국의 토지로 분류한 국유지였습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엔 분할 안을 거부한 반면,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1948년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결과는 팔레스타인에게 참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78%를 장악하였으며, 나머지 22%중 가자는 이집트, 웨스트 뱅크는 요르단의 통치하에 196764일까지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1948년을 독립의 순간으로 기념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살든, 1948년을 나크바, 대재앙의 순간으로 애도합니다. 1948514,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1시에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신생국가를 사실상 승인하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이틀 뒤 소련은 경쟁하는 초강대국인 미국보다 한술 더 떠 이스라엘을 법적으로까지 승인합니다. 그 뒤 여러 나라가 속속 이스라엘을 승인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행위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하거나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19485월에서 19491월 사이에 해안 도시인 텔아비브와 하이파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370개 팔레스타인 마을이 이스라엘에 의해 지도상에서 사라집니다. 하가나의 여단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로니 여단이 이 지역을 유대화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19484월 말부터 7월 말까지 거의 모든 마을에서 무자비한 광경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무장한 이스라엘 병사들은 세 방향에서 마을을 에워싸고 마을 사람들을 나머지 한쪽으로 몰아갔습니다. 많은 경우에 떠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트럭에 강제로 태워져 요르단 강 서안으로 실려 갔습니다. 몇몇 마을에는 무력으로 저항하는 아랍 지원병들이 존재했고, 이런 마을들은 정복당하는 즉시 폭파되고 파괴되었습니다. 19485월 이후에는 농촌 지역에 사는 대다수 주민들이 이 정책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유엔에 의해 유대 국가로 지정된 영토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 85만 명 가운데 16만 명만이 자기 집이나 땅에, 또는 그 근처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남은 이들은 이스라엘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거나 추방의 위협 아래 도망쳤고, 수천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때, 75만 명이라는 난민이 생겼고, 중요한 팔레스타인 조직인 팔레스타인해방운동인 파타가 생겨났습니다.

1950314일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인들의 토지를 몰수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부재자 재산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이 법에 따라서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안이 의결된 날인 19471129일 현재 아랍국가의 시민이었거나 아랍국가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인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거주지를 떠나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모두 부재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때 크네세트는 부재자의 재산은 그 재산의 점유자에게 귀속된다고 승인하였으며 당시 재산 점유자들은 전 재산을 이스라엘 정부에게 팔았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정부는 손쉽게 100만 아랍인 재산 강탈을 제도화하였습니다.

 

196765일 노동당 정부가 주도한 전쟁은 이집트를 선제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압도적인 승리로 전쟁을 끝냈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기존 영역의 3.5배인 약 7만 평방km 정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9676월 전쟁이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인은 아랍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충격에 휩싸였고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19677월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이갈 알론은 6월 전쟁에서 획득한 점령지역을 대상으로 정착촌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갈 알론은 유대인을 국경지역에 골고루 정착시켜 살게 하는 것만이 안보를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이 정착하지 않은 국경은 이스라엘의 국경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정착을 통해서만이 현실적으로 영토를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알론의 계획을 따랐던 모세 다얀도 이스라엘의 안보를 수호하는 데는 정착촌이 군대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며, 정착촌이 없다면 이스라엘 방위군이 점령지 내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1967년 군 포고령 58호는 1967년 전쟁 전후에 웨스트 뱅크를 떠나 있는 모든 사람을 부재지주로 간주하였고, 부재지주의 모든 재산은 포기된 재산에 대한 이스라엘 관리인에게 양도된다고 규정했습니다.

“6일 전쟁에서 요르단으로 피난한 나블루스와 투바스 주민인 이 사람들은 유대아나 사마리아로 되돌아 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 목록이 국경 검문소에서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1973년에 총 431,333평방km에 이르는 토지가 이 범주에 포함되어 정착민들과 정착촌을 위해서 양도되었습니다.

 

