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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석환

 

 

일상의 삶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마태복음서 25:31-46)

 

20191027

종교개혁주일예배

김석환 형제(새민족교회)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 때에 그는 또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은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것이다.]

- 마태복음서 25:31-46 -

 

 

 

인사

 

반갑습니다. 새민족교회 김석환 교우입니다. 새길 공동체가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 시간에, 특별히 말씀을 나누는 중요한 시간을 저에게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여러분들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에게는 오늘이 세 번째 예배 참석입니다. 이전에 새길교회 교우였던 청년운동 선배로부터 가끔 교회 소식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보다 1년 늦게 창립한 새길교회의 창립취지는 새민족교회 헌장과 닮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제정된 새길 신앙고백문과 새민족 신앙고백문은 구조와 내용이 거의 일치합니다. 한국사회와 역사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면서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란 성서를 매개로 하여 저와 여러분이 소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특산물 세 가지가 있는데 마늘, 사과, 독재자입니다. 어디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지금은 컬링으로 유명해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서 인근 대도시인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수학을 전공한 저는 서른 살 무렵 서울로 올라와서 수학 학습물을 출판하는 사무직 노동자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개신교를 처음 받아들였고, 이후 기독 청년운동을 했습니다. 지금은 새민족교회를 다니면서 오늘 평신도 강단교류를 주관한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50대의 나이로 축구와 독서를 즐기면서 현재 과천에서 아내와 딸 셋이 살고 있습니다.

 

제 소개를 들으니 어떠하신가요? 설교자로서의 자격이나 권위를 내세울만한 경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적인 자격이 없으면 종교적인 자격이라도 있어야할텐데 장로, 집사도 아닌 한 교우일 뿐입니다. 이런 제 처지를 잘 알기에 오늘 설교를 통해서 성서에 대한 지식이나 학문적인 견해를 말씀드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평신도 열린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교회의 정체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교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교회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요즈음의 일반적인 평신도는 살면서 어떤 신앙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지 편하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기준은?

 

오늘 제가 선택한 본문은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참고로 저희 교회는 새번역 성서를 사용하고 매주일 설교 본문이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에 따라 주어집니다. 오늘은 창조절 아홉 번째 주일의 본문이 주어져 있지만 낯선 첫 만남에서 여러 본문으로 소통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가장 익숙한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26장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수난을 앞둔 시점에 배치된 세 개의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이지요. 최후의 심판 날에 인자가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한 무리에게는 준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하고 다른 무리에게는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뜻밖에도 사소한 것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어떻게 대해주었는지가 그 기준입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는 교훈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실천적 기반으로 삼아 선교 현장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의 근거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양의 무리에 속할 것인지 염소의 무리에 속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강남역 CCTV 철탑 위에서 130일이 넘게 농성중인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 님, 전원 직접 고용을 주장하며 농성중인 톨게이트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플랫폼 노동자들, 이주 노동자들, 각종 소수자들. 이들이 우리 곁에 있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들입니다. 이렇게 본문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비종교적인 요소가 심판의 기준인 것에 화가 나거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넷플릭스에서 그날이 오면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미국 교회에서 칼턴 피어슨이라는 촉망받는 한 젊은 흑인 목사가 성공적인 목회를 이어갑니다. 그러던 중 르완다 사태를 보면서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10장의 말씀으로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설교를 하면서 교회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무신론자, 무슬림, 동성애자도 구원받는다고 하면 지금까지 힘들게 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한 우리는 뭐냐는 것입니다. 같이 구원받는다고 하더라도 노력한 우리와 무임승차한 그들 간에 보상의 차이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질문을 드려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현대의 종교인들은 마치 구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청약통장에 적금을 붓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천국을 또 다른 부동산 투자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불안감으로 교회를 다니시는 분은 여기엔 없겠지요?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스포츠부 기자인 위르겐 슈미더가 쓴 <구원확률 높이기 프로젝트>란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처럼 한 종교만 믿다가 죽었는데 구원의 문이 다른 종교에 있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4년 간 다양한 종교를 진지하게 탐구한 기록입니다. 위르겐 슈미더의 또 다른 책 <왜 우리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할까?>에서는 40일 동안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낸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결론은 무엇일까요? 죽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지만 사실은 거짓이었습니다. 진심은 부담스럽습니다.”, “왜 내가 설교를 한다고 했을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이란 물리적 공간이 있고 죽음의 순간에 내 행위의 선함과 경중을 따져서 기우는 저울추에 따라 결정되는 구원관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감명 깊이 읽은 한스큉의 <왜 그리스도인인가?>와 스퐁 주교의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란 두 책의 공통된 결론인 참 그리스도인은 참 인간이라는 것에 깊은 공감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구원이란 참 인간이 되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발현해내어 참 인간이 되는 것이 구원임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규범에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끔은 이 나이에도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한다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신이 종교를 통해서만 온다면 종교는 신의 감옥이 아닐까요? 아직도 종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종교를 떠나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는 스퐁 주교의 고백처럼 종교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선으로

