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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성수

 

 

딛고 선 현실, 향하는 시선

(갈라디아서 1:11-12, 5:1-6)


 

2019728

주일예배

김성수 형제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밝혀드립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1:11-12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5:1-6 -

 

 

들어가며: “행복하시지요?”

 

안녕하세요? 한 주간도 평안하셨는지요? 이 예배 가운데, 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저희들 가운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시지요?” 제가 결혼 후에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물론 안녕행복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안부를 묻는 인사말이겠지만, 그럼에도 한 청년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묻는 일은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서, 결혼 전에는 제 안녕의 안부를 묻는 것 정도였을 뿐, 그 이상 행복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을 직접 듣는 것은 저 스스로도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많이, 그리고 직접적으로 행복하냐는 안부의 인사를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7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낸 후 함께 겪는 결혼생활이라서 아직까지는 종종 실감이 더러 나지 않을 때가 더 잦습니다만, 불현듯 건네는 행복하시지요?”라는 안부의 인사말을 통해 오히려 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곤 합니다.

 

진정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감사한 안부의 인사임을 알면서도, 이 말 속에는 묘하게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도 불과 얼마 전 그랬듯이, 정말 결혼 후 결혼생활이 궁금해서 묻는 궁금함의 안부와 결혼생활이 참 만만치 않을텐데, 하는 묘한 위로감을 건네는 안부, 그리고 짓궂게는 자네도 한번 겪어봐야지, 하며 결코 쉽지 않은 또 다른 진정한 삶의 세계에 들어온 걸 반겨주는 묘한 동질감의 의미가 담긴 안부인 것도 같습니다. 이 모든 함축된 의미를 담아 결혼을 하셨든, 하지 않으셨든 물음을 돌려 드리면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시지요?”


많은 인생의 선배님, 신앙의 선배님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배우고 있는 후배로서, 늘 행복한 삶을 살아내시는 저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시간, 그리고 신앙의 시간

 

저는 비교적 오랜 연애의 시간을 보낸 후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시간과 신앙하는 시간이 많은 점에서 비슷하고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처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무렵과 처음 신앙하는 마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날 무렵의 그 첫 시간은 두근거림과 설렘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뜨겁습니다. 그 대상을 떠올리면 하루하루가 행복하기 그지없고 그 기쁨에 가슴은 두근거리고 마냥 설렜습니다. 둘째로, 그 두근거림과 설렘의 시간은 곧 기다림의 시간이 됩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전제된 기다림의 시간은 그 자체로 행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크나 큰 인내를 동반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서로를 향한 마음도 그 자체로 행복인 동시에 크나 큰 인내를 동반한 기다림의 시간이 꼭 필요했습니다. 셋째로, 내 뜻대로 혹은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겸손할수록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간에 있어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온갖 우상화가 자행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하듯이, 사랑의 시간에 있어서도 서로의 관계에서 내 뜻대로 혹은 내 마음대로 하려는 성향을 가장 경계해야 했습니다. 서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그래서 익숙하고 당연해질수록, 크고 작은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신앙의 시간에서도 익숙함을 가장 경계해야 하듯이, 사랑의 시간에서도 익숙함을 가장 경계해야 했습니다. 또 신앙이 깊어질수록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듯이, 사랑의 시간도 깊어질수록 겸손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선의와 호의의 마음일지라도, 그것은 곧 상대방을 향한 억압이자 우리를 향한 굴레가 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시간과 신앙의 시간은 온전히 전적인 신뢰로부터 가능하고, 나아가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작이며, 함께 걷는 여정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여정과 시간은 늘 좋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난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가뭇없는 긴장 속에 늘 조율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통해 성숙해진다고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특히 사랑의 시간과 신앙의 시간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상처와 아픔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파괴까지 하기에, 그 상처와 아픔이, 그리고 고통이 반드시 함께 나아갈 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랑하는 혹은 신앙하는 이의 자세와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감이 없는 이해는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가 결여된 공감은 종종 공허해진다는 것을 숱한 사랑과 신앙의 그 시간과 무게 속에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창한가요? 사랑하는 시간과 신앙하는 시간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는 마음이 들 때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 앎에 배반당하는 역설을 일깨워주기에, 여전히 배우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배움의 과정이겠지만, 여기 모인 저희 모두 주어진 삶 가운데 사랑의 시간과 신앙의 시간을 오롯이 잘 감당해내는 저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시간과 신앙의 시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공간

 

제 개인적으로 결혼이라는 삶의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겪은 작은 소회로 시작했지만, 사실 앞서 말한 사랑의 시간, 그리고 신앙의 시간이 모두 함께 녹아져 있고,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요? 응당 마땅한 의미에서, 바로 교회입니다.