1967년의 경계선을 넘어 이스라엘로 건너가는 난민들이 이스라엘 본토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저임금에 거의 노예 신세에 가까운 막노동자이자 고향 땅의 이방인으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듯, 이런 노동자들의 틀에 박힌 일상은 이 귀환행위의 민족적 의미만큼이나 모욕적이었습니다.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아침을 시작할 때마다 뻔질나게 학대와 괴롭힘을 당해야 했습니다. 검문소를 통과해 노예시장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가면 이스라엘 고용주들이 운좋은 이들을 그 날 하루 일할 노동자로 선택하곤 했습니다. 주요 도시의 변두리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노예시장에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인간 우리에 빽빽하게 들어찼고, 지프차나 트럭에 황급히 올라타고는 공장이나 식당, 농장 등 자신들을 미숙련 노동자로 고용할 어느 곳으로든 실려 갔습니다. 하루 일을 끝낼 무렵이면, 이스라엘의 기준으로 보자면 보잘 것 없지만 요르단이나 이집트에 비하면 그래도 후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초반 무렵 팔레스타인인 15만 명이 이런 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검문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는 굴욕과 억압의 상징입니다. 그곳에는 무장한 이스라엘 병사와 탱크들이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태세로 있고 간혹 위협사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20여 개의 주요 도로 곳곳에 촘촘히 서있는 검문소에서는 수 십 명에서 수 백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통행 허가를 기다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마저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검문소와 더불어 도로통제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고 이스라엘 지배를 관철하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역을 관통하는 도로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깊숙이 들어와 정착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건설되었는데, 관통도로를 포함한 모든 도로들의 개방과 폐쇄는 전적으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필요에 따라서 작동합니다. 따라서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도로 봉쇄, 포위, 특히 팔레스타인 도시들을 연결하는 모든 도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통제는, 팔레스타인 자치 도시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는 난민 귀환 문제, 동 예루살렘 귀속문제, 경계선 확정 문제, 수자원 문제와 더불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에 있어 최대 논쟁점들 중의 하나입니다.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근 자료에 의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나누는 분리장벽의 길이는 약 700키로(우리나라 38선 길이는 250키로) 장벽의 10%8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2013,9.17 자료 수정). 20139월 웨스트뱅크 안에는 99개의 고정된 검문소가 있었고 174개의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었습니다. 20138월에는 288개의 임시 검문소가 조사 되었습니다.


 

종교와 종교 사이 넘어 하나의 희망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여성들은 평화를 위한 연대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 서 있는 자리가 다른데서 오는 견해와 입장 차이로 균열의 위기가 있지만, 평화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의견을 좁혀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의 희망을 봅니다.

1987년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 이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을 연결하는 데 가장 많이 힘을 쓰는 단체는 바로 밧샬롬(평화의 딸)입니다. 밧샬롬의 실제사업 기획들은 유대인 정착 프로그램과 분리장벽의 건설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장차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공유된다는 것, 곧 이스라엘 수도와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수도가 나란히 세워질 것이라는 청사진을 지속적으로 부각시킵니다. 분리장벽 반대운동을 해온 몰리는 경계선을 넘나드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12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일해 왔지만, 이제 처음으로 분리장벽을 넘는 일이 두려워졌어요. 그런데도 나는 이 일을 계속해요. 이 일은 장벽으로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시도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저항 행동이에요. 여성으로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봉쇄된 벽 뒤에 갇혔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아요.”

그러나 밧샬롬이 결성된 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몇 차례 활동이 중단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화를 재개했습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의 우정은 근본적 불평등에 의해 계속해서 침해받습니다. 심지어 밧샬롬과 예루살렘 링크라는 환경 속에서조차 유대인 여성들은 때때로 감정이 복잡해지고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서로가 갈라설 경우 이스라엘인이나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잃을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여성들은 경계선 양쪽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경계선의 어느 쪽에 살든,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 대재앙의 상처를 공유합니다.

여성은 이스라엘과 점령지에서, 유대교나 기독교, 무슬림 문화 모두에서 불이익을 받는 주변적 존재들 입니다. 그들은 여성으로서 성 특정적인 방식으로 무력 분쟁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경험하고,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팔레스타인인 라나는 일부 유대 여성운동가들의 인식을 규정해 온 특정한 페미니즘적 사고를 경계합니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을 규탄하지만, 점령의 문제에 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라나는 점령 그 자체도 강간이기 때문에 강간을 규탄하고자 한다면 점령도 규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디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검문소를 보면 나는 이른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남자나 여나나 똑같이 취급하죠. 차라리 나는 민족이라는 시각에서 그 장면을 보게 되지요. 우리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고통을 겪어요. 검문소에 있는 이스라엘 여성 군인들을 어떻게 내 자매들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이처럼 때로 팔레스타인 여성들에겐 이스라엘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피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여성들보다는 팔레스타인 남성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자 그들은 잊혀지고’, 사라져 버린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돌아보는 버스 기행을 조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난생 처음 보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팔레스타인 마을의 황폐함이라는 토대 위에서 이스라엘 키부츠가 번영하고 있다는, 곧 자신들의 번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착취하는 데 기반을 둔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최근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근교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지역 젊은이들에게 인터뷰 방법을 교육시키는 일입니다. 훈련을 통해 젊은이들은 친인척 여성 노인들이 기억하는 ‘1948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두 집단의 아이들이 모여 그러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한 연극도 함께 준비합니다.