 

다시 한 번 본문을 보겠습니다. 본문은 비유입니다. 예수는 비유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말은 화자, 청자, 상황의 세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글인 성서는 화자와 청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공유하지 못한 우리에게 예수의 이야기는 늘 낯설고 어렵습니다. 비유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나 해석은 제 몫이 아니므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대신 평신도의 시선에서 본문을 읽으면서 느낀 두 가지만 함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25장의 나머지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중간 지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택지가 영생과 영벌 단 두 곳 밖에 없습니다. 선택은 책임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안전한 다수를 선택합니다. 소수자가 살기에 얼마나 불편한 사회인지 누구나 절 알기 때문입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개신교가 반대합니다. 표준과 평균으로 구성된 사회 자체가 소수자에게는 억압이 됩니다. 그나마 지식인들은 그런 사실을 알기에 차마 대놓고 한 곳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양쪽의 잘잘못을 학문적,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구경꾼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사건에 있습니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건에 참여하기보다는 기록과 해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37절 예수께서는 너희는 '' 할 때에는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호수아 2415절에서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두고 세겜에 백성들을 모아두고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라고 선택을 요구합니다. 중간/중립이란 관념일 뿐 실체가 없습니다. 없는 실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4951의 싸움터에서 평론이나 하는 것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양과 염소의 공통된 반응입니다. 37절과 44절에 보면 두 무리들 모두 주님, 우리가 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양의 겸손과 염소의 교만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들이 각자 일상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습관적으로 하는 일을 칭찬하거나 책망하면 당황스럽지 않을까요? 일상의 삶이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염소의 삶을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양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구원의 조건이 종교적인 적립을 통해서라면 그나마 노력해보겠지만 일상의 삶이라면 저는 어떨까요?

 

저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수학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말로는 노동에 대한 거창한 이론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회사 생활에서는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고 비굴하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았습니다. 종교적 가치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우선을 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보면 삼성회장이 주관하는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는 물도 안마시고 심지어는 기저귀를 차고 들어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긴 회의를 견뎌야하기 때문입니다. 뉴스에서 박근혜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를 보면 참석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정말 열심히 필기합니다. 사장이나 장관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초등학생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시지요. 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제가 다닌 회사에서도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면 흔히 겪는 풍경입니다. 회의 전 모두가 A안을 주장하다가 회장이 참석해서 B안이 좋다고 이야기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B안이 타당한 이유만을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개혁주의자들은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calling)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 여성 신학자 도르테 죌레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미국에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노동의 결과물 때문에 제3세계의 또 다른 어머니가 자녀를 잃고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그 어머니는 군수산업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 출판업이긴 하지만 사교육 시장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범죄나 부도덕한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것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검사, 판사, 교사, 목사면 가능할까요? 한 개인의 삶이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이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곧 원죄입니다.

 

교회에서 저는 30년 가까이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생활했습니다. 무자격자가 야매로 가르쳤던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르쳤던 모든 것이 어쩌면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종교적 생활에만 익숙했지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는 비례해서 높아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렇게 많이 컸구나!"라고 하지요. 그런데 어른들이 오랜만에 만나면 "하나도 안변했네!"라고 합니다. 어른들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만 그런 것일까요? 기독교 운동의 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 활동이나 고난의 현장에 연대하는 활동도 내 생활의 최우선 순위에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병권선생의 <묵묵>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들야학에서 철학수업을 듣는 중증 뇌병변장애인인 신경수란 사람이 있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는 시간은 월 480시간입니다. 활동보조가 없는 시간이란 그들에게는 손발이 없는, 때론 눈이 없는 시간입니다. 실제로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시간에 화재가 나서 코앞에 있는 문을 열지 못해서 죽은 사건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주어진 480시간의 사용 계획을 세우면서 10%48시간을 미리 공제해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급히 잡히는 농성이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평신도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제가 몰염치하게 느껴집니다.

