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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019.09.10 16:24

[2019. 09. 08] “홈 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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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홈 커밍”
(창세기 32:9-12)


 
2019년 9월 8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전 성공회대 교수)



[야곱은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고향 친족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부디, 제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너의 씨가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창세기 32:9-12 -



홈 커밍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고 에서로부터 도망을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돌베개를 베는 떠돌이를 생활을 하는 중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오랜 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는 라반의 딸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이들을 낳고, 재산도 모읍니다. 그러나 야곱의 재산이 많아진 것을 시기한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 나와서 먼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 여행 중에 형 에서의 영토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야곱은 걱정이 컸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으니 보복당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에서가 이미 큰 군대를 갖고 강성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형에게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에게 큰 위기가 온 것입니다.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야곱은 야훼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오늘 설교를 위한 본문입니다.


야곱이 가는 긴 여행은 한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이 고향 친족에게로 가면 많은 복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고향친족이 있는 곳, 곧 홈커밍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여행입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곳, 그 곳은 아브라함의 무덤과 아버지 이삭이 있는 가나안 땅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으로 향하는 길에 에서를 만나는 야곱은 그야말로 두려움에 휩싸인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항상 마음에 걸렸던 두려운 존재 형 에서였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서 어떻게 해야 그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를 만나기 앞서 야곱은 먼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홀로 뒤에 남습니다. 앞서 보낸 것들의 목록은 이렇습니다. 먼저 선물들이 보내집니다. 암염소 이백 마리, 숫염소 스무 마리, 암양 이백 마리, 숫양 스무 마리, 낙타 수십 마리, 소 수십 마리, 나귀도 수십 마리를 세 번으로 나누어 보냅니다. 그리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홀로 남아서 하루 밤을 얍복 개울가에서 지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씨름해서 이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다음 날 에서를 만날 때 야곱은 자기 뒤에 아이들과 부인들이 따라오게 하고 자기가 제일 앞으로 나가서 땅에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에서가 큰 감동을 받고 달려 나가서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둘이 함께 울었습니다. 다행히 서로 화해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무사히 여행을 진행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그 식구들은 목적지를 향한 여행을 계속 진행했는데, 결국 가나안의 헤브론이라고 하는 땅에 도착합니다. 거기에서 자기 아버지 이삭의 죽고, 야곱은 이삭을 헤브론에 안장합니다. 헤브론은 원래 가나안의 고대 수도였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족과 함께 이곳에 와서 살았고 아내 사라와 함께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후로 아랍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아랍인들은 이곳을 자기들의 영토로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곳을 자기들의 조상의 땅으로 주장하면서, 이 땅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집이나 홈이라는 것이 이처럼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지남침과 같고, 나침반과 같아서 끊임없이 우리는 그곳을 향하게 만듭니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면 조상이 있거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야곱에게는 조상의 묘가 거기에 있고, 사랑하는 아내 레아와 라헬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한국 사람들은 조상이 있는 곳으로 여행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신 곳, 그들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 갑니다. 성묘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념합니다. 조상이 묻혀 있는 곳이 내가 묻힐 곳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곳을 향해 우리는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노르웨이의 민요로 “솔베이지의 노래”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들었고 불렀던 노래입니다. 몰락한 부잣집 외아들 페르퀸트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온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고향에 돌아오는데 이미 백발이 되도록 그를 기다려 준 옛 애인 솔베이지가 그를 받아주고, 그 여인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여행을 하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안식할 곳을 찾아 돌아간다는 얘기이겠습니다.


고향, 안식할 곳, 홈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끄는 힘이 있는 것인지요? 저는 물론 거기에 친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더 중요한 것은 홈이라는 곳에는 평화와 화해가 있고 그렇기에 안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했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홈이라는 것은 이렇게 화해가 있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는 곳,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헬라어에 오이코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이나 가정을 가리킵니다. 이 오이코스라는 말에서 경제학이라고 하는 economics, 생태학이라는 말로 ecology 등 다양한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연합활동을 ecumenics라고 하는데 이것도 오이코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연합활동은 화해와 평화와 기쁨과 사귐의 잔치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여름에 유럽을 오래 자전거로 여행했습니다. 자전거 여행은 도보 여행보다는 빠르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고, 도중 위험을 당할 수도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가기 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갔습니다. 이번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마인츠 대학에서 초청 받아, 거기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덕분이었습니다. 자전거를 가지고 여행하다가 기차도 탔습니다.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이라 쉴 곳을 찾게 됩니다. 여행은 항상 위험하기 때문에 여행 중에는 멈춤이 있어야 합니다.  멈춤이 있어야 쉴 수 있고, 또 생각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행 중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머물면서 책도 보고 글도 썼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우리들의 삶 속에는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멈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무작정 다니기만 하면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멈춤이 있어야 하고, 문자를 읽고, 쓰기도 해야 정리가 됩니다.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자전거 타고 가면서 계속 생각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멈춰서 글을 쓰기 시작해야 생각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문자적 언어가 생각에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도마복음서라고 하는 문서는 1945년 이집트의 Nag Hammadi라는 곳의 밭에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항아리에서 발견된 외경입니다. 이 도마복음서에 흥미로운 말씀이 나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징표를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라. 그것은 움직임과 멈춤, 혹은 쉼이라고”. movement and repose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의 징표라고 했습니다. 엉뚱한 대답입니다. 운동, 즉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될 수 있고, 또 쉼이 어떻게 그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쉼에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멈춤이나 쉼 속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멈춤, 쉼, 안식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이 됩니다. 쉼 자체가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쉼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업자들이 매일 쉬니 그게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우문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요. 일없음과 쉼은 전연 다릅니다. 일없어서 고통당하는 것은 쉼이 결코 아닙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30명이 죽은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해고에 의한 쉼은 사회적 타살의 죽음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하다가 피곤해서 쉬게 되었습니다. 쉰다는 게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하, 이 일한 뒤의 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석양이 있는 저녁 무렵 일을 멈추고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그 모습에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영으로 함께 하시고 있다는 느낌을 그림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과 쉼은 함께 해야 합니다. 운동과 멈춤, movement and repose는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빠지면, 둘 다 없어집니다. 움직임만 있으면 삶이 무의미해지고, 멈춤만 있으면 삶이 절망이 됩니다. 