 

지난해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를 묻다: 공공적/수행적 교회라는 주제로, ‘교회에 대한 일련의 물음들, 그 물음을 구성하는 요소들, 교회를 말하는 것의 어려움과 마땅한 교회의 존재 의미와 이유 등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나누면서, 그 이후로도 교회에 대한 고민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가시적 증표로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만 하는 구조적 존재 물음의 기초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도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 서 있습니다. 탈교회 시대를 드러내는 여러 징후의 표현들로,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거나,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교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등과 같은 표현들은 오늘날 교회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교회의 본래적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조하자면, 교회에 대한 암울한 현실과 희망적 이상의 심각한 불일치, 다시 말해 무엇보다 땅을 딛고서 존재해야 하는 교회의 현실과 하늘의 꿈을 품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야 할 교회의 이상 사이의 커다란 괴리에서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딛고 선 현실과 나아갈 이상 사이에서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요? 오늘 저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을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 교회의 존재 방식을 고민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한 단초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바울, 주어진 삶의 조건과 딛고 선 현실, 향하는 시선과 나아갈 이상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교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후 자주 펼쳐보게 되는 성서 본문이 바로 바울 서신들이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만 살펴보았지만, 대체적으로 바울은 서신 전반부에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의 신앙과 교회의 전통, 성서, 동료들의 신앙고백을 사실로서 열거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신 후반부에서는 신앙적 사실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클레시아 곧 교회에 닥친 문제를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서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조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적인 구성면에서 전반부가 신학이라면, 후반부는 윤리인 셈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디아서 5:1).”라는 전반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해방을 가져다주고 자유를 누리게 했다는 신앙적 진실을 신학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복음이 해방자유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갈라디아서를 관통하는 핵심 화두(話頭)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해방과 자유의 진실을 굳건히 믿고 서서 종살이의 멍에를 과감히 부수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당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와 구성원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앙의 문제로서 당시 큰 문제였던 할례에 대해 여러 물음들이 제기됩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 그들에게 제일 먼저 발생한 문제는 신앙의 모체가 된 유대주의와의 관계였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대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계속 고집할 것이냐의 매우 구체적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와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방인과의 관계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당시 할례라는 종살이의 멍에에 대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응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6).” 이렇듯, 바울이 제시하는 윤리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질서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 세상의 질서와 가치 체계를 상대화합니다. 복음에 기초를 둔 윤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윤리에 맞서는 확신을 분명히 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현실이라는 세상의 풍조를 철저히 외면하는 이상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상주의자가 으레 그러하듯이 갈피가 잡히지 않는 커다란 이야기만 한다거나, 자기의 이상 속에서만 완벽한 세상을 그려낼 뿐 현실에서는 아주 무력하기 마련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동가였고, 아주 현실적인 조직가였으며, 역동적인 공동체의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인 현실과 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내는 길을 고심하고 또 고심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다른 모든 바울 서신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의 에클레시아 곧 교회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했을 때마다 바울에게 문의했고, 바울은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이 제기한 물음에 성실하게, 또 구체적으로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에는 이상을 향한 급진성현실을 고려한 섬세함이 동시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주어진 삶의 조건과 딛고 선 현실, 그리고 향하는 시선과 나아갈 이상과 비전 사이에서 고민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특별히 주목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 서신들 전체에서 드러나는 주요하면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반복적인 언급들입니다. 첫째로,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다른 바울 서신들에게서도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구절로서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아디아서, 에베소서 등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항상 서신의 맨 앞에는 분명한 서신의 수신자를 꼭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고린도전서 1:2ɑ).”,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갈라디아서 1:2).”,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에베소서 1:1b)” 등 바울은 이처럼 서신의 수신자를 맨 처음 꼭 적시합니다. 바울이 마치 관용구처럼 즐겨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과, 항상 서신의 맨 앞에 분명한 수신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서의 딛고 선 현실과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향하는 시선으로서의 나아갈 이상과 비전 사이에서 바울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특별히 이 두 부분을 핵심적으로 주목한 이유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너무나 공통적으로 반복해서 발견되는 두 구절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신의 맨 앞에 분명한 수신자를 기록한다는 점은, 당시 각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들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나타낸다면, 관용구처럼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것을 넘어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이상적 가치를 가리킵니다. 충실한 삶이란 비단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름답게, 그리고 소중하게 살아내는 동시에 자기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제약 혹은 자기 삶의 조건을 뛰어넘는 이상과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에게 그 비전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고백과 표현 안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고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단순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거칠게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유와 삶, 실천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 마음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의 한계를 뛰어넘어 누군가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 분투하며 존재하는 신앙공동체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교회에 대한 암울한 현실과 희망적 이상 사이에서의 심각한 불일치는 비단 오늘 우리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첫 출발부터, 또 그리스도교 교회의 첫 출발부터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속에 분투하며 역사적으로 존속해왔던 것이 실상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적 이상과 비전이 없는 교회의 암울한 현실에 지나치게 얽매이거나, 현실 감각 없는 공허한 교회의 희망적 이상 앞에서 지나치게 허무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감 없는 이해가 잔인해지듯, 이상 없는 현실 또한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 없는 공감이 공허해지듯, 현실 없는 이상 또한 종종 공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서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으로서의 이상 사이에서 저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행하며, 기도하면서 한 걸음씩 내딛을 뿐입니다.

