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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남기평



창틀에 걸터앉은 청년

(사도행전 20:7-12)



2019616

주일예배

남기평 목사(한국기독청년협의회)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 사도행전 20:7-12 -



여러 교단이 청년주일을 지키고 있는 거 아십니까? 한국기독교장로회는 3월 둘째 주, 감리교는 9월 넷째 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5월 셋째 주 그리고 루터교도 5월 셋째 주입니다. 청년주일을 나름의 방식대로, 그 해 청년회(전국연합회)들이 주제를 선정하고 지킵니다. 이렇게 각 교단교회력에 명시해서 청년주일을 보내게 된 지는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근래 들어,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쇠락하는 기미가 실질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음세대, 혹은 현 교회지도력들한테,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관심을 갖고, 청년에 대해서 생각하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 청년주일이지요. 또한 당연히 기독청년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각시키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은 떠나가고 있습니다. 인구총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20년 사이에 약 93만 명 정도가 줄었습니다. 이를 1년 단위로 계산해 보면, 1년에 약 46천 명 정도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숫자가 어마어마합니다. 표를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청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도 심각하지만, 한국사회 내 청년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 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 기독청년들은 한국사회에서 겪고 있는 청년문제에 더해서 교회의 문제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로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기독청년협의회는 청년의제프로젝트 SEASON 1, 2를 통해서 교회 밖 그리고 교회 안, 청년과제들을 선정하고 이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청년들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청년들이 어떤 문제에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는 청년 당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유두고를 통해서 청년들의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일주일 동안 지내며, 드로아에서 강론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7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먼저, 친교 즉 코이노니아로 시작합니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만남의 시작은 친교입니다. 친교의 기본은 나누는 것이지요.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여러 기둥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코이노니아, 친교입니다. 다시금 7절을 보시면, '떡을 떼다'라고 나타나 있는데, 이 의미보단, '식사를 함께 나누다'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교회의 모습은 식탁 공동체로서의 모습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밥을 나눈 후, 바울은 강론을 시작합니다. 그것도 밤이 새도록 끝날 줄 모릅니다. 무교절이라서, 식사가 푸짐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식사 시간이 풍성한 만큼 오랫동안 진행되었을 것이기에, 밤늦게 코이노니아 즉, 친교가 끝났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바울의 강론은 밤새도록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두고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9절입니다.

 

9.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삼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성서는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짐작만 할 따름입니다. 많은 등불이 켜져 있음에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으면, 굳이 많이 밝혀 놀 이유가 없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무리 말재주가 수려해도 밤늦도록 이어지는 강론에 조금씩 지쳐갔을 것입니다. 꼭 조는 사람이 나타나고, 견디다 못한 어떤 이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목 춤을 추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잠을 이기기 위해서, 서 있는 행동, 뺨을 때리는 행동 등 다양한 모습 등을 연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유두고는 창틀에 앉아서 졸고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역시 성서는 유두고에 대한 정확한 신상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100주년 기념성서주석에서 보면, 유두고는 해방노예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고 말합니다. 해방노예가 되는 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먼저, 주인이 정해놓은 기간을 잘 버티거나, 엄청난 공을 세우거나, 법적인 조치로 해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방노예는 주인이 명령한 노역에만 벗어날 뿐이지,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노예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팍팍한 삶이 개선되지 않으면, 이들은 다른 주인이나 지주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일거리를 찾기 위해, 영원한 품삯을 구걸하는 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가족이 있다면, 가족을 부양해야만 하고, 자신도 살아갑니다. 따지고 보면, 해방노예라는 거창한 이름을 얻었지만, 실상 해방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지만, 부자가 된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차별구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된다면, 해방노예의 미덕은 성실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방노예로 살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국사회로 돌아와보겠습니다. 구의역 김군을 기억하실겁니다. 그리고 김용균도, 단순히 보면 산업재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강도 노동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청년들이 유두고와 같은 해방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청년들이 심정적 난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다시 성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유두고는 하루 종일 일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내어서 바울을 만나러 옵니다. 바울이 강론한 기간이 초실절을 막 지난 무교절(보통 동시에)입니다. 무교절을 맞이하는 그 주간과 그 달은 보리 수확이 한창일 때입니다. 초실절은 보리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입니다. 이 당시, 전국 방방곡곡 혹은 소아시아 전역은 보리를 수확하기 위해서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수확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한 해 보리농사의 결과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해본다면, 유두고는 하루 종일 보리를 수확하고 강론을 들으러 온 것임 틀림없습니다. 고된 노동 뒤에 강론을 들으면, 꾸벅꾸벅 조는 것은 당연지사지요. 늦게 도착했기에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인파를 비집고, 바울선생이 잘 보이는 창틀을 선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많은 유두고들이 존재하지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을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투 잡, 쓰리 잡을 뛰는 이들, 야간수당까지 받기 위해 밤낮을 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어찌 보면 하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상태를 벗어나가기가 쉽지 않음을 우리는 피부로 체감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대부분들이 청년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청년들이 오늘날의 유두고이고, 특별히 창틀에 앉아 졸고 있는 이가 우리 청년들입니다. 교회 청년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지금 그리고 오늘 최선을 다하면서, 희생하면서 버티고 버팁니다.

