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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구원은 어디에서 오나?”

(누가복음 10:25-37)

 

2014928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

(성공회대 조직신학 교수, 새길교회 신학위원)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전개된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에는 사마리아인 외에 제사장과 레위인 두 사람이 더 나옵니다. 이 중에서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이 된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의 원래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 첫 부분에서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물은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제가 정한 제목과 관련시켜서 바꿔본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의 제목은 구원은 어디에서 오나? 입니다. 저의 제목도 질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이 오늘 제가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나누고자하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것에 이르러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를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하루를 함께 머무르면서 그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온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3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가장 전통적인 것인 알레고리한 해석방법입니다. 알레고리라는 말은 우화, 비유라는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우화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 즉 구원자가 되고, 강도들은 죄악을 가리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죄악에 두드려 맞아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죄 아래서 영혼이 죄악으로 두들겨져 죽어가는 상태 즉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여리고는 불신앙, 교만의 장소가 됩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를 가리킵니다. 여관은 교회를 말합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은 예수가 부활하여 돌아와서 완전히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두 데나리온은 은혜와 진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는 제일 중요한 두 개, 즉 은혜와 진리를 교회에 맡겨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데나리온을 구약성서, 신약성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성경과 성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갖다 부치면 다 될 수 있는 게 알레고리방법입니다. 매우 그럴싸하고 편리해 보이지만, 자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해석의 이야기는 제가 대학생 때, 아주 흥미롭게 들었던 해석입니다. 제가 1970년대 대학 시절에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독일에서 온 선교사 한 분이 기독학생운동을 지도하기 위해서 한국에 와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이 브라이덴슈타인이었는데, 그가 학생과 사회정의라는 책을 써서 시중에 팔리고 한국기독학생총연맹 (KSCF) 사무실에서도 배포했습니다. 제가 그 당시 새문안교회를 다녔고 대학생회로 모였는데, 그때 우리 대학생들은 이 책을 탐독했습니다. 당시에는 널리 읽혀진 책인데 지금은 이 책을 다시 구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 브라이덴슈타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체제를 뜯어고치는 사회정의적인 행동이 아니라 문제의 체제는 그대로 놔두고 대증요법식의 자선사업의 행동과 같은 것이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세우는 행동이 되려면 이 사마리아인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더 이상 이러한 강도 행위가 나올 수 없도록 국가로 하여금 이 여리고로 가는 길에 방범초소도 세우고, 가로등을 세우고, 경찰들이 자주 순찰하게 하였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선사업이 아니라 제도적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선사업은 한 번의 좋은 일은 되지만, 제도를 변화시켜 사회정의를 세우면 지속적으로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브라이덴슈타인의 역저 학생과 사회정의에서의 주장입니다.

 

이제 세 번째의 해석 이야기를 말씀드리겠는데, 이것은 제가 1977년 가을부터 다녔던 기장 선교교육원에서의 저의 선생님이셨던 서남동, 안병무 두 분의 민중신학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아주 독특한 해석이었는데, 이 분은 두 데나리온이나, 여리고로 가는 도로, 여관 등에 대한 관심은 두지 않은 채, 심지어 선한 사마리아인 자체에 대해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치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에 스포트라이트의 초점을 갖다가 댔습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을 비롯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첫째 이야기에는 분명히 선한 사마리아인이 예수요, 구원자입니다. 두 번째의 이야기는 비록 첫 번째의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이야기에서는 강도 만난 자가 주인공입니다.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 말할 힘조차 없는, 자기표현을 할 수 없는 이렇게 무기력한, 오늘날 눌리고 눌린 서브얼턴(subaltern) 민중과 같은 존재가 바로 주인공이며, 메시아, 구원자, 그리스도의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막극으로 열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인물은 바로 강도 만난 자입니다. 그는 헤진 옷을 반쯤 걸치고 한 쪽 귀퉁이에 누워 있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얻어맞아서 몰골이 말이 아니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부어 있어 얼굴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무력하게 거의 죽게 되어, 쓰러져서 말도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아무 일도 해 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자 중의 약자, 아니 세상의 주먹에 의해서, 아니 온갖 폭력에 의해서 다 죽어간 이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에게 정의가 가지 않으면 이 역사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 사람에게 정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는 그런 상태로 자기 자신을 던져 넣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얻어맞고 터지고 죽어갔고, 실제로 죽었던 것입니다. 이 분에게 정의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된다는 말이 영어로 justify, justific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당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강도만난 자에 대하여 정의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당화라고 하는 말인 justificationjustice에서 나온 말입니다마는, 루터의 명제 justifcation by faith라는 말이 있습니다.