 

새길 신학과 신앙의 선배님들이 강조하여 일갈했듯이, 우리는 예수교회가 예수를 배반한 심각한 자기배반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고, 자기반성과 성찰을 잃어버린 채 세상과 담을 쌓는 맹목과 독단의 아직도 그런 교회를 다녀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잉태된 교회는, 예수가 사랑을 증언한 곳에서 태동된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를 지금/여기에서 재현해야 할 과제를 숙명적으로 지니지 않을 수 없고, 때문에 교회의 존재 근거 자체가 예수가 증언한 사랑에 기초하며, 예수가 실현하고자 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는 까닭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입증하기 위해 강조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본문도 이 바탕 위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밝혀드립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갈라디아서 1:11-12).”

 

지난 32년 전, 새길교회가 처음 창립되던 창립예배 당시 김창락 선생님의 하나님 나라 사건이라는 제목의 말씀증거 중에 교회에 관한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세계내적인 하나의 제도나 기관으로 화석화 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세상과 관계없는 영혼들의 결사로 둔갑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친목단체도, 이익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역사변혁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속에 있으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늘 기존 사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사회로서 빛과 누룩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기존 사회의 변혁을 지향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끊임없이 기존 사회를 탈출해서 전진하는 도상의 교회를 세움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역사 속에 사건화 하는 종말적 구원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현실에 매몰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세계내적인 하나의 제도나 기관으로 화석화되거나, 교회는 친목단체 혹은 이익단체가 아님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이상만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세상과 관계없는 영혼들의 결사로 둔갑하는 일이 없어야 함과 나아가 역사변혁적 구원의 사건이 이 세상에서 펼쳐져야 함을 역설합니다. 사회 속에 있으면서 사회에 매몰되지 않기를, 사회 속에 있으면서 기존 사회를 넘어서는 도상의 교회를 세운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의 공동체는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딛고 선 현실, 교회가 향하는 시선

 

오늘 우리의 교회가 딛고 선 현실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교회가 향하는 시선은 어떠합니까?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처럼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 없고, 이상을 고려하지 않은 현실처럼 건조하고 잔인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 위에 놓여진 교회의 운명은 아직 여전히 비루하지만, 이미 기어코 그 비루함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태생부터 불/가능한 꿈을 안고 비루한 세계 안에 던져진 교회의 의미를 집요하게 길어 올리는 일은 그래서 우리의 몫입니다.