쉼, repose는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정지된 것이 아니라,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충만은 많이 가져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볼 수 있듯이 빈곤해져서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repose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부요함이 어떻게 이 가난함 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가난 속에 하나님의 부요함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들의 쉼 속에도 그리스도가 자리합니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쉼 속에, 안식일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repose라는 말과 좀 비슷한 말로 Tranquility란 말이 있습니다. 고요함이라는 말이겠지요. 시간의 정지를 말합니다. 시간의 정지가 실제로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의 정지를 경험합니다. 그 시간의 정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시간은 움직임과 운동을 말합니다. 시간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이해한 분은 성 어거스틴입니다. 이 시간성을 신학에서 매우 중시했고,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 내에서는 운동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와 개혁은 시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시간이 있다는 것은 현재 속에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현재 속에 기억이라는 것과 기대와 희망이라는 것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중요합니다. 시간성의 현재는 우리에게 엄청난 가능성을 줍니다. 시간성은 하나님의 역동적인 영이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영원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영원한 현재 속에 함께 있는 것이 영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멈춤의 시간, 쉬는 시간은 영원에 잇대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멈춤의 시간,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우리들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이 있는 공간을 홈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오늘 홈 커밍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홈은 물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마는, 지상에서는 역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힘들 때마다 찾아야 할 곳은 교회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홈이 교회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에 오래 다녔던 형제자매님들이 벌써 60고개가 훌쩍 넘어서서 70을 바라보고, 몇 분들은 80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안식처, 영원과 만나는 장소는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회를 우리의 진정한 안식처, 하나님과 만나는 영원한 시간이 흐르는 곳, 계시를 접하는 곳이 되도록 우리가 힘을 모아 기도하고 세워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최근 참 혼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국 후보자를 놓고 보수가 반대하고 있고 진보의 일부가 우려하면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청년들은 조국과 그의 딸의 문제로 매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진보 중에 상당수가 조국후보를 강하게 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논쟁 속에서 한국의 앞날을 걱정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도 걱정이지만, 앞으로의 세대들을 걱정하게 됩니다. 20, 30 대의 청년들 다수가 기득권 세대에 대해서 반발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놓고 우리는 분열된 마음을 가지고 여기 나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사이의 서로 다른 견해로 서로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일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는, 이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쉼의 공간 안에서는 우리가 서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오랜 동안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논쟁도 겸허히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매진해야 할 것은 우리 교회 공간이 우리의 진정한 집이 되도록 협력하고 합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 많은 사람들의 집입니다. 이번에 조국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놓고 사회전체가 갈라져서 싸우는 사태를 직면하면서,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갈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제가 뼈저리게 깨닫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알고서 혹은 모르고서 죄를 짓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교회는 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믿고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그러한 분입니다. 교회는 모든 분쟁이 종식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원의 시간 흐는 곳이며, 고향입니다. 우리가 결국 이르고자 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교회는 그것의 상징이며, 메타포이며, 사크라멘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우리 새길 교회가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나는 곳으로 만드는 곳이 되도록 여기에 우리의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한다는 것은 첫째로 빛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빛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빛은 길을 비춰주고, 진리를 드러내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빛은 곧 진리요 생명의 원리입니다. 교회에서 얻는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 삶을 밝히 보고 거기에서 길을 찾고, 진리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은 진리를 얻게 해 줍니다. 비밀을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우리 삶을 드려다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지게 해 줍니다. 이러한 투시력으로 세상의 비밀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신학적인 언어로 illumination(조명)이라고 합니다. 빛이 있으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있으면 앞을 못 보고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 시간 속에 있는 세상을 밝히 볼 수 있는 빛을 교회에서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만물의 드러남, 사태의 드러남을 가리킵니다. 이 빛이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 빛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인 좌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씀이란 것은 우리 삶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빛의 자녀는 시간 세계 속에서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안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 속에서, 멈춤 속에서, 고요함 속에서, 그리고 평화스러움, 화해함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느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서로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그런 사랑 속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화해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온 탕자입니다. 탕자를 받아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회개합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자기주장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우선 내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동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회개하고 뉘우치는 교회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학위원으로서 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새길교회가 여러 면에서 아직 미약합니다. 한국교회들이 점점 더 보수화되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 같아서 새길교회의 위상과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교인들의 진정한 집이 되어서 매주 홈커밍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는 홈이 되어서 한국 교회에서 예언자 역할을 잘 감당하고 한국 사회에 등불이 되는 교회로 우뚝 설 수 있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서야 합니다. 말씀에 굳건히 서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계시는 모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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