루터는 신앙으로 우리가 정당화된다고 했지만, 오늘 우리의 텍스트에서는 먼저 강도 만난 자에게 마음으로 동정하고, 즉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불쌍하고 슬픈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고, 그리고 그를 위한 정의를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음, 인의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의 인의, justificationby faith 가 아니라, justification by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자에 의한 정당화와 인의입니다. 그가 정당화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가장 약한 사람이 정당화시켜 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당화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약자들이 정당화시켜 줄 때에 그 사회가 구원을 받습니다. 사회는 하나의 합의로 운영되어야 하는데, 그 합의의 최종적인 결정권자는 힘 있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입니다. 사회의 원칙은 약자가 합의해 주어야 정의로운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약자들이 인정하고 의롭다고 해 줄 때 그 사회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처럼 강도만난 자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은 강도 만난 자를 위해 정의를 행할 때 우리가 정의로워진다(justified)는 것입니다. 정의에 의해서 우리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의는 안타까움, 슬픔, 측은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소외되고 가장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해 정의를 행할 때, 우리 사회는 의롭다함을 인정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사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아니 전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 중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의 삶의 상황이 계속해서 글을 쓰고 발표하고 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강도만난 자들의 자리에 갈 형편이 되지를 못합니다. 레위인들, 지식인들이었지요. 그리고 제사장은 공직 혹은 정규직에 있는 살만한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돈이 되는 것이 아니면, 직위를 차지하게 하는 일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바삐 살기 때문에 돈이 나오는 일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를 않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어떤가요? 오늘날로 보면 희귀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뛰어듭니다. 오히려 돈이 드는 일에 자기를 던졌습니다. 왜요? 돈이 아니라 사회 정의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자에게 가까이 감으로써, 그리고 그를 위해 정의를 행했기 때문에 그 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첫 번째나 두 번째의 해석방법을 택해 왔습니다. 저에게 주인공이며 구원자이며, 예수의 역할을 하는 이는 당연히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들의 해석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렇게 당하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고, 거의 죽어간 사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겠는가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생각이 얼마나 우리 중심이었는지, 얼마나 정상적이고 힘 있는 사람들 중심의 해석이었는지 이제 와서 다시 깨닫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레위인이나 제사장보다는 덜 특권적인 지위를 가졌고, 어느 정도는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돈도 있었고, 건강했고, 자기 일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고 돌봐 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힘 있는 남자였습니다. 정상인인 그가 어떻게 비정상인인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구원 영생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강도만난 사람은 그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선생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강도만난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강도만난 사람은 당하기만 했지 뭐 하나 한 일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강도만난 자는 우리의 구원의 대상이며, 그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역전이 오히려 진실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구원의 원인은 강도만난 자가 제공했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세리 삭개오가 회개하고 그동안 강탈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을 뿐만 아니라,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사마리아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19:9). 구원받는 사람은 의로운 삭개오이며, 좋은 일을 한 사마리아인 입니다. 그러나 아무 좋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 강도만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의 경륜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입니까?

몇 가지 말씀을 드리면, 첫째로, 저는 강도만난 사람을 신격화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그 형편상 힘없이 무능력한 상태에 빠져 있을 뿐 그것으로 그를 숭배하고 높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그를 다만 도와주고 보살펴 줘야 하는 대상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살펴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우리와의 관계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는 자들이 교만해 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되고 맙니다.

마지막 셋째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죄의 원인인 교만을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 위하여 우리를 오히려 주는 자에서 받는 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처럼 오히려 받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받는가? 무엇을 누구로부터 혹은 어디로부터 받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강도만난 사람으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강도만난 사람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엄밀히 말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가, 강도만난 그가, 그 장소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해 주시는 이유는 그가 가장 소외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문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강도만난 사람과의 마주함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눈이 뜨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얻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새로운 안목이 생긴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첫걸음이 됩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것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바깥에서 오는 것이므로, 즉 그 만남에 의해서 오는 것이고, 그리고 내가 아닌 타자인 그 강도만난 사람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은총의 경험입니다. 은총이란 나로 비롯된 놀라운 일이 아니라, 나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일을 말하는 데 이렇게 새로운 안목, 깨달음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은총의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가장 소외된 그들에게 다가감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그동안 끼어있던 잘못된 안목, 나 중심의 안목, 나의 계층과 나의 지위에서 비롯된 나 중심의 안목이, 이 강도만난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깨어지고, 새로운 안목, 새로운 관점, 새로운 생각으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보고 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고쳐나갈 겸손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결국 강도만난 자, 가장 소외된 자, 가장 힘없는 자가 의롭다고 해야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오늘날 강도만난 사람들에게 아픈 마음으로, 강도만난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하는 슬퍼하는 마음으로, 측은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변화를 입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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