이스라엘 페미니스트 반군사주의 단체인 뉴프로파일은 이스라엘의 군사주의화에 대한 글에서, 군사주의는 타자화를 중심축으로 진행돼 온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두 가지 이미지의 전략에 집중했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을 위협적인 적의 모습으로 만들어 유지함으로써 그들이 유일한 세력으로 보여지게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수동적인 여성과 아이들의 이미지를 만들어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의 국가 폭력을 정당화시킨다는 전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적군여성과 아이들은 군사주의가 만들어 낸 타자들로서, 자기 전쟁을 정당화하고 남성 엘리트들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이용된다고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제가 인터뷰한 여성들의 공통적인 바람은, 전쟁 없는 세상입니다. 전쟁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희망을 물었을 때,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땅에 묻고 싶지 않다... 모든 중동지역의 아이들을 전쟁 없는, 적대감과 증오 없는 세상에서 키우고 싶다.”고 간절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유딧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딧(Yudith Rosenthal)은 유대인이자 이스라엘 외무부 소속으로 학교, 사회집단의(어린이, 청소년, 성인들을 상대로) 협동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센터에 센터 장(The Aharon Ofri International Training Center Director)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유딧은 아프리카 문화와 인류학을 전공했고, 유딧의 부모님은 시온주의자로서 언제나 이스라엘에 오기를 희망했으며, 12살에 볼리비아로부터 이스라엘에 정착했습니다. 유딧은 이스라엘에 정착한 후 적응과정을 떠올리면,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데에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린 나이에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유딧은 남성성보다는 여성성, 평범한 어머니들이 갖는 평화유지적인 성향이 갈등을 극복하는데 구심점이 되어야하며, 많은 여성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눈높이를 낮추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 편에서 보면 함께 일하고 공존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아이들을 먹이는 단순한 보통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적도 없고 갈등도 없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찌감치 이 모든 것이 여성의 손에 달려 있었다면 정말로 평화는 진작 와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사정이 그렇지 못해 저는 무척 슬픕니다. 물론, 누가 무엇을 가졌는지 또는 누가 더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가 어마어마한 자산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 생명과 사랑을 낭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슬픕니다. 또 가끔씩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미한 변화는 있습니다.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은 평화의 동아리, 기여의 고리들을 만들어가며 다른 방식의 삶, 다른 삶을 보는 관점을 찾고 참여하며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은 너무도 많습니다. 다시 한 번, 불행하게도 일을 이끌어가는 세력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관심에만 중점을 두고 인간에 대해서는 관심을 소홀히 한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저는 현재 진행 상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인들이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교인, 유대교인과 무슬림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요르단 같은 나라와는 국가 간에도 많은 조직들이 있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 활동 등을 하는데, 그 예로 반전 여성 조직, 비폭력 여성조직 등 종교와 국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중동 지역에서 많은 여성 활동 동아리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한편 불행스럽게도 여자와 어린 아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근본주의자들도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평화와 조화를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훨씬 세력이 크다는 점입니다. 제발 우리들의 아들들을 묻는 것을 그만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게 저의 가장 큰 희망이고요. 우리가 아이들을, 이스라엘 어린이뿐만 아니라 모든 중동 지역의 아이들을 적대감과 증오 없이, 전쟁 없이 평화롭게 기를 수 있기를, 바로 이것이 저의 가장 진정한 희망입니다. 말로만 하는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참된 평화를 말입니다. 가까운 시일에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처럼 전쟁과 증오 없는 세상,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세상을 희망하면서 민족과 종교를 넘어 활동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종교가 보다 나은 공동의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각 종교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만남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삶의 진솔한 요구와 외침을 들을 줄 아는 자세, 즉 주위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삶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자 몰트만은 그리스도에 관해 전승된 것이 2000년 전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지금 나의 삶에 현재화될 수 있을 때 살아 있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전승된 것이 현재의 폭력과 부당한 고난에 대해 모순과 저항을 일으키는 것도 현재화에 속한다. 역사적 신앙에 대한 신학의 해석학적 과제는 구원의 신앙에 있어서는 언제나 치유적인 과제도 포함합니다. 신학의 현재화는 단지 현 시대 정신에 적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고통에 대한 참여와 그 고통의 근원에 대한 항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회상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과 해방의 잠재력은 현재의 수난사에 참여하고 현대세계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들 편에 설 때 비로소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세 종교에 다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전쟁으로 어린 아이들이,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모든 중동 지역의 아이들을 적대감과 전쟁과 증오 없이 평화롭게 기를 수 있기를 진정으로 희망하는 마음이 어찌 어머니들만의 마음일까요?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헤쳐 나가기 위해 소수이지만 희망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 있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희망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세월호 참사로 어린 자식들을, 가족을 잃고 지금도 통곡을 하고 있는 세월호 가족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폭탄 속에서 어린 생명들이 죽어가는, 분리 장벽 안에서, 검문소를 넘나들며 불안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굶주림에 방치되어 있는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들의 고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전쟁과 증오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평화의 씨앗을 심는 새길 동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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