 

먹고 사는 현실이 고되거나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고 불안함이 엄습할 때, 필연적으로 우리는 냉소와 회의로 가득 찬 현실주의에 매몰될 우려가 크거나, 공허와 허무로 가득 찬 이상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큽니다. 우리의 놓여진 구체적 현실과 우리가 나아갈 희망적 이상 사이에서 냉철한 주제파악이 결여된 이상주의도 큰 문제이고,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현실주의도 무의미합니다. 냉철한 주제파악이 결여된 교회의 모습은 그저 아득하고,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마뜩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교회가 처한 현실이 문제가 많아 외면하고 싶더라도, 그리스도인의 현실의 장()은 교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분명히 교회가 딛고 선 현실에 대한 냉철한 주제파악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교회의 시선은 예수의 삶과 죽음으로 점철된 복음의 본래적 의미에 두고서, 끊임없이 예수를 지금/여기에서 재현해내는 불/가능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존재적으로 언제나 교회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 늘 분투하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임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창조적이고 건강한 긴장 속에 교회의 현실과 의미, 이상과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물음을 던지며 나아가는 저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새길이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조율하며 정진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맺으며: 개인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공동체로


누군가 타인은 지옥(사르트르)”이라고 말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타인의 얼굴이 곧 신의 계시(레비나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물론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과 판단으로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언술이겠지만, 이처럼 타인은 지옥인 동시에 신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주어진 삶의 풍경에서 타인은 항상 변수가 아니라 늘 상수입니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삶(조현)”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으로 공동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이웃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입구이자, 공동체는 내가 내 안에 갇히지 않고 나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자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고쳐 표현하자면, 공동체는 자기비움과 자기초월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자,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더라도 무교회주의자가 될 수 없었고, 괴롭더라도 공동체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서로 지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서로 지체가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기에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매형제의 사랑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경쟁 구도 속에서의 부족함은 약점이지만, 사랑의 관계 속에서의 부족함은 그들을 더욱 굳게 결합시키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적, 존재적 운명이 이미 그러한데,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새길교회는 물음을 고쳐 묻고 또 고쳐 물으며 시작한 운명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을 때, 냉혹한 현실과 희망적 이상 사이에서 건강한 긴장의 끈을 잃지 않을 때, 우리가 딛고 선 현실과 향하는 시선 모두 끌어안고 함께 수렴할 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수 따르미들이 모여 이룬 새길공동체, 새길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길들여지기보다, 의존하기보다, 주체적 신앙의 결단으로 평신도 공동체를 일구었던 저희들이지만, 여전히 앎은 부족하고 저희의 삶은 연약합니다. 교회가 딛고 선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마땅히 교회가 향해야 할 시선을 포기하지 않도록 저희들을 이끌어주십시오. 사랑의 흔적을 깊이 남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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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7 2019 [2019. 07. 21] “도반(道伴) - 순례자(巡禮者)” file 2019.07.26 김용덕
1096 2019 [2019. 07. 07] "여행" file 2019.07.23 신영환, 우신영, 정선자
1095 2019 [2019. 06. 30] “침묵하는 하나님, 아파하는 마음” file 2019.07.12 김희국
1094 2019 [2019. 06. 16] “창틀에 걸터앉은 청년” file 2019.06.19 남기평
1093 2019 [2019. 06. 09] “소통하도록 이끌며 희망과, 능력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file 2019.06.13 최만자
1092 2019 [2019. 06. 02] “녹색은총” file 2019.06.13 이경옥
1091 2019 [2019. 05. 26] “칼과 귀, 치유와 평화 : 평화신학과 신앙을 위하여” file 2019.05.31 한완상
1090 2019 [2019. 05. 12] “수운과 만해와 전태일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file 2019.05.15 김상봉
1089 2019 [2019. 05. 05] “가족” file 2019.05.14 윤소정
1088 2019 [2019. 04. 28] “거룩한 수고자들” file 2019.05.03 송진순
1087 2019 [2019. 04. 21]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file 2019.04.26 박민수
1086 2019 [2019. 04. 14]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file 2019.04.16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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