 

2014년 고등학교 졸업생을 기준으로 대학 진학률이 70.9%입니다. OECD평균이 40%이니,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2배가량 높습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이 하나의 당연히 가야 할 정규코스정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학등록금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GDP대비 국공립대학교 등록금 액수가 OECD 4위이고, 사립대학교와 합쳤을 때에는 미국에 이어 2위입니다. 1인당 실질등록금 액수는 세계최고수준입니다. 예체능을 제외한 정규과정 4년을 성실하게 대학을 다녔을 때, 보통 등록금만 2500만 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요새는 대학원까지 진학하니, 학생들의 부담은 더 커집니다. 이 모든 등록금의 대부분은 학자금 대출을 받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빚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청년들이 대학에서부터 삶의 등급이 나누어진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제가 대학생만 이야기했지만, 대학을 가지 않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비정규직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되고, 더 억울한 것은 어떠한 청년담론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의 청년은 대학생으로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담론과 분위기는 대학생 위주로 돌아갑니다. 대학생 청년들은 3천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결혼 그리고 내 집 마련 등 삶의 질 자체와 미래의 계획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부채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부채를 지고 사는 청년들은 실용적, 실질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미래를 내다보기 보다는 한치 앞만 보기 급급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자꾸만 빚을 지라고 강요합니다. 청년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 그리고 여가가 있는 삶은 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들이 주일 오전 예배나 금요 철야에 나온다면, 유두고처럼 저녁에는 어쩔 수 없이, 강론을 들으러 왔지만, 고된 하루의 저녁시간은 졸음이 당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늦잠자기 일쑤이지요.

 

유두고는 떨어져 죽습니다. 창틀에서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사회생활의 살얼음판, 냉혹함은 물론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다, 라는 냉소에 빠져 있습니다. 창틀에 앉아서 졸다가는 까딱하다, 죽을 수 있듯이, 소외당하고 배제당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사회적 죽음은 일찍부터 삶의 자리가 정해져서 더 이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 계급 간에 유동성과 변화가 없는 죽은 사회에서 양산된 현상이 즉 사회적 죽음입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답은, 확실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주는 답은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근거 없는 긍정으로 성공하라고, 주입합니다. 오로지 상위계급만 바라보기에, 유두고처럼 창문 난간에서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어떠한 사회적 조치나 안전망이 없습니다. 오늘날 청년에게 실패는 곧 죽음, 혹은 사람구실 못하는 이들로 치부됩니다. 이런 압박감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창틀은 누군가 졸다가 떨어져 다칠 수 있음에도, 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리조차 내어주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현실이고,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졸아서 삼층에서 떨어진 유두고 개인을 탓하게 됩니다. 개인을 탓하는 사회, 개인을 탓하는 교회는 바로 노답입니다. 답이 없는 사회는 절망적이고,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유두고가 왜 졸았는지, 왜 창문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개인의 성실과 불성실 그리고 자격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이 사회는 너무나 불공평하고 기회와 출발선이 균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년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청년들에게 위로의 공간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까?

 

유두고는 떨어졌습니다. 그 즉시, 바울은 유두고에게로 달려갑니다. 10절입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유두고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He's alive" 그는 살아있습니다. 하고 외칩니다. 오늘날의 유두고들에게도 바울의 외침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여기 유두고가 살아있다”, 라는 호명은, 오늘날의 유두고, 곧 청년들이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체제나 방식을 당장 바꾸어 내는 것이 힘들다면, 바울처럼 외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우성쳐야 합니다. 오늘날의 유두고의 존재, 창틀에 앉아 위태위태한 누군가의 존재를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끌어안을 마음의 품이 있어야 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2.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여기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NIV에서는 "was greatly comforted"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단히 큰 위로를 받았다"로 해석이 가능한데, 적어도 유두고를 집으로 데려간 이들은 그의 동료나 지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같은 처지와 공감대를 가진 이들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한데, 그 마음은 공감이고, 더 나아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교회이지요. 우리 공동체의 마음쓰기에 따라서, 앞으로 공동체의 미래가 보입니다. 파커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마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배 공동체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몸소 구현할 때 그 생생한 증언은 어떤 교리나 경전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황인찬 시인의 무화과 숲이라는 시 마지막 부분이 이렇습니다.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유두고와 그의 친구들은 바울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바울의 끌어안음이고, 살아있다, 라고 호명하고 대신 외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살아있지만 이 사회로 의해서 죽어간 이들에게 그리고 타의 던 자의 던 이 사회로 의해서 잊혀진 유두고들에게 우리는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가능성과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의 유두고들은 사회적 죽음을 넘어, 쉽게 목숨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청년들은 쉽게 공동체를 훌훌 털고 미련 없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사회로 인한 죽음의 행렬은 멈춰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울의 행동입니다. 진심으로 위로하고, 진심으로 이들을 호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강론의 시작이 코이노니아, 친교이듯이, 서로 "너나들이", 서로 너니 나니 하면서 허물없이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청년들이 머무르기에 따뜻한 환대의 공간입니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환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환대는 여기서 자리 없는 자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무권리인 자에게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중략)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러한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표현된다.

 

이번 주, 오늘날 유두고가 누구인지 살피고, 특별히 기독청년들에게 이들 존재자체를 이해주고, 진정성을 품어주셔서,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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