 

종교가 나를 완성시켜주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곳은 가정입니다. 밖에서는 적절한 포장이 가능하지만 집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년 가까이 교회에서 교사로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왔으나 하나 뿐인 딸과는 제대로 소통하지 못해서 도저히 아빠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아빠 사직서를 낸 적도 있습니다. “아빠 미안해요!”라고 딸이 사과하면 나도 미안해! 사랑해!”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할 의도였는데, 딸도 그런 아빠 밑에서 딸 노릇하기 싫다고 딸 사직서를 제 방문에 붙였습니다. 한 동안 힘겨루기를 하다가 아내의 중재로 겨우 수습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제 별명이 초딩 아빠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좋은 남편과는 더더욱 거리가 멉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에 대한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아빠는 집안일도 안하면서!”라는 딸의 지적으로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의식은 있으나 몸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강남순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사적 영역의 무능력자입니다. 교회에서의 나는 성실하고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아내가 보기에는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잘 듣고 때론 상담자로서의 역할도 잘 하지만 아내에게는 사무적인 태도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설교를 아내가 듣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이처럼 거대담론에는 능숙하지만 미시적 일상에서는 부끄럽고 서툰 존재입니다. 종교적 나와 사회적/개인적 나의 간극이 나사로와 부자의 간극처럼 멀게 느껴집니다. 종교적으로는 양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지만 일상의 삶을 돌아보면 염소에 가깝습니다. 중간은 없으니 정확하게 말해서 아직은 염소입니다. 다만 구원의 문은 매 순간 열려 있으므로 양의 삶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고백한바와 같이 내 종교적 경험과 연륜은 쌓여가고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일상의 삶은 참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국교회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의 집단인 교회의 모습은 제가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어떤지 다 아실 것입니다. 종교적 가치가 세속적 가치와 일치하고, 종교적 언어로는 사회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개혁적, 진보적, 대안적인 교회는 일반 교회와 다르다고, 예수와 닮았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김규항 선생은 오히려 바리새파에 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결론

 

성서를 읽으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은 성서 속의 사건에서 생각보다 하나님의 개입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입견이 편견으로 작용되어 성서를 종교적인 사건으로만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22년 동안 망치 하나로 산을 깨는 다스랏 만지의 이야기를 다룬 인도 영화 마운틴 맨에서 마지막에 기자가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지 말라는 것. 신도 우리에게 의지하고 싶을 지도요."라고 답합니다. 1976년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린 니콰라과 농민들의 투쟁을 그린 만화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에서 정부군의 탄압에 절망한 신학자 호아킨이 우리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아 라고 말하자 늙은 루벤 신부는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간이 신과 평등할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종교를 파는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요즈음 저의 종교적인 고민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교회란 무엇이며 예수가 누구인지를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답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사회에서 소비되는 형태를 보면서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종교란 가치중립적인 공공재가 아닌가? 교회, 성경, 하나님, 예수, 성찬 등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하여 찬성(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하는 사람들도 반대하는 사람들도 모두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착취하는 자본가들도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요? 성서의 가치/고백들도 결국은 그 시대 그 공동체/사람들의 고백이므로 참고가 될 뿐입니다. 그 예수는 그들이 고백할 예수일 뿐 우리의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타인의 예수를 추종하는 것은 타인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가 차별과 혐오의 상징으로 만든 예수를 정의와 평화의 예수로 만들어야 합니다. 개신교의 다른 가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개혁이란 어떤 교회, 어떤 성경, 어떤 예수, 어떤 하나님으로 만들어갈 것인가가 핵심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종교가 분리되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종교가 일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종교적 이력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면 가장 큰 반역은 일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당연히 죽음입니다. 수많은 역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예수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도로테 죌레는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일요일을 매일 매일 일상적인 날에 대한 반역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종교적 삶을 추구하기보다 일상의 삶을 종교적으로 변화시켜 나갑시다. 그리하면 일상의